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작 Sep 03. 2022

마흔의 마음

[책] 마음이 흔들려서, 마흔인 걸 알았다 | 김선호 지음 | 서사원

언젠가 소셜 네트워킹 회사들의 정교한 알고리즘에 대한 글을 접한 적이 있다. 내 눈동자가 머문 짧은 시간까지 계산한다는 그들의 치밀한 전략은 어느 날 나에게 책 광고 하나를 보여주었다. 한 여자가 아이 셋과 소파에 앉아 있는 흑백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흔 엄마가 아들에게 한 고백
“이제 너희들은 다 키웠으니까 이제 내가 좀 커야겠다.”


그 사진과 카피를 보고 홀리듯 [마음이 흔들려서, 마흔인 걸 알았다]를 주문했다. 비록 그것은 알고리즘에 의한, 정확한 타깃에 대한 상업적 노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려서, 마흔인 걸 알았던' 내가, 지금 이 책을 만난 것은 '인연'이라는 생각을 했다. 길에서 지인을 마주치는 것을 신기해하듯, 이 책을 만난 것을 반갑고 신기한 마음으로 읽어 나갔다. 



그동안 꾸역꾸역 시험 성적을 위한 영어 공부를 하느라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미뤄뒀었다. 최대한 영어로 된 텍스트를 읽으려 노력했지만 속도는 너무나 느렸고, 결국에는 번역기를 돌려야 제대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모국어로 책을 읽으니 어찌나 술술 잘 읽히고 의미가 가슴 깊숙이 다가왔던지! 때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가도 고개가 끄덕여지며,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글로 읽을 수 있어 시원했다. 


제임스 홀리스는 저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에서 마흔 즈음이 된 이들을 설명하며 '중간항로 middle passage'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맡아온 역할들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p.34-35)


올해 3월, 나는 20년 가까이 이어왔던 출퇴근을 멈췄다. 길고도 묵직한 회사 이름과, 오랜 시간을 쌓아 올려 얻은 직함을 빼고 나면 나는 무엇일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도 아닌 내가 되는 것이 두려워 그 끈을 놓지 못했다. 그래서 퇴사가 아닌 휴직을 택했음에도, 몇 달을 끙끙 앓았다. 처음에는 카톡이 예전만큼 울리지 않는 것이, 메일함이 여유 있는 것이 허전했다. 나를 찾는 사람도 없었고, 지금까지 내가 아등바등 해왔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허무함이 밀려왔다. 휴직 이후 나는 누구인지 계속 생각하게 됐다. 

책에서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중간항로는 나를 뒤덮고 있는 나의 무수한 이름들을 지워나가는 시간"이라며 고독할수록 잘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직장을 다니든, 다니지 않든 이 시기 어머니는 심리적, 신체적 한계치를 넘어선 상태입니다. 제게는 모나미 볼펜 스프링이 죽 늘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잠을 자고 또 자도 한번 늘어난 스프링 같은 몸은 제자리로 잘 돌아오지 않습니다. (p.42)


저자는 아이가 달라져 보인다는 엄마에게, '엄마의 인내심과 의지력 그리고 체력이 지난 10년간 다 소모됐다고, 지칠 만하다고, 지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나에게 '쉼'을 선사하라고 조언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노력이 아니라 멈추는 거라고. 

쉬어도 된다는 작가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사회생활의 긴장을 놓아버린 탓이었는지, 휴직 이후 나는 코로나로 시작해 정형외과와 이비인후과, 안과와 한의원을 오가며 온갖 통증들과 싸웠다. 출산 이후로 없는 힘을 끌어다 쓰느라 뒤틀린 몸으로 내게 버거운 일들도 해내야 했던 순간들. 일도 육아도 살림도 잘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마음이 책을 읽으며 어루만져지는 듯했다. 이 책 속의 말들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문장 그대로 오롯이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책을 읽다 말고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친구들에게도 이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어 책을 한 권 더 구입해 선물할 생각이다.




책에서 나에게 가장 묵직하게 다가왔던 부분은 상실감을 채우려 애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있는 결핍을, 나는 채워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결핍으로부터 왔을 상실감과 외로움을 무엇으로든 메꿔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그저 이 부분이 비어 있구나 하고 인정하고 채우려 애쓰지 말라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조언이 마음에 남았다.


진정한 홀로서기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애써 이루려 하기보다 결핍된 상황을 인지하고,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을 채우려 애쓰는 것을 멈출 때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걸어가는 어른이 됩니다.
마흔이라는 시기는 상실감을 채우려 애쓰는 걸 멈추기 딱 좋은 시기입니다. (p.136)
작가의 이전글 너와의 첫뮤지컬 관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