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나수연입니다. 예전에는 저를 소개하는 일이 훨씬 쉬웠던 것 같은데, 요즘은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시기를 지나고 있어요. 골드스미스(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서 예술행정 및 문화정책 석사과정(MA Arts Administration and Cultural Policy)을 이수했고, 그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예술과 ‘연결’의 힘을 믿는 사람인 것 같아요. 말로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혼란하고 답을 모르겠는 막막한 순간들 속에서 예술과 연결이 늘 저를 붙잡아준 힘이었어요. 그 힘을 믿기에 계속해서 예술에, 연결에 마음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주어진 일과 관계를 늘 진심으로 대합니다. 진심을 다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운 사람이거든요. 한국에서 일할 때 아티스트, 워크숍 참가자, 관객들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때 진심을 다한 관계들이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 관계는 저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왔어요. 고등학생 참가자가 시간이 흘러 예술대학 후배로 들어오는 모습이 뿌듯하기도 하고, 함께 일했던 아티스트들과는 친구가 되어 서로의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요. 누군가가 이전 현장에서 겪었을 어려움들을 제가 함께 일하는 현장에서만큼은 반복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도 제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진심이 결국 저를 움직이는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2024년 9월, 이민가방과 28인치 캐리어를 끌고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영국에 살고 싶다거나, 런던에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런던에서 이렇게 지내고 있는 제 모습이 스스로도 가끔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영국에 와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나에게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는 거예요.
한국에 있을 때는 해야 할 일도, 신경 쓸 사람도 너무 많아서 늘 멈출 수 없는 러닝머신 위에 있는 기분이었는데, 1년 동안 학생으로 지내면서 처음으로 그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볼 수 있었어요. 막상 내려와 보니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조금 더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저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식습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어요. 한국에서는 자취도 하지 않았고 워낙 배달이 편하다 보니 요리의 ‘요’자도 몰랐는데, 영국의 살인적인 물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 제가 얼마나 건강하지 않은 음식들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는지도 깨닫게 되었고요. 한국에서는 바로 도파민을 주는 음식들만 찾았다면, 여기서는 건강하게 맛있게 만들어 먹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곱창이 너무 먹고 싶은 건 사실입니다.
런던을 좋아하게 되는 순간도 많아요. 좋은 공연이나 전시를 볼 때마다 ‘아, 영국 사람들, 이렇게 좋은 거 자기들만 보고!’ 하는 배 아픈 억울함이 들기도 하고, 공연을 보고 템스강을 걷다 야경을 바라보며 ‘아, 나 지금 진짜 영국에 있네’ 하는 실감이 밀려오기도 해요. 날씨 좋은 날 공원을 걸을 때, 유럽 도시들을 비행기 두 시간 안에 갈 수 있을 때, 파인트 한 잔이 유난히 맛있는 비어가든에 앉아 있을 때… 그 순간순간이 감사하고 짜릿합니다.
물론 힘든 점도 많아요. 해외에서 혼자 지내는 사람이라면 다 공감할 ‘거리’의 문제요. 가족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이 생겨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다가와요. 어머니가 대상포진에 걸리셨을 때도, 걱정할까 봐 다 나은 뒤에야 알려주셨거든요. 그때는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리고 지금은 영국에서의 취업 상황을 생각하며 남을지, 돌아갈지 매일 고민하는 시기이기도 해요. 남고 싶지만 기회가 있을까 불안하고, 한국에 돌아가자니 졸업비자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고… 복잡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런던이 저에게 준 건 확실해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걸
눈앞에서 보게 해 줬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한국이 아니어도 내가 더 ‘나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어딘지 고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하자면, 재정적인 여유가 없다면 이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을 거예요. 환율은 계속 올라가고 있고, 한국 원화를 파운드로 바꿔 쓰는 건 부담이 클 수밖에 없어요. 가능하다면 ‘파운드를 직접 벌 수 있는 구조’를 미리 만들어 두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야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어요.
