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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극장, 살아 있는 연출

브리지 극장 Bridge Theatre

by 정재은

런던 타워브리지에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몇 분 걸으면, 템즈강을 마주한 강변에 유려한 유리 외관의 건물이 숨어 있다. 약간 낮게 위치한 탓에 커다란 빨간 글씨의 간판을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 2017년 10월 개관한 브리지 극장(Bridge Theatre)은 런던 시내에서 80년 만에 새롭게 선보인 대형극장이다. 개관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극장이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예술적 야심과 시도는 런던의 극장 지도에 새로운 물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리지 극장은 국공립이 아닌 민간 자본으로 설립된 극장이지만, 작품의 선별 기준이나 제작방식은 국립극장 못지않은 공공성을 띤다. 이 극장은 단순히 흥행성에 의존하기보다, 동시대 관객이 마주해야 할 질문과 이야기, 혹은 고전의 재발견을 극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집중한다. Hytner와 Starr는 여전히 '관객이 믿고 따라올 수 있는 극장'이라는 국립극장의 이상을, 민간의 힘으로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브리지 극장은 런던 중심부에서 남동쪽으로, 사우스 뱅크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지닌 타워브리지 남단에 위치해 있다. 과거 산업지대였던 이 지역은 지난 20여 년간의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주거, 사무, 문화가 어우러지는 복합지구로 탈바꿈했고, 브리지 극장은 이 변화를 상징하는 문화적 이정표 중 하나다. 런던 시민은 물론, 관광객과 도시 개발 관계자에게도 이 극장은 ‘강 너머 문화의 부활’을 보여주는 현장이 되었다. 브리지 극장에서는 공연 중 쉬는 시간에 극장 밖으로 나가는 관객들이 많다. 타워브리지가 비스듬히 보이는 강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돌아오는 것이다.


브리지 극장 로비에 있는 닉 스타(왼쪽)와 니콜라스 하이트너 Photo by Craig Sugden 출처: 극장 페이스북

극장의 기둥, 니콜라스 하이트너

브리지 극장은 영국 공연 예술계에서 탁월한 경력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 설립했다. 설립자는 니콜라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닉 스타(Nick Starr). 니콜라스 하이트너는 2003년부터 2015년까지 영국 내셔널 시어터 예술감독으로 일하며 런던 공연계의 황금기를 만든 인물이다. 그는 셰익스피어부터 현대극까지 폭넓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특히 '워 호스 War Horse', '히스토리 보이즈 The History Boys' 같은 작품으로 세계적 찬사를 받았다. 닉 스타는 전략가이자 기획자이면서, 내셔널 시어터를 움직이는 조직의 핵심이었던 인물이다. 이들은 국립극장에서 물러난 후, 민간 독립 제작사 런던 시어터 컴퍼니를 설립했고, 그 첫 결실로 브리지 극장을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가변형 무대와 900석 규모

브리지 극장은 약 900석 규모의 중대형 극장이다. 무엇보다도 이 극장의 특장점은 유연한 무대 구조다.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뿐 아니라, 공연에 따라 무대와 객석의 구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가변형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뮤지컬을 몰입형 형식으로 선보이며, 관객의 감각과 위치마저 서사 속 일부로 편입시키는 혁신적 무대 연출로 주목받아 왔다. 또한, 내부 인프라와 관객 편의 시설 역시 현대적으로 설계돼, 기존 극장의 경직된 인상을 탈피하고 보다 열린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능한다. 최근에 지어진 극장인만큼 장애인 접근성에도 신경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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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 동시대가 만나는 극장

브리지 극장은 개관 이래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드는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그중에서도 다음의 네 작품은 이 극장의 정체성과 예술적 실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2019)

C. S. 루이스의 고전을 가족극으로 무대화한 이 작품은 상상력 넘치는 무대 연출과 서정적인 분위기로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벽장문을 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이 공연은 브리지 극장의 무대 전환 능력과 시각적 창의성을 증명한 대표작이다. 나는 이 작품으로 처음 브리지 극장에 갔었고, 이 극장을 프로시니엄 극장으로 오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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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찾다가 이 때부터 이미 행잉을 활용한 연출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지 출처: 극장 홈페이지


