Moritz 사건과 RBG의 탄생
(2015년 8월 4일 페이스북 최초 게시)
Notorious RBG 방한 특집 두 번째입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 사는 Charles E. Moritz라는 싱글남이 여러 해 동안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당시 세법에 따르면 싱글녀가 부모를 부양가족으로 모시고 살면 간병인 보수 등 일정 비용에 대해 세금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싱글남에 대해서는 그런 조항이 없었습니다. Moritz는 연방헌법의 평등보호(equal protection) 조항을 근거로 자신에게도 세금공제 혜택을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데, 세법 전문 변호사인 마틴 긴스버그가 이 사건을 집에 들고 옵니다.
마틴: 이 사건 한번 읽어봐요.
RBG: 저 세법 사건 안 하는데.
마틴: 그래도 한번 읽어봐요.
(5분 경과)
RBG: 우리 이 사건 합시다.
RBG와 마틴은 공익활동(pro bono)으로 Moritz를 대리하여 제10연방항소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습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작은 사건은 RBG의 법조인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RBG가 아무 이유 없이 5분만에 마음을 바꾼 것은 아니었겠죠.
연방항소법원에서 Moritz에게 승소판결을 한 것까지는 괜찮은데, 이 시점에 당시 solicitor general (연방대법원 사건에서 연방정부를 대리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법무부 차관) Erwin Griswold가 지금 관점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희대의 뻘짓을 벌입니다. Moritz 사건을 연방대법원에 상고하는데, 이 사건에서 국가가 패소하면 수많은 다른 연방법률의 합헌성에까지 문제가 생긴다고 하며 그런 법률 목록을 정리해서 연방대법원에 제출하는 서면의 Appendix E로 첨부합니다.
다시 말하면 Moritz 사건에서 문제가 된 세법 조항처럼 성별에 따라 차별 취급하는 법률 목록을 만들어 연방대법원에 제출한 것이지요. 무려 RBG 앞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법률은 이런 것이 있으니 위헌소송 해보라고 자백을 한 셈입니다. 때가 1970년이니 법무부가 연방법률에서 성차별 요소가 있는 법률을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하버드 로스쿨 학장을 21년이나 지냈고 민주당 존슨 행정부에 이어 공화당 닉슨 행정부에서까지 solicitor general을 역임한 실력자인 Griswold가 국방부를 설득해서 무려 국방부에 있는 최신 컴퓨터를 돌려 하필 그 따위 자료를 만든 것입니다.
연방대법원은 Moritz 사건에 대한 심리 자체를 하지 않고 상고를 각하했지만(미국 연방대법원은 하고 싶은 사건만 함), 문제의 Appendix E는 이미 소송기록에 편철되어 RBG의 손에 들어갑니다. Appendix E는 다름 아닌 성평등을 위해 위헌이라고 공격해야 할 법률 리스트였고, 실제로 RBG는 Appendix E에 밑줄 쳐가며 위헌소송을 주도하여 여권운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후 RBG는 이런 종류의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기발한 전략을 씁니다. 바로 성평등 문제를 다루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종종 여성이 아닌 남성을 원고로 내세우는 것이죠. 평등보호(equal protection) 조항 사건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i) 차별의 근거가 되는 표지(성별, 인종, 성적 지향 기타 등등)가 무엇인가, (ii) 해당 표지에 따른 차별에 대해 어떤 심사기준(scrutiny)을 적용할 것인가라는 판단구조를 가집니다. 따라서 남녀차별 소송에서 남자를 내세우든 여자를 내세우든 위헌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있는데 어떤 심사기준이 적용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연방대법원은 1976년 Craig v. Boren 사건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sex-based classification)에 대해서는 중간단계 심사기준(intermediate standard of judicial review)이 적용된다고 판시하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데 RBG가 기여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데이터로 검증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고위법관이 남성인 상황에서 남녀를 차별하는 법률을 위헌으로 선언하는 것에 대한 심정적 주저함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RBG를 탁월한 변호사라 평가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선명성을 내세우고 미디어가 보기에 섹시한 소송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법원을 설득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여 실행하고, 향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리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소송을 수행했다는 것이죠. RBG는 실제로 이기는 변호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변호사였습니다. 원고가 남자이면 어떻습니까. 성별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는 법률에 대해 위헌판결을 받아내고, 성차별 사건에 대해 향후 가중된 심사기준이 적용되게 함으로써, 실제로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죠.
1심부터 질 것이 뻔한 동성혼인 소송을 유명인을 원고로 내세워 아무 대책 없이 제기한 변호사들(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에 써있는 문구를 근거로 기각하면 그 다음엔 대체 어떻게 하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롱뇽을 원고로 내세운 소송 서면에 자기 이름 쓰고 도장 찍는 변호사들하고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는 분입니다.
다음 편에는 RBG의 연방대법관으로서의 영향력에 대해 한번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