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매일 아침 일찍 일을 나갔다. 종종 잔업을 했고, 잔업이 있는 날엔 밤 9~10시가 되어야 엄마 얼굴을 겨우 볼 수 있었다. 주말도 예외는 없었다. 엄마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일이 많을 적엔 일거리를 집으로 들고 오기도 했다. 그 때문에 집에서는 종종 부품에서 나는 고무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엄마와 나란히 앉아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게 내 아홉살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내 즐거움과 달리 엄마는 주말과 밤낮, 집과 회사의 구분없이 일하는 통에 늘 일에 절어 피곤하고 예민해보였다.
언니와 나까지 피곤한 엄마를 더 성가시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알아서 밥을 챙겨먹었고 당번을 정해 집 청소와 설거지까지 처리했다. 학교 알림장도, 숙제와 준비물도 알아서 챙겼다. 엄마를 위해 필살기인 어깨 안마나 다리 주물러 드리기를 애교를 섞어가며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의 노력에도 종종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짜증을 버럭 내곤 했다. 특정 상황에 화를 내는 게 아닌 정말 예상할 수 없는 순간들에. 짜증의 끝은 늘 “지겨워 죽겠어” 라는 말로 끝나곤 했다. 엄마도 자신의 스스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아보였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혹시 정말 너무너무 지겨워서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언니와 내가 지겨운 건가? 라는 생각에 걱정이 드는 한편 엄마가 습관처럼 내뱉는 ‘지겹다’는 말도, 그 말을 매일 듣는 것도 지겨웠다.
지겹다 라는 말은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나에게 상처가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잘 사용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 부턴가 회사에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집에 가는 길에도 하루 종일 ‘지겨워 죽겠어.’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지겨워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라고. 그런 말을 쓰는 내가 정말 싫었지만 1분 간격으로 지겹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회사에서 안 맞는 상사와 일을 하는 것도, 월급은 눈꼽만큼 주고 새벽 4시까지 사람을 부려먹으며 온갖 생색을 내는 사장도, 해도해도 줄지 않는 일을 하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모든 게 지겨웠다. 한번은 지겹다는 말을 너무 자주 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이 있을 때도 습관적으로 튀어나올까봐 스스로 입단속을 해야 했다.
사는 게 지겹다는 것. 아홉살 때는 마냥 무서웠던 말이었는데, 내가 서른 살이 되고 보니 과거의 엄마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었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엄마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지겨움을 참지 못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죽고나면 지겹다는 생각도 안 하겠지. 죽고나면 회사를 안 가도 되겠지. 죽고나면 그 팀장 얼굴은 안 봐도 되겠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밤이 되어 자야할 때가 되면 지겹다는 생각은 초 단위로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겹다는 말을 매일 같이 내뱉고 나서야,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같이 하고나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제야 가까운 정신의학과 병원에 전화를 걸어 상담 일자를 잡았다. 예약이 꽉차 있어 초진환자의 가장 빠른 예약일은 두달 후에나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두달 후 병원을 찾아 몇 가지 검사를 받았고, 나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수개월 동안 병원을 열심히 다니며 지어준 약을 꼬박꼬박 챙겨먹은 덕분인지, 힘들었던 회사를 퇴사해서인지 나는 예전만큼 지겹다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는 않는다.
더이상 지겨움과 죽음이 나를 잠식하지 않게 된 날, 나는 문득 20년 전의 엄마가 떠올랐다. 언니와 나는 엄마가 지겨워 죽겠다고 말하는 걸 참고 참다, 결국 그 말 좀 그만하라고 부탁했고 엄마는 그 날 이후로 지겨워 죽겠다는 말을 더이상 하지 않았다. 그 말을 안 듣게 된 우리는 기뻤지만 그때의 엄마도 지겹지 않게 되었을지는, 더이상 지겨워 죽고싶지 않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퇴사를 할 수도, 우리를 떠날수도, 그렇다고 병원을 찾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렸을 때 보았던 엄마의 나이가 가까워져서야, 서른 아홉의 엄마도 우울했던 건 아닐까, 이제야 엄마를 이해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