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이번 주제로는 글이 써지질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써지질 않았다. 처음 주제를 접했을 때는 잠시잠깐 여러 권의 책들이 지나갔지만 그래도 역시 한 권의 책으로 글을 시작해야 한다면 이 책이 아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죄와 속죄의 저편" (Jenseits von Schuld und Sühne, 1966) / 장 아메리
장 아메리(1912-1978)는 오스트리아 작가이자 철학자로, 본명은 한스 메이어(Hans Mayer)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서 나치의 박해 속에서 경험한 고문, 고통, 절망 등의 극단적인 경험을 철학적으로 탐구했다. "자유죽음" (Hand an sich legen, 1976)이라는 저서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선택적 죽음에 대해 설명했다.
이 책이 내 글의 시작일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저자의 인생이 내게 풀리지 않는 큰 의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인생이 가슴 아팠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에서 살아남고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이 겪고 있는 내적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였음에도, 끝내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관철이라도 하듯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인생이 주는 허무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왜 결국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인간은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얻지 못해 고통스러웠고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십 년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 동안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애썼다. 애썼음에도 여전히 내 내면의 겪음을 글로 써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진 못하였지만, 다신 앞이 없을 것 같던 역사 속에서도 인류는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아왔던 것을 기억 하며 여전히 그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가 존재하고, 이웃나라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총과 칼이 휘둘러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쫓고,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이, 폐허에서도 언제나 생명을 자랐고, 반드시 풍요로운 순간을 또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이 내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허송세월" / 김훈
어제 오랜만에 들른 교보문고에서 김훈 작가님의 책을 구매하게 됐다. 나는 오래전부터 김훈 작가님을 좋아해 왔다. 작가님의 간결한 문장을 좋아하고, 간결함 속에 알듯 말듯 스며있는 깊은 사유를 좋아한다. 화려하진 않으나 묵묵하고 담담하게 쓰여내려 져 간 작가님의 글이 한국의 수묵화와 닮아 있다고 느낀다.
책의 첫 장은 원고지로 되어있었다. 김훈 산문이라 쓰여있는 책의 표지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첫 장이구나 생각하며, 김훈의 책 답다고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책은 산문집 다운 어렵지 않은 글들로 잔잔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었으나, 담담하게 적힌 문장들은 금세 가슴에 파고들어 고요한 파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술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p20
"남의 집에 저녁 마실 온 듯이 문상 왔던 사람들이 몇 달 후에 영정 속에 들어가서 절을 받고 있다.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 허깨비가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 p35
"산 자의 시간과 죽은 자의 시간은 서로 넘나들지 못한다. 이 경계에 관하여 산 자는 말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p35
"나와 세상 사이에 본래 칸막이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 내 손으로 칸막이를 세워 놓고 말의 감옥 안에 스스로 갇혀서 그 안에서 말을 섬기면서 살아왔으니 불쌍하다. 나여,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 p40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p43
아름답다. 나는 이런 문장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깊은 사유의 세계를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에 감탄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깊은 위로를 얻는다. 언어와 언어의 배열이 겹쳐지고 겹쳐져 문장이 되고 글이 되고 커다란 세계를 만들어낸다. 수십만 갈래의 갈림길들 앞에서 매 순간 고민하셨을 작가님의 고뇌가 느껴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렁임을 느낀다.
아우슈비츠의 기록을, 상실의 시대를, 1Q84를 읽던 어린 소녀는 끝 모를 인생의 허무함 앞에 무너졌으나 삶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여전히 살아나 이제는 담담한 문장 속에 녹아있는 인생의 깊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삶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나 그 속에는 햇볕을 쪼이는 시간 역시 존재하고 있었음을, 허송세월로도 바쁠 수 있는 시간들이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 이것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한걸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