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러스 웰스 극장 Sadler’s Wells
영국에서 가장 자주 찾았던 극장은 내셔널 시어터였다. 시즌마다 바뀌는 매력적인 포스터와 믿고 볼 수 있는 프로그램 덕분에 몇 번이고 발길이 향했다. 그다음은 연극, 뮤지컬, 클래식 콘서트를 아우르는 바비칸 센터.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세 번째가 바로 새들러스 웰스(Sadler’s Wells)다.
영국에 온 이듬해, 이 극장을 유난히 자주 찾았다. 영어로 된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며 좌절할 때면, 말 대신 몸으로 이야기하는 무용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낯선 언어보다 더 깊이 다가오는 것은, '나와 다른 몸'들이 무대에서 뿜어내는 생의 에너지였다.
웨스트엔드의 오래된 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관성으로 새들러스 웰스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놀란 건 관객 분위기였다. 더 화려하게, 더 당당하게 자신을 꾸미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 있는 자세 하나, 옷의 질감 하나에서도 다른 아우라가 느껴졌다.
내가 몸담았던 극장 역시 연극과 무용을 함께 올리는 곳이었기에 무용 전용 극장이라는 공간이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언어에 지쳤을 때, 몸이 전하는 메시지는 더 진하게 와닿았다. 그 감정을 새들러스 웰스는 스스로 이렇게 표현한다.
“모든 각도에서 춤을 즐겨보세요.
새들러스 웰스는 춤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Get dance from every angle.
At Sadler’s Wells we believe in dance to move the world."
이 극장을 자주 찾은 이유 중 하나는 무용이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무용은 체력 소모가 큰 장르인 데다, 국제 무용단은 대개 도시를 순회하는 투어 일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한 극장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 여기에 무용 관객층이 비교적 제한적인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이는 '팬이 적다'기보다는, 공연이 보다 집중적이고 일회성에 가까운 방식으로 경험된다. 새들러스처럼 충성도 높은 팬층을 확보한 극장은 짧은 상연 기간 동안에도 객석을 가득 채우며, 공연이 ‘사라지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지금은 런던의 엔젤(Angel) 지역으로 불리는 클럭큰웰(Clerkenwell) 일대는, 중세에는 수도사들이 머물며 우물을 관리하던 곳으로, 지하수가 풍부해 일찍이 '샘(well)의 땅'으로 알려졌다. 17세기 런던에는 광천수가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과 함께 우물 주변에 오락 공간을 더한 복합 문화가 유행했고, 이 지역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1683년, 인쇄업자 리처드 새들러(Richard Sadler)는 이 일대에서 치유 효능이 있는 광천수를 발견하고, 그 옆에 음악당을 열었다. 음악과 치유를 결합한 이 공간은 곧 ‘새들러의 우물(Sadler’s Wells)’로 불리며 시민들의 사교와 휴식을 책임지는 명소가 되었다. 이후 이 극장은 시대에 따라 스파, 서커스 공연장, 멜로드라마 극장, 셰익스피어 무대 등으로 변모하며 수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
새들러스 웰스의 결정적 전환점은 1925년, 릴리언 베일리스(Lilian Baylis)가 이 낡은 극장을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이곳을 오페라, 드라마, 무용이 공존하는 공공극장으로 재편했고, 그 과정에서 훗날 영국 로열 발레단과 국립 오페라단이 태동했다. '춤의 집(Home of Dance)'이라는 새들러스 웰스의 정체성도 이 시기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에 완공된 현대식 공연장으로, 세계 유수의 무용단이 찾는 국제무대가 되었다. 극장 1층 한쪽 복도 끝에는 지금도 17세기 우물 터가 남아 있어, 이 공간이 물과 예술이 만났던 장소임을 증언한다.
‘오페라하우스’나 ‘레퍼토리 극장’은 익숙한 개념이지만, ‘댄스 하우스(Dance House)’는 여전히 낯설다. 새들러스 웰스는 이 개념을 현실로 구현한 대표적인 무용 전용 극장이다. 플라멩코, 힙합, 현대 무용, 클래식 발레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세계 각국의 무용 공연이 이곳 무대를 거쳐간다. 신작 창작과 초청, 국제 공동 제작까지 아우르는 이 극장의 프로그램은 매 시즌 숨 가쁘게 돌아가며, 수많은 세계 초연이 바로 이곳에서 이뤄진다.
