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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본질을 탐색하는_최혁

by 정재은

안녕하세요! 저는 최혁입니다. 저는 용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과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로 기억, 시간, 그리고 덧없는 감정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중의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인 ‘용’을 통해 우리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기억’의 본질을 탐색합니다. 시간 속에 흩어지고 미화된 기억들이 만들어 내는 감정을 현실이라 믿고 싶은 순간의 환상으로 그려내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인식을, 예술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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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있어서 용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존재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치 무의식 속 깊은 감정처럼 흐릿하면서도 강렬한 존재. 이 역설이 제 예술을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저는 가장 내밀한 감정일수록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서로 다르지만 결국 하나이고, 삶이란 우리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 나만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힘든 삶을 이어가고, 그 궤적이 하늘에 별자리를 그려갑니다. 그 길이 저에게 있어서 용이고, 그 존재를 통해 시간과 기억을 그려나갑니다. 저는 회화, 애니메이션, 미디어 같은 다양한 매체를 사랑합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몽환적인 빛과 조금씩 바래지는 듯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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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별을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내려준다

일을 하다 보면 고민이 많아지고, 힘든 점들이 보일 때 피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계속 제 꿈을 바라보려 합니다. 익숙함과 관성에서 벗어나, 한 발짝이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계속하는' 태도 덕분에 저는 제 회복탄력성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계속 생기고,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늘 다른 변수들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모든 일이 뜻대로 잘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제가 꾸준히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계속 무언가를 바라보고, 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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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술을 시작한 이유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유도 모른 채 ‘용’이라는 존재에 강하게 매료되었고, 나만의 용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미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용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현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아바타,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처럼 CGI와 VFX로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보며 “나도 저런 방식으로 용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 아바타 제작 과정에 본머스 대학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영국에서 공부해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본머스에는 3D 게임과 3D 애니메이션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과정이 있었고, 교수진 또한 현직 VFX 아티스트나 디즈니 출신 애니메이터 등 실무 경험이 풍부한 분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Unity와 Unreal Engine과의 교류도 활발해, 기술과 실습 면에서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런 기술적인 관심 외에도, 저는 오래전부터 yBa(Young British Artists,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 1990년대 영국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젊은 예술가 그룹) 같은 영국의 예술에도 흥미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일상과 사고방식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영국의 문화가 저에게 특히 크게 다가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바라보는 영국의 교육 방식 또한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구상하고 고민하며 천천히 만들어 가는 방식을 좋아하고, 배움이 느린 편이기 때문에 과정 중심의 교육이 더 효과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영국에 처음 온 것은 2017년 학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으니 어느덧 제 영국 생활은 5년 가까이 되어 가네요. 중간에 군 복무 때문에 2~3년 정도 한국에 머물렀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제 관점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잠깐의 공백이었을 뿐인데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게 느껴졌고, 내가 쌓아온 것들이 금방 대체될 수 있다는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지만 기술에는 정답이 있다는 점, 그리고 기술이 강해질수록 작가의 고유한 흔적이 희미해지는 지점에서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나는 변하지 않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은데, 기술만으로는 그게 가능할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그 무렵 책을 좋아하고 서사적 구조와 시간·감정의 흐름을 다루는 일에 관심이 많던 저는, 애니메이션이 내가 찾고 있던 좋은 매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제 이야기를 온전히 만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누군가를 위한 작업이 아니라 ‘나를 위한 예술’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커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영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영화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 독립된 예술로 인정받고 있으며, 실험 애니메이션의 영역이 활발하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결국 제가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CA)의 애니메이션 석사 과정으로 다시 진학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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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과 마주하며 성장한 시간

영국에 와서 처음 느낀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전혀 다르게 작동했고, 그 차이가 저를 많이 흔들었습니다. 효율성을 기준으로 살아온 제게 익숙한 세계가 부정되는 경험은 큰 충격이었고, 마치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을 몸으로 이해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태어나기 위해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저는 저를 이루는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지금의 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차근차근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다름’을 통해 오히려 당연했던 것들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미래를 그려가는 데 중요한 자산을 얻었다고 느낍니다.


특히 상상 속에서만 알던 것들을 실제로 마주할 때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미술관을 무료로 드나들며 좋아하는 작품들을 산책하듯 볼 수 있는 삶은 제게 특별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동안 현실감 없이 꿈처럼 생각했던 것들이 영국에서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며, 제가 그리는 미래가 조금 더 현실 가까이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꿈을 나누고, 미술·예술적 자극을 더 폭넓게 접할 수 있다는 점 또한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제가 부족한 부분을 꾸준히 채워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순간이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결국 모든 순간을 ‘혼자서’ 마주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익숙함이 없는 환경 속에서 생기는 불안과 외로움은 종종 크게 다가왔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곁에 없는 현실이 더 깊은 고독감을 만들 때도 있었습니다. 좋은 기억만큼이나 나쁜 기억도 많이 생겼고, 한국과의 시차와 거리 때문에 감정과 사건을 실시간으로 나누기 어려워 더 외롭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익숙함이 마모된 자리에서 오는 공허함이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제 안의 독립성과 내구성이 크게 성장한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에 온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을 내려놓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선택입니다. 꿈은 아름답지만, 그 주변에는 늘 불편함과 낯섦이 함께합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곳에서 오는 당혹스러움은 결국 변화를 위한 첫 단계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넓은 시야와 새로운 나를 얻게 됩니다. 크고 작은 차이들이 쌓여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고, 때로는 흔들리고 의심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결국 나를 믿어주는 존재와 나 스스로가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잘 돌보며 앞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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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책이 열어준 나만의 세계

영국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라는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전의 저는 주로 미술, 기술, 업계 경험 등 제 관심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람들과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분야 안에서만 머무르며 일종의 편식처럼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왔었죠. 하지만 영국에서 여러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몰랐던 분야를 배우고,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시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들은 제 시야를 넓혀주었고, 덕분에 지금은 되도록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며 스스로를 확장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술은 결국 개인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배우고 더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제 가치관과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작품에도 반영되는 것이 무척 기쁘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최근에는 AA 스쿨의 특강으로 필름 포럼에 참여해, 건축가의 시선에서 영화와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을 접했습니다. 동일한 매체를 다루면서도 전혀 다른 기반과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작품을 해석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익숙한 생각과 충돌하는 지점도 많았지만, 그 낯선 감각들이 제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스스로 탐구하게 되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평생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가는 ‘예술가로서의 삶’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저는 저만의 세계를 현실로 구현하고,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전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제게 용이라는 모티프는 자아의 상징이자 예술적 정체성인데, 언젠가는 미술사 속에서 제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고 싶습니다. 예술 작업은 결국 삶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저는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더 좋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최근에는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AI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AI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AI를 공부하면서 인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사랑하고, 그럼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완벽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다움이 저는 참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그것이 예술과 닮아있기 때문이겠지요. 효율성과 이성이 중심이 되는 미래 사회에서도, 예술은 여전히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중요한 언어가 될 것이라 믿으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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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긴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도 여전히 어디로 가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고민하면서 그저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제 발자취가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의미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감사와 위로가 됩니다. 제가 참 고마워하는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라는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너는 누군가의 꿈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도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앞서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던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이 글이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나 용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넘치는 정보와 이야기들이 있지만, 직접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현실감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공감, 작은 경험 하나가 오히려 더 가볍게, 더 편안하게 첫걸음을 내딛게 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 작은 순간들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시작의 불씨가 되기를 바라며, 진심을 담아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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