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생동감 있는 동기부여와 존재적 움직임으로 함께 춤추는 안무가로 저를 소개하곤 합니다. 활동명은 석도사이고, 영국에 오기 전에는 제가 사는 동네에서 마을극장을 운영했습니다. 대학 졸업 전후부터 예술교육 분야에서 활동해 왔고, 지난 십여 년 동안은 커뮤니티 댄스 리더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상상력을 구현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는 작품으로 축제와 시민을 연결하고, 무대의 경계를 허무는 프로젝트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은 ‘기회를 만드는 능력’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이에요. 그래서 누구나 무대에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배움의 장을 기획하며, 예술가와 마을을 이어주는 역할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예술가들과 새로운 시도를 함께하며 그들의 활동이 확장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써 왔습니다.
영국에는 이번 여름의 끝자락인 8월 25일에 도착해, 이제 막 3개월 정도 지났어요. 사실 이곳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3년 전, 런던에 머물고 있는 동생 부부를 만나러 여행을 왔을 때였어요. 그때 런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학업 환경과 공연예술 분야의 풍부한 자원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런 관심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큰 아이가 먼저 유학을 시작했고, 저는 아이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을까 해서 단기 워크숍이나 자격 과정을 중심으로 여러 선택지를 알아보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제 전공과 딱 맞는 석사 과정을 알게 되었고, 제가 찾고 있던 방향과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커리큘럼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본격적으로 준비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지금 이곳까지 오게 되었네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상황과 그에 부합한 지원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접근방식과 공유하는 과정들을 만날 때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특히 자녀교육 부분에서 경쟁보다는 협력을 강조하는 교육철학과 평가 시스템에 만족합니다.
저는 더 플레이스 런던 컨템퍼러리 댄스 스쿨(The Place London Contemporary Dance School)에서 무용 석사과정(MA Dance: Participation, Communities, Activism)을 밟고 있어요. 줄여서 ‘PCA’라고 부르는 이 과정은, 제가 추는 춤을 기반으로 오늘의 사회적‧문화적 긴급성을 다루는 사회참여적 무용 활동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공연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참여를 이끌고,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지, 그리고 무용을 통해 어떤 메시지와 행동을 촉발할 수 있을지 매일 고민하며 배우고 있어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커뮤니티와 함께 춤추는 경험도 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뇌졸중 환자 커뮤니티, 이민자 그룹, 성소수자 커뮤니티 등과 함께 창작하고 움직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무용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아직 시도되지 않은 분야라 저에게는 경험의 폭이 크게 확장되는 시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론적 기반도 넓혀가느라 요즘은 다소 ‘용량 초과’ 느낌이지만 최대한 흡수하고 소화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런던은 여러 커뮤니티가 공존하는 도시인만큼,
이런 활동을 실험해 보기에도
최적의 환경이라고 느껴요.
커뮤니티 기반 작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뛰어난 실험의 장이 될 것 같아요.
참고로 제가 다니는 석사 과정은 대부분 온라인 기반이고, 4주간 집중 레지던시만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형태라 학생비자가 필요하지 않아 현재는 여행 비자로 머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런던의 극장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은 더 플레이스(The Place)입니다. 이곳은 지역과 예술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기관으로, 런던 컨템퍼러리 댄스 스쿨을 함께 운영하며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커뮤니티를 위한 춤의 장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어요. 더 플레이스는 'Dance for Life'라는 슬로건에 맞게, 말 그대로 삶의 모든 단계에서 춤이 스며들 수 있도록 폭넓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공연장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무용 전공자뿐 아니라 국제 학생들에게도 배움과 실험의 기회를 열어주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언제나 놀랍습니다. 하나의 공간이 이렇게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이 왜 특별한지 충분히 느껴지실 거예요.
예전에는 벨기에의 현대무용단 울티마 베즈(Ultima Vez) 작품들에 푹 빠져 있었어요. 이 단체는 몸을 강렬하게 쓰는 에너지 넘치는 스타일로 유명한데, 어린 시절의 저에게는 그 폭발적인 움직임이 정말 큰 자극이 되었죠. 최근에는 호주의 스테파니 레이크 컴퍼니(Stephanie Lake Company)가 보여주는, 여러 무용수의 움직임이 파도처럼 이어지고 겹쳐지는 ‘군중적 안무’에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제 창작의 가장 큰 토대가 된 건 역시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작품들이에요. 인간 감정과 일상을 무용 안에 깊이 녹여낸 방식이 늘 저에게 결정적인 영감이 되어왔습니다.
영국에서 본 공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년 전 런던 마임 페스티벌에서 쇼디치 극장에서 본 〈The Nature of Forgetting〉이에요. 이 작품은 ‘기억’을 다루는데,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감정과 장면을 몸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었어요. 시어터 RE라는 단체의 작품인데, 우연히 그해 한국에서도 그들의 또 다른 작품 〈Birth〉를 볼 기회가 있었고, 그것도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올해 9월에는 이 단체가 직접 진행하는 피지컬 시어터 워크숍에 참여할 정도로 제게 의미 있는 팀이 되었죠.
예전에 마을극장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어서, 한국에 돌아가면 레지던시가 가능한 숙소와 창작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외국에 있는 동안 다양한 숙소를 경험하고 많은 극장과 창작 공간을 돌아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또 시니어를 위한 작업도 더 확장할 계획입니다. 영국엔 시니어 무용단이 그 어느 나라보다 많고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 이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어요. 석사 과정 중 현장 연계 실습에서는 East London Dance에서 무용 공연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ast London Dance는 런던 동부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대표적인 커뮤니티 무용 단체예요. 여기서 운영하고 있는 시니어 무용 커뮤니티 그룹인 Damn Fine Dance와 시니어 댄스 클래스인 Leap of Faith와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또한 파킨슨 환자를 위한 춤 수업 자격 과정을 올해 이수하고 실습 중이라, 영국 국립발레단(English National Ballet)의 무브 인투 웰빙(Move into Well-being) 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팀은 신체적 어려움이 있거나, 고령으로 인해 움직임이 제한된 사람들을 위해 무용을 통한 건강 회복과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어요.
저는 공간에 관심이 많아요. 지속 가능한 예술은 결국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간 운영에 관심 있는 분들과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또 저는 기억과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머릿속의 이미지를 신체로 구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창작자들과 협업해보고 싶은 마음도 큽니다.
영국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커뮤니티 댄스 같은 형태를 한국에서도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기획자들을 만나는 것도 늘 환영이에요. 서로의 방식과 환경을 나누고, 그 차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볼 수 있는 만남이라면 언제든 열려 있습니다.
영국에 온 뒤 자연스럽게 외식을 덜 하게 되면서, 오히려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제게 아주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어요. 요리를 하다 보면 ‘음식’이라는 것이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문화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힘든 점도 있어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언어적인 장벽이에요. 어느 정도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생활 속에서 영어 듣기는 여전히 쉽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요즘처럼 해가 짧은 겨울 저녁이 찾아오면, 영국과 한국의 시간 차이 때문에 예상치 못한 외로움이 밀려오곤 해요. 제가 익숙했던 시간대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 연결감이 끊어지는 듯한 고립감이 힘들 때가 있죠. 제 딸도 그 점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다 딸도 영국에서 춤을 추고, 저도 뒤늦게 석사를 하면서 영국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때로는 혼자 버텨야 하는 유학생활의 외로움이 이 모든 것의 목적과 행복감을 흐리게 할 때도 있는데요,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분들이 응원과 조언을 보내주시면 힘이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