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전통연희 연주자로 활동하며 현장 기반 경험을 쌓아온 이강산입니다. 2024년부터 런던 시티 대학에서 문화 정책 및 경영(Culture Policy and Management) 석사과정을 마쳤고 다양한 공연 현장에서 연주자, 행정가, 스태프로 여러 역할을 경험하며 현장에서 쌓은 감각을 바탕으로 사람과 예술을 연결하는 일을 더 넓혀가고 있어요.
저는 '성실함'을 제 강점으로 생각하는데요, 실기를 배울 때도 남들보다 흡수가 느린 편이었지만, 꾸준히 반복하고 끝까지 붙잡는 힘이 있었어요. 런던에 와서 영어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엔 한 문장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만, 매일매일 성실하게 공부하며 조금씩 목표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성실함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경험과 이론적 기반이 생긴 것 같아요. 공연 현장에서 여러 역할을 경험했고, 공부를 통해 이론적 이해도 함께 갖추게 됐습니다. 여러 역할을 경험하며 얻은 시각과 성실함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을 만들어 주었다고 느낍니다.
저는 2024년 4월 처음 영국에 왔습니다. 대학원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실기 중심의 공부보다는 문화예술경영이라는 분야에 더 끌리기 시작했어요. 연주자로 활동하면서도 무대 위보다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에 관심이 점점 더 커졌고, 공연을 볼 때도 예전에는 “와, 저거 어떻게 했지? 나도 해보고 싶다”라는 실기 중심의 생각을 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이 작품을 해외에 소개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더 많은 관객이 보게 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나라면 이 공연을 어떤 방식으로 기획해 볼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사고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 변화가 저에게 “다른 방향의 공부를 해보고 싶다”라는 확신을 준 계기였습니다.
여러 나라의 대학원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영국의 1년제 석사가 시간적,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었고, 무엇보다 현장에서 빠르게 경험을 쌓을 기회가 많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국 대학원에도 합격했지만, 언젠가 꼭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미국·프랑스·독일 등 다양한 선택지를 고민해 보았지만, 독일은 실기 중심 전공의 특성 때문에 진학이 쉽지 않았고 미국은 예술경영이 ‘비즈니스’에 더 중심을 두고 있어서 제가 원하는 방향과 조금 달랐습니다. 여러 고민 끝에, 전공과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곳이 영국, 그중에서도 런던이었습니다.
영국에 와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입니다. 세계 문화정책과 유럽의 예술 생태계를 공부하면서 ‘문화가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나는 너무 한국이라는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한국음악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의 문화에는 관심을 덜 두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예전엔 한국 전통예술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나라의 문화와 맥락을 접하면서
오히려 한국문화도 더 넓은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작은 틀 안에서만 해석하던 세계가
훨씬 확장된 느낌이었습니다.
또 동기들과 함께 Festival YOUth라는 독립영화제를 기획했는데, 서로 언어도, 배경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작품을 두고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아, 문화는 이렇게 사람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힘이 있구나”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 오고 나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는 시차 없이 축구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데, 오랫동안 TV로만 보던 팀을 실제 경기장에서 마주했을 때의 그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더라고요. 관중석에서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골이 터졌을 때 경기장 전체가 흔들릴 만큼 환호가 울려 퍼지는데 “아, 내가 정말 영국에 있구나”라는 실감이 들었어요.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생활 방식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날씨가 좋으면 공원에 나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휴대폰보다 사람과의 대화를 우선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도 일과 삶을 조금 더 분리해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의 여유롭고 균형 잡힌 생활 방식은 저에게 큰 자극이 되었어요.
런던에서는 뮤지컬·연극·오페라 같은 공연들이 일상의 연장선처럼 가까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특별한 날’에 시간이 맞아야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을, 여기서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아가 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떤 공연은 하루 전에 예매해도 되고, 또 어떤 작품은 런던에만 있는 오리지널 프로덕션이라 “지금 이 시간,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예술”을 보고 있다는 감각이 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며, “영국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제 인생 공연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입니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서 ‘발레라는 장르에 대한 관점 자체가 뒤집히는 경험’이었어요. 기존 발레가 갖고 있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남성 무용수로 구성된 백조 군무·동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움직임·극적 긴장감을 만드는 조명과 무대 전환 등 모든 요소가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재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통연희를 전공했던 제게는, 익숙한 형식을 다른 언어로 재해석한 이 방식이 특히 크게 다가왔어요.
