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디 이펙트 The Effect
사랑에 빠진 순간, 그것은 마음의 일일까, 아니면 뇌 속 화학물질의 작용일까?
루시 프레블의 연극 '디 이펙트(The Effect)'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항우울제 임상시험에 참여한 두 청년, 코니와 트리스탄이 실험 도중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들의 감정은 진짜 사랑일까, 아니면 약물의 부작용일까? 연극은 관객에게 사랑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이 작품은 임상시험이라는 설정을 통해 제약 산업의 윤리,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 과학적 객관성과 인간 감정의 경계 등 무거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특히 임상시험을 감독하는 의사 자신이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는 설정은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연극은 묻는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생물학적 반응, 약물, 외부 조건이 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디 이펙트'는 영국 초연 당시 정서적 깊이와 지적인 대사, 정신 건강이라는 동시대적 이슈를 날카롭게 다뤘다는 점에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NHS(영국 국민보건서비스), 항우울제 사용, 임상시험의 윤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했던 시기와 맞닿으며 관객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을 쓴 '루시 프레블(Lucy Prebble)'은 연극과 TV, 영화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극작가이자 프로듀서로, 날카로운 주제 의식과 실험적인 형식으로 주목받아왔다. 2003년 비평가협회가 선정한 '가장 유망한 극작가'로 데뷔한 이후, 기업 사기를 다룬 문제작 '엔론(Enron)'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고, 로열 코트와 치체스터 페스티벌 극장에서 매진을 기록한 뒤 웨스트엔드에 입성해 화제를 모았다. 2019년 올드빅에서 초연한 '아주 비싼 독(A Very Expensive Poison)'은 정치적이면서도 감정적인 메타 스릴러로 호평받았다. 단순한 정치적 암살 사건을 다룰 뿐만 아니라,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연극이라는 형식이 진실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함께 보여주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받으며 올리비에상 최우수 신작 연극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루시 프레블의 연극 '디 이펙트'는 2012년 런던 내셔널 시어터 코테슬로 극장(지금의 도르프만 극장)에서 처음 막을 올렸다. 빌리 파이퍼(Bille Piper)와 존조 오닐(Jonjo O'neill)이 주연을 맡고, 루퍼트 굴드(Rupert Goold)가 연출한 이 초연은 현대 영국 연극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된다. 이 작품은 런던 내셔널 시어터와 헤드롱(Headlong)의 공동 제작으로 2012년 11월 6일부터 2013년 2월 23일까지 공연됐다.
Love is double blind.
사랑은 눈을 가린 채 서로를 알아가는 실험이다.
작품의 슬로건처럼, 연극은 감정이 진짜인지 약물의 영향인지 알 수 없는 임상시험 상황 속에서 사랑과 정신 건강, 그리고 과학의 윤리적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이후 2020년 앤서니 닐슨 연출의 리바이벌이 런던 불러바드 극장에서 예정되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조치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2023년, 제이미 로이드(Jamie Lloyd) 연출로 내셔널 시어터의 리틀턴 극장에서 다시 살아난 이 작품은 파파 에시두(Paapa Essiedu)와 테일러 러셀(Taylor Russell)의 열연, 감각적인 무대 디자인, 대본의 현대적 수정 등을 통해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수트라 길모어(Soutra Gilmour)는 기존의 리틀턴 무대 위에 관객석을 새롭게 설치해 실험실과도 같은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했고, 블루 톤의 색채는 차가운 임상 공간을 시각적으로 재현했다. 무대 바닥이 아주 밝게 빛나고, 공간을 조명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며 장면을 전환했다. 천장에 극장 구조물을 그대로 드러내며 이것은 연극이라는 점을 강조함과 동시에 통제하고 억제하는 극의 설정을 보여주었다.
2023년 프로덕션 희곡집에는 특이하게도 등장인물 소개에 인물의 나이와 키, 몸무게까지 쓰여 있다. 루시 프레블은 희곡집에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으며 국적, 신체적 특징 또는 자원 봉사자들이 서로를 위해 수행하는 '트릭'에 관해서는 출연자가 자유롭게 텍스트를 구성할 수 있다.'라고 명시했다. 이 프로덕션에서는 흑인 배우들로 구성함에 따라 로나가 정신 건강과 세상 속에서 흑인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수정됐다.
