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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_김효진

by 정재은

안녕하세요, 저는 연극 연출가이자 퍼포먼스 기획자인 김효진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에서 ‘조각난 순간들’을 발견하고, 그걸 다시 엮어서 무대라는 공간에 재배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K-pop 퍼포먼스 디렉팅팀과 공연 기획제작 쪽에서 일했고, 지금은 런던에서 연극 연출을 중심으로 이야기, 이미지, 리듬, 공간을 다층적으로 섞는 작업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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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다’라는 단어가 저는 참 좋습니다. 저는 그 기묘함이 언젠가 “아, 이건 김효진스럽다”라는 의미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창작 프로젝트 이름도 ‘기묘한 것들(Peculiar Matter)’이고, 'Rebuilding fragmented pieces from peculiar lives'라는 기조 안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기묘한 일상과 사람들 속에서 흩어진 감정과 경험의 조각들을 하나의 세계로 만드는 일, 그게 제가 추구하는 창작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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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K-pop, 연극, 영상, 디지털 콘텐츠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형식과 언어를 빨리 배우고 흡수하는 사람입니다. 이 적응력 덕분에 작업할 때 확장형으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제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하나의 강점은 진실성입니다. 이 진실성이 협업 과정에서 큰 신뢰를 만들어주었고, 프로젝트의 추진력과 원동력이 되어줬어요.

마지막으로 저는 ‘저만의 언어’를 찾으려는 꾸준함이 있어요. 끈기(persistence)라기보다는 꾸준함(consistency)에 가까운데요,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사람을 넘어서 “나는 어떤 언어로 세상을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붙잡고 있어요. 이게 저를 지속 가능한 창작자로 만들어주는 핵심 힘입니다.




저는 연극 연출 석사(MFA)를 하러 2023년 9월 런던에 왔고, 3년 차에 접어들었어요.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현재 학생 비자로 머무르고 있고, 내년 초에 졸업 비자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연극이 대중문화 한가운데 자리한 영국의 시장, 그리고 미국에 비해 저렴한 유학 비용, 그리고 기묘했던 2019년 스코틀랜드 교환학생 시절 연극학 공부하던 추억이 저를 영국으로 다시 오게 했습니다.

케이팝 퍼포먼스 디렉팅팀에서 일을 하면서 나만의 샌드박스에서 ‘내 것’의 대한 탐구를 더 과감하게 해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줏대 있고 감각 있는 문화예술산업 종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대학원을 알아봤어요. 폭넓게 예술경영부터 영화 연출, 그리고 연극 연출까지 고민하다가 liveness, narrative, 그리고 인간을 직접 다루는 현상학적인 면모를 모두 담고 있는 연극이라는 장르의 연출을 파고든다면 제가 어떤 장르에서 일을 하든 큰 근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차근차근 쌓고 있었던 두 번의 직장 경험 그리고 프리랜서 무대 통역 커리어는, 석사를 마치고 나서 글로벌 시장에 나 자신을 던지고자 하는 목표에 큰 힘을 실어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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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국에 와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저의 모습, 감정, 리듬을 더 잘 이해하게 됐고, 그 시간을 나에게 맞게 조절하고 즐기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가고 있어요. 게다가 이름만 듣던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루퍼스 노리스, 마리앤 엘리엇 같은 분들을 코앞에서 보고, 이야기 나누고, 조언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요. 진짜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편집자 주

토마스 오스터마이어(Thomas Ostermeier): 독일의 세계적인 연극 연출가로, 베를린 샤우뷔네(Schaubühne)의 예술감독입니다. 사회적 현실과 인간의 내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현대적 연출로 유명하며, 유럽 현대극의 흐름을 이끄는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루퍼스 노리스(Rufus Norris):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의 예술감독을 지낸 연출가로, 뮤지컬과 연극을 넘나들며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 공연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창작자 중 한 명입니다.

마리앤 엘리엇(Marianne Elliott):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 연출가로,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연출가 중 한 명입니다. 연극 워호스(War Horse),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The Curious Incident of the Dog in the Night-Time) 등 혁신적인 연출로 유명하며,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무대 이야기꾼으로 불립니다.