아가씨와 건달들 Guys & Dolls (2023–2025)
고전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몰입형 무대 형식으로 완전히 재해석한 작품. 관객은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배우들과 함께 뉴욕 뒷골목을 거니는 듯한 경험을 했다. 이 실험은 비평가들과 관객 모두에게 큰 호응을 받았고, 브리지 극장의 기술적 역량과 제작적 대담함을 입증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탠딩석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공연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몰입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2024년 올리비에상 여러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고 안무상을 수상했다. 2023년 3월 3일부터 시작한 공연은 올리비에상 이후 공연 기간을 연장해 2025년 1월 4일까지 22개월, 거의 2년 간 공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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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Richard II (2025)

'리처드 2세'는 왕권, 정체성, 몰락을 다루며, 현대적 감각의 미장센과 깊은 심리 묘사로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수를 새롭게 조명했다. 뮤지컬 영화 '위키드'에서 인기를 얻은 조나단 베일리가 리처드 2세로 무대에 출연해 많은 관객을 모았다. 정치와 예술, 권력과 무력 사이의 균열을 섬세하게 짚어내면서, 현대적으로 옮긴 연출이 인상 깊었다. 이 역시 니콜라스 하이트너가 연출했다.


내가 구매했던 좌석은 입구에서부터 좌석을 찾아가기까지가 상당히 험난했다. 계단을 내려가 무대를 지나, 다시 계단을 올라가서 다른 계단으로 내려가서야 겨우 내 좌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등퇴장 출입구 옆이어서 조나단 베일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고, 그가 연기를 썩 잘했던 것도 좋은 인상을 남겼다.


RII-Dr2-203-Jonathan-Bailey-2 (1).jpg 리처드 2세 역의 조나단 베일리. 출처: 극장 홈페이지


한여름 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Dream (2025)

또 다른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을 유쾌하고 파격적으로 재구성한 '한여름 밤의 꿈'은 관객과 배우 사이의 경계를 허문 축제 같은 경험이었다. 현대적인 움직임, 곡예, 그리고 다양한 성 정체성을 반영한 캐스팅으로, 고전의 생명력을 다시 일깨운 공연으로 평가받는다. 2019년 좋은 반응을 얻고 2025년에 다시 공연되고 있다.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요정들의 움직임과, 플로어 공간에서 관객들의 동선까지 고려했을 뿐 아니라 공중까지 치밀하게 계산한 연출은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선 경험이었다.

* 공연 리뷰는 월간 객석 8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공연을 본 뒤 자료를 찾아보다가, ‘한여름 밤의 꿈’ 연출가가 ‘아가씨와 건달들’과 ‘리처드 2세’를 연출한 인물이자, 바로 이 극장의 설립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제야 무대와 객석, 공중과 바닥까지 극장 전체를 무한히 확장시키는 연출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 공간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가장 대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알고 나니 모든 연출의 결이 달리 보였고, 그 정교한 공간 활용이 더 큰 감탄으로 다가왔다.


하이트너는 브리지 극장에 이어 기술과 예술, 몰입형 체험을 결합한 라이트룸 Lightroom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 공간은 아티스트 기반의 대규모 몰입형 전시를 통해 런던 예술계의 혁신적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 멋진 공간에서 연극이나 뮤지컬을 볼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있다.


라이트룸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모습. 출처: 극장 홈페이지


브리지 극장은 하나의 철학이 건물과 무대로, 작품으로 구체화된 사례다. 니콜라스 하이트너라는 이름은 단지 ‘연출가’가 아니라, 한 시대 공연 예술의 흐름을 설계한 ‘장인’에 가깝다. 그는 국립극장을 거쳐 민간극장으로 고전에서 뮤지컬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한 사람의 예술이 시스템이 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브리지 극장은 그래서 ‘극장’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한다. 공연은 매일 밤 사라지지만, 이 공간에는 그 철학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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