나는 2023년 8월 30일 공연을 관람했다. 내셔널 시어터에 대한 신뢰, 연출가 제이미 로이드에 대한 관심과 감각적인 포스터에 이끌려 예매했던 것 같다. 제이미 로이드 특유의 미니멀하고도 감각적인 연출, 시선을 압도하는 무대 디자인, 감정을 섬세하면서도 힘 있게 전달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희곡의 구조를 더욱 생생하게 부각했다. 그때는 제이미 로이드가 이렇게 더 유명해질지 몰랐다. 2019년 런던에 출장을 갔을 때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공연 중이었는데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아 패스했었다. '디 이펙트'는 옆자리 관객이 계속 하품을 하는 바람에 집중이 깨졌고 나까지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 영향으로 올리비에상을 휩쓴 2023년 뮤지컬 '선셋대로(Sunset Boulervard)'를 놓친 것은 두고두고 한스러운 일이다.)
작품은 2024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배로우 스트리트 극장을 거쳐 더 셰드(The Shed) 극장에서 다시 무대에 올랐다. 더 셰드에서의 공연도 런던 프로덕션에서처럼 런웨이처럼 구성된 무대, 강렬한 조명과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음향, 감각적 연출로 주목을 받았다.
이제 '디 이펙트'는 한국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2025년 6월 10일부터 8월 31일까지 인터파크 서경스퀘어 스콘 2관에서 공연 중이다. (주)레드앤블루가 주최하고, 민새롬 연출이 직접 번역과 연출을 맡았다. 박지선 작가가 윤색을, 음악은 이진욱 감독이 담당했다.
민새롬 연출은 최근 크리에이티브 석영 연극 '젤리피쉬'에서 다운 증후군 배우와 함께 작업하며 장애에 대한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다. 공연을 보는 내내 민새롬 연출이 아니면 누가 이 작품을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객석 한편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다, 쉬는 시간에는 주인공 지윤이의 손을 잡고 객석을 돌아다니며 설명해 주는 모습에 다시 한번 그의 진가를 확인했다.
늘 깊이와 진심을 잃지 않는 그는 작품을 만들 때는 물론이고, 극단에서, 학생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언제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집요하리만큼 묻고 또 묻는 태도, 감정과 개념을 하나씩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은 그의 연출이 가지는 "밀도"를 만들어낸다. 개인적으로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나의 인생 작품 중 하나로 꼽는다. 한 사람의 생명을 둘러싼 윤리와 감정의 소용돌이를 배우 한 명이 무대에서 펼쳐 보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엮어낸 작품이다. '디 이펙트' 또한 감정과 과학, 사랑과 정체성을 두고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에 민새롬 연출이 어떤 어려운 길을 선택했을지, 궁금해진다.
한국 프로덕션은 4명 역할에 12명의 출연진과 함께 세 조합의 공연을 선보이며 과학과 감정, 사랑과 자유의지라는 묵직한 질문을 한국 관객 앞에 던지고 있다. 2012년 런던에서 새 희곡에 대한 기대 속에 등장했던 이 작품이, 2025년 서울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감과 논쟁을 이끌어낼지 궁금해진다.
‘젠더 벤딩(Gender Bending)’ 캐스팅이란 설정된 등장인물의 성별과 다른 성별의 배우를 기용하는 연출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성별 교체를 넘어, 젠더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을 비트는 장치로 기능하며 인물의 내면과 관계를 새롭게 드러내는 해석의 여지를 넓힌다. 최근에는 성소수자나 퀴어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와 맞물려, 무대에서 젠더 벤딩은 하나의 창조적 선택으로 주목받고 있다.
여기서 ‘벤딩(Bending)’이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다. ‘Change’나 ‘Switch’처럼 단순히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틀을 ‘구부리고 비트는’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성별이라는 경계가 고정돼 있지 않으며, 충분히 유동적이고 해석 가능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용어는 1980년대 성소수자 문화에서 시작되어, 사회적 규범을 흔드는 문화적 상상력을 표현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연극의 묘미는 하나의 텍스트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데 있다. 같은 대사라도 누가 말하느냐, 어떤 무대에서 펼쳐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울림을 만들어낸다. 최근 공연들이 젠더 밴딩 캐스팅이나 구조적인 재해석을 통해 동시대의 정서를 반영하려는 시도를 이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극 '디 이펙트'가 흥미로운 이유 역시 바로 그것이다. 작품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사랑과 정신, 과학을 둘러싼 본질적인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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