그렇지만 저는 매 순간 힘들었습니다. 제 한계를 계속 실험하던 2년이었어요. 특히 올해 하반기 세 번 연속 공연을 올리는 마라톤은 정말 고비가 많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가족, 친구들과 바로 소통되는 환경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시차도 있고, 새 인간관계를 처음부터 쌓아야 했고, 그렇다 보니 제가 익숙했던 안정감을 거의 내려놓고 다시 조립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작품 활동 비중이 너무 커져서 라이프의 비중이 0이 되기도 했고, 그렇게 되니 위기가 빨리 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진짜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수 기운 낭랑한 영국(사주를 너무 좋아합니다)에 오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흐린 하늘이 기분을 속이는 날이 많아서 일상 속 작은 행복 루틴이 꼭 필요해요!! 오기 전에 스스로를 지켜줄 루틴 몇 개 만들어 오시면 진짜 도움이 됩니다.




저만의 언어, 기묘한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연극적’ 언어가 어떻게 역할을 해낼지, 이를 활용하여 어떤 장르 혹은 현장에서 ‘김효진’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와서 여태 했던 것의 기록을 정리하고 반추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는데요. 올해 상반기 쇼케이스에 이어 하반기에는 연달아 3개의 결과물을 선보였습니다. 9월엔 런던 터널에서 Work-In-Progress 공연, 10월엔 현대희곡 졸업 공연 매진, 11월엔 런던 프린지 첫 장편 데뷔까지 올해 진짜 촘촘하게 달렸습니다. 성과를 정리하는 게 다음 걸음에 큰 자신감을 주더라고요. 그리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도 탐색하고 있어요. 요즘 시작한 건 명리학, 색 공부, 미술사 공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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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힘들고 지칠 때 위로가 될 수 있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비밀 친구 같은 콘텐츠 혹은 경험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그것을 만드는 행위가 저를 살아가게 만들어주듯, 이 결과물이 더 많은 사람들을 살아가게 해 준다면 그것만큼이나 소중한 게 없지 않을까 싶네요.

공연 예술을 기반으로 만들 것은 확실한데… 어떤 형태, 어떤 장르가 될지는 제가 어떻게 더 성장해 나가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이를 탐색하기 위해 저는 제 자신을 더욱 탐구하고 있어요. 나다운 게 대체 뭔지, 저 자신을 먼저 알아야 다른 사람들을 알고 이 세상을 알 수 있더라고요.


퍼포밍 아츠 기반으로 비디오, 음악, 오브제 등 요소들이 들어가는 작업을 좋아해서 요즘엔 특히 디자이너 분들을 많이 탐색하고 있어요. 컴플리시테 사이먼 맥버니 연출, 알렉산더 젤딘 연출, 샤론 에알 안무가, 로자나 바이즈 디자이너. 돌아가셨지만 데이비드 보위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




기억에 남는 공연을 하나만 고르기란 너무 고통스럽네요. 저는 공연예술 잡식이라서요. 그래도 몇 개 꼽아보자면:

2017년 〈Nell’s Room〉 콘서트
싱어송라이터 넬(Nell)의 음악 세계를 무대 위에서 깊고 감성적으로 풀어낸 공연이에요. 몽환적 라이브 밴드 사운드와 감정선을 섬세하게 조율한 무대 연출 덕분에 넬 팬들에게는 대표적 명공연으로 회자됩니다.

2023년 SM 콘서트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행하는 대형 패밀리 콘서트입니다. K-pop의 대표적인 아이돌 퍼포먼스와 압도적인 무대 연출이 특징인데, 제가 유년기였던 데다 첫 직장이라 감정이 폭발했던 공연이었어요.

연극 〈광부화가들〉(Pitmen Painters)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애싱턴 그룹'이라는 광부 출신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희곡입니다. 노동자들이 그림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표현해나가는 과정을 담아, 사회적 배경·예술·계급 문제를 다층적으로 조명하는 작품입니다. 한국 프로덕션으로 관람했어요.

샤론 에얄(Sharon Eyal)의 〈SAABA〉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스라엘 출신 안무가 샤론 에얄의 작업으로, 반복적이면서도 강렬한 군무가 특징입니다. 인간의 내면과 감각을 움직임으로 밀도 있게 표현하는 스타일이라 현대무용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공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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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Tilo Stengel