마지막 장면에 가까워질수록 감정의 밀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데, 그 서사적 긴장과 신체 표현의 조합이 너무 치밀하고 강렬해서 무용수들의 호흡 하나까지도 제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공연이 끝나기 직전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더라고요. 저는 이 작품을 보며 “예술은 기존의 문법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니구나. 새로운 시도와 재해석이 한 장르를 이렇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구나.” 하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순간이 제 인생 공연이 된 이유입니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이에요. 처음 입장할 때부터 고전 건축의 웅장함과 공간에서 흐르는 공기가 “지금부터 뭔가 특별한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구나”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단순히 공연을 보는 장소를 넘어, ‘예술이 어떻게 공간을 통해 완성되는가’를 체감하게 해주는 건물이에요. 내부의 구조나 객석의 배치, 무대와의 거리감, 음향의 울림이 모두 조화롭게 설계되어 있어서, 그 안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연의 무게감이 온전히 전달됩니다. 특히 발레나 오페라처럼 시각적·음향적 요소가 중요한 작품일수록 이 공연장이 가진 힘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더라고요. 공연을 보러 간다는 느낌보다, 하나의 거대한 예술 공간 속에 ‘초대받은’ 기분이 드는 곳, 그래서 런던을 찾는 분이라면 꼭 한 번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영국에서의 삶을 꿈꾸는 분들이 계시다면 “일단 도전해 보라”라고 말하고 싶어요. 유학 1~2년은 길게 보이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충분히 투자할 만한 시간이더라고요. 그 시간 동안 얻게 되는 경험과 성장은 숫자로 환산하기 어렵습니다.
여행으로 잠깐 머물 때는 그 나라의 가장 예쁜 순간이나 밝은 단면만 보게 되지만, 직접 살아보면 그 사회가 가진 다양한 모습과 결을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문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지, 뉴스나 SNS에서는 알 수 없는 ‘삶의 속도와 분위기’를 체감하게 되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 역시 한국음악 전공이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보던 세계가, 여기에서 공부하고 살아보니 훨씬 입체적이고 넓은 모습으로 다가왔어요. “아, 내가 생각보다 작은 세계 안에 있었구나”를 깨닫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두려움이 앞설 수도 있어요. 지금 가진 안정감이 사라질까 걱정될 수도 있고요. 하지만 막상 와보면, 낯선 환경 속에서 부딪히고 배우며 ‘내가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완벽한 준비는 끝내 오지 않아요. 저도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뛰어들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기회가 보인다면 너무 오래 망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살아보면, 여행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더 넓은 시각과 성장의 계기가 반드시 생깁니다.
요즘 저는 논문을 마무리한 뒤 구직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직 영국에서의 현장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이력서를 쓸 때 막막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만큼 더 배울 여지도 크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런던에서 활동하는 단체 Kollab의 일원으로 매달 열리는 행사 기획, 프로덕션, 일정 관리 등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프로젝트를 운영해 보는 경험을 통해, 영국 예술 현장이 움직이는 방식과 분위기를 조금씩 체득해 나가는 중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은 ‘나를 다시 찾아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목표했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나니, “이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예술과 사회를 이어가고 싶은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며 방향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조급함보단, 지금은 내 안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 영국에 올 때만 해도 저는 한국의 전통음악과 예술을 해외에 소개하는 아티스트 에이전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정책 영역에도 흥미가 생겼고, 기획·에이전시·정책 등 여러 분야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더 뚜렷하게 느끼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하나의 길을 단정 짓기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탐색하는 단계입니다.
요즘 문화산업은 장르와 역할이 다양해지고 경계가 흐려지고 있어서, 단 하나의 직업만으로 나를 규정하기보다 공연도 하고 기획도 하고, 또 다른 콘텐츠에도 참여하는 ‘다층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먼 미래를 바라보면, 저는 복합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작업하고, 관객이 자연스럽게 머물며 소통할 수 있는 공간, 예술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플랫폼을 만드는 일이, 제가 언젠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입니다.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 시야를 넓히고 싶고, 문화공간 운영자, 기획자, 예술가, 프로젝트 매니저 등 예술 현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분들과 연결되면 제가 꿈꾸는 길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처럼 특별한 배경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낯선 나라에서 배우고 일하며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두려움보다 ‘가능성’을 선택하셨으면 좋겠어요. 해외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계신 모든 분들을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건강하시고 바라시는 길이 모두 열리기를, 런던에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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