그리고 11월부터는 해가 오후 3시면 져요. 런던의 겨울밤은 끝없이 길고, 아무리 날씨에 영향을 덜 받는 사람이라도 어느 순간 우울해지기 쉬워요. 그래서 스스로를 괜찮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꼭 필요해요. 그게 ‘사람’ 일 수도 있고, 자신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취미나 작은 루틴일 수도 있어요. 저는 작년에 해가 나지 않던 일주일 동안 디즈니 라푼젤을 반복해서 보며 버틴 경험이 있어요. 그런 사소한 것이라도 감정을 바로 바꿔주는 힘이 정말 크거든요.
또 하나 꼭 전하고 싶은 건,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상태가 무엇인지 미리 알아두는 것이에요. 처음 오면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 귀가 팔리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나와 맞지 않는 걸 억지로 시도하다가 지칠 때가 있어요. 해외에서 혼자 지내는 사람에게는 결국 내 몸과 마음의 리듬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핸드폰 정말 조심하세요. 제발 애플케어 드세요. (네, 이건 누군가의 피눈물 섞인 조언입니다. 맞아요, 저예요.)
제가 특히 관심을 두는 지점은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연결되는가 하는 부분이에요. 창작자와 기획자가 이어지고, 서로 마음을 나누며 새로운 시도를 함께 만들어내는 순간에 늘 큰 흥미를 느껴왔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며 깨달은 건, 좋은 작업은 결국 누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에서 시작된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는 ‘기획자를 위한 네트워킹 파티’를 만드는 것이에요. 단순히 인스타그램을 교환하고 끝나는 형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진짜로 서로의 관심사를 알 수 있는 대화가 오가는, 함께 무언가를 시도해 볼 수 있는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 자리에서 생겨난 연결들이 끊기지 않도록 지속 가능한 커뮤니티로 이어가고 싶고요.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필요하면 창작자와 직접 연결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예요.
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국과 영국 사이에 더 많은 연결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함께 공부한 동기들과 작은 기획자 콜렉티브를 구상하며 연말정산 형식의 뉴스레터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고, 기획자를 찾는 신진 아티스트나 새로운 협업을 원하는 창작자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장을 꿈꾸고 있습니다.
또, 런던에서 알게 된 스웨덴 출신 아티스트와 한국에서 전시·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해보자는 논의를 이어오고 있고, 아일랜드 출신 연출가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제가 알고 있는 기획자와 예술가들을 직접 연결해주기도 했어요. 작은 연결에서 시작한 대화가 실제 프로젝트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국제적 교류를 더 확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제가 가진 이런 ‘연결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최근 마켓루트(Market Route) 팀과 크리스마스 마켓을 함께 준비하고 있어요. 이 팀은 런던의 여러 마켓에 직접 참여하면서 느꼈던 아쉬운 점들을 보완해, 한국인 창작자들을 중심으로 연결하고 지원하는 프로젝트예요. 벌써 6회 차까지 진행되었고, 12월 6-7일에는 해크니에서 크리스마스 마켓도 열릴 예정이에요. 항상 새로운 창작자들과의 만남이 이어지고, 작은 기획이 어떻게 커뮤니티로 확장될 수 있는지 가까이서 지켜보는 일이 정말 흥미로워요.
https://fienta.com/marketrootvol6
저는 결국 사람, 관계, 커뮤니티, 연결에 마음이 머무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계속 찾게 되고요. 창작자든 기획자든, 혹은 다른 분야의 사람이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저는 큰 에너지를 얻어요.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심사가 이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경험을 믿기 때문이에요.
특히 저는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기획해 본 사람들, 혹은 국가 간 협업을 실제로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을 만나고 싶어요. 한국과 영국을 잇는 작업에 관심이 크다 보니, 서로 다른 문화권을 넘나들며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이들의 인사이트가 늘 궁금했습니다. 제가 기획자이기에, 국제 프로그램이 어떻게 하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단순한 지원사업으로 소모되지 않으며, 지속 가능한 관계로 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앞으로도 저는 사람과 사람, 예술과 예술, 그리고 서로 다른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자리에 머무르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인터뷰에 답하면서 제 생각들을 많이 정리할 수 있어서, 제게는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 닿을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사실 석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졸업 후 한국으로 바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래 머물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런던이라는 도시가 주는 특별한 힘이 있나 봅니다.
어디에 살든,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모든 분들 응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연결의 힘’을 믿는 사람이니, 언젠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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