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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훈 May 12. 2021

Notorious RBG 방한 특집 (3)

연방대법원 소수파 RBG의 영향력

(2015년 8월 5일 페이스북 최초 게시)


Notorious RBG 방한 특집 마지막 편입니다.


현재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념 성향은 보수 5: 리버럴 4입니다. 로버츠, 스칼리아, 케네디, 토머스, 얼리토 vs. 긴즈버그, 브라이어, 소토마이어, 케이건. 대법관 개개인은 오고 갔지만, 보수 우위 구도는 레이건 대통령 이래로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존 로버츠가 대법원장에 취임하고, 중간에서 스윙보트(swing vote) 역할을 하던 산드라 데이 오코너의 자리를 새뮤얼 얼리토가 채우면서,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보수적인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RBG가 반대의견(dissent)를 내고 반대의견을 낸 리버럴측 대법관을 대표하여 법정에서 반대의견을 읽는 경우도 늘어만 갔습니다. 대법관으로서 맨날 반대의견만 읽고 있으려면 얼마나 무력감이 들까요. (RBG의 의외의 절친 스칼리아는 그걸 즐기는 것 같지만)


이런 상황 때문에, 2016년 대선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5:4 구도라도 유지하려면 오바마가 있을 때 젊은 리버럴 대법관을 충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최고령 연방대법관에다 약간의 건강 문제가 있는 RBG는 사퇴 압력까지 받습니다. 감히 Notorious RBG에게 사퇴 압력을 하다니.


그런데 말입니다,


5:4 구도가 고착화되어 있다 해서 리버럴 측이 매번 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텀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대표적 업적인 건강보험 개혁에 대한 또 한 번의 합헌 판결(2012년 판결과는 다른 쟁점), 동성혼인 허용 판결, 한국에서 관심은 덜하지만 Fair Housing Act 합헌 판결 등, 오랜만에 리버럴 측이 완승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이유를 들여다 보면 RBG의 리더십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는 분석입니다.


리버럴측이 소수이니 리버럴측 의제를 지켜 내려면 보수 쪽에서 최소 한 사람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스칼리아, 토머스, 얼리토는 어차피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나마 케네디가 중간에서 스윙보트였는데 최근에는 보수 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고, 로버츠는 대법원장 지위 때문인지 기존 법률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근본부터 뒤흔드는 역할은 내켜 하지 않지만 사실 만만찮게 보수적인 사람이고. 쉽지 않죠.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는 RBG의 리더십은 간단합니다. 다른 것 다 떠나 보수측 대법관 한 명을 설득해서 이기는 판결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리버럴측 대법관들을 통솔하여 'discipline' 즉 엄격한 규율 내지 절제를 보이는 것입니다.


최근 동성혼인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Obergefell 판결을 보겠습니다. 이 판결의 법정의견은 보수측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썼습니다. 리버럴 대법관이라면 동성혼인을 허용하는 역사적 판결을 쓰는 영예를 마다할 리 없습니다. RBG는 판결 이전에 이미 동성혼인 주례까지 섰던 인물이니 더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보수측인 케네디가 법정의견을 쓰도록 맡겼습니다.


리버럴측 대법관 4명은 별개의견 즉 법정의견과 결론은 같지만 이유는 달리 제시하는 의견조차 달지 않았습니다. 케네디 대법관의 법정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법정의견은 적법절차(due process) 조항을 근거로 했는데, 최근 듀크 로스쿨 강연에서 RBG는 자기가 법정의견을 썼더라면 평등보호(equal protection) 조항을 근거로 했을 것이라 밝혔습니다. 어느 조항을 근거로 하는지는 향후 적용되는 법리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별개의견을 내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습니다. 보수 쪽인 케네디가 동성혼인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결론에 동의하는데, 다음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데, 법적 구성의 차이를 가지고 동성혼인 허용이라는 엄청난 결론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RBG 본인의 얘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법관으로서의 품위, 오랜 실무경험만이 가져올 수 있는 중용의 미덕, 최고 법원 법관으로서의 진정한 자부심이 흘러 넘치는 말씀입니다.


"그건 아마도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는 단일한, 통일된 의견을 내는 것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왕이 아니고, 다수의견이 내 생각과 아주 비슷하다면, 굳이 내가 꼭 하고 싶은 대로 의견을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 이런 절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소비자 - 다른 법관, 변호사, 대중을 고려합니다. 연방대법원이 확립하는 법리는 앞으로 그들이 여기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사정을 고려한다면, 혼란스러운 의견보다 명확한 것이 좋습니다."


"Perhaps because in this case it was more powerful to have the same, single opinion. ... That kind of discipline is to say, “I’m not the queen and if the majority is close enough to what I think ... then I don’t have to have it exactly as I would have written it.” ... On the whole, we think of our consumers—other judges, lawyers, the public. The law that the Supreme Court establishes is the law that they must live by, so all things considered, it’s better to have it clearer than confusing."


반면 동성혼인 허용 판결에서 보수측 대법관 4명은 사이좋게 반대의견 4개를 냈습니다.


- 로버츠 반대의견 + 스칼리아, 토머스 참여

- 스칼리아 반대의견 + 토머스 참여

- 토머스 반대의견 + 스칼리아 참여

- 얼리토 반대의견 + 스칼리아, 토머스 참여 


누가 누구 의견에 어디까지 동의한다는 것인지 알아먹기조차 힘들고, 사실 로버츠/얼리토의 반대의견하고 스칼리아/토마스의 반대의견은 동성혼인이 헌법상 권리는 아니라는 결론 말고는 조화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넓게 보면 보수측이지만 근본적 법철학의 색깔은 좀 다릅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전부터 동성혼인에 적대적이지 않던) 케네디를 설득해서 끌어 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이 사건에서는 그야말로 보수가 분열로 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성혼인을 인정받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애를 썼지만, RBG의 리더십 그리고 RBG의 리더십을 따른 리버럴 대법관들의 절제가 마지막 점 하나를 찍은 것이라고 할까요.


남의 나라 대법관 RBG 얘기를 3편에 걸쳐 주절주절 길게 썼는데 이게 다 부러워서 그렇습니다. RBG와 같은 자부심과 품위를 보여주는 법관, 소수파이지만 이기는 방법을 찾아내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RBG 같은 변호사가 왜 한국에는 없을까 싶은 것이지요. 지금 대법원은 안타까운 지경이고(대법관 개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institution 측면에서), 헌법재판소는 5:4도 아니고 8:1(김이수 재판관)이죠. 다른 한편 저는 인권 사건 변호사들이 뜻은 높고 약자를 향한 애정은 깊었으되 프로페셔널답지 않은 판단과 행동을 한 경우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RBG가 언제 은퇴하실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Notorious RBG의 모습을 잃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오늘 대법원 강연회에 참석하면 Notorious RBG 티셔츠를 하나 사서 입고 갈텐데, 가시는 분 중에 그런 센스와 용기를 가진 분이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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