이 혁신의 중심에는 2004년부터 예술감독을 맡아온 알리스테어 스폴딩(Alistair Spalding)이 있다. 그는 새들러스를 단순한 공연장이 아닌, 창작자들이 머무는 ‘집’으로 만들고자 했다. 매튜 본, 아크람 칸,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발레보이즈 등 세계적인 안무가들과의 꾸준한 협업은 이 극장의 위상을 더욱 견고히 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무용 공연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 간다. 새들러스는 말보다 강한 ‘몸의 언어’를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춤의 본거지다.
한국의 공공극장들은 극장장이 3년 임기로 교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장기적인 예술 비전을 세우기보다, 단기 성과에 집중하거나 하려던 기획이 중간에 무산되는 일이 잦다. 한편 영국의 극장들은 예술감독이나 극장장이 10년 이상 자리를 지키는 경우가 많아, 한 방향으로 꾸준히 축적된 기획력과 창작 생태계를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든다. 새들러스 역시 극장 이사회로부터 임명받아 2004년부터 예술감독을 맡아온 알리스테어 스폴딩의 리더십 아래, 20년 넘게 ‘춤을 위한 극장’이라는 정체성을 깊이 있게 구축해 왔다. 긴 호흡의 운영이 가능할 때, 극장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닌 예술이 살아 숨 쉬는 터전이 될 수 있다.
새들러스 웰스는 한 사람의 경력이 오롯이 쌓여 완성된 작품 같다. 알리스테어 스폴딩은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무용·퍼포먼스 부문 책임자를 맡았고, 2000년 새들러스 웰스에 프로그래밍 디렉터로 합류한 뒤 2004년부터는 예술감독 겸 최고경영자를 맡아 지금까지 극장을 이끌고 있다.
오랜 시간 예술 행정과 기획을 동시에 수행해 온 스폴딩은 2022년 영국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을 비롯해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명예박사, 평생공로상 등 무수한 수훈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새들러스 웰스는 단순한 무용 공연장이 아니라, 예술가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집'이자, 한 사람의 철학과 신념이 뿌리내린 ‘세계 무용의 심장부’라 할 만하다.
그의 리더십 아래, 새들러스는 전 세계 무용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선도 극장이 됐다. 런던에 세 개의 극장과 자체 디지털 플랫폼, 그리고 전 세계를 순회하는 공동 제작작들을 보유한 이 극장은 탄츠테아터 부퍼탈 피나 바우쉬, 알빈 에일리, 클라우드 게이트, 로자스 같은 세계적 무용단을 정기적으로 초청하고, 크리스털 파이트,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윌리엄 포사이드 등 당대 최고의 안무가들과 신작을 제작해 왔다.
2024년에는 새들러스가 2012년부터 구상해 온 새로운 공간 ‘새들러스 웰스 이스트(Sadler’s Wells East)’가 스트랫퍼드의 올림픽 파크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힙합 시어터 아카데미, 안무가 학교, 무용 스튜디오 등이 함께 들어서며, 다음 세대 무용가들을 위한 본거지가 되고 있다.
새들러스는 단지 무대를 올리는 극장을 넘어, 춤이라는 예술을 둘러싼 전 생태계를 포괄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해 왔다. 무용 전용으로 설계된 극장 공간, 젊은 세대를 위한 10파운드 티켓 제도, 신작 개발과 커뮤니티 활동을 위한 전용 스튜디오, 그리고 장애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가 접근 가능한 환경까지,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새들러스는 오늘날 ‘누구나 춤을 경험할 수 있는 집’이자, 무용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살아 있는 예술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새들러스는 관객의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국의 금융기관 바클레이스(Barclays)와 협력해, 16세부터 30세까지 누구나 ‘바클레이스 댄스 패스(Barclays Dance Pass)’를 통해 전 공연을 단 10파운드에 관람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 엔젤 본관, 스트란드의 피콕 극장, 새로 개관한 스트랫퍼드의 새들러스 웰스 이스트까지, 젊은 세대가 더 가까이에서 무용을 만날 수 있도록 극장 문은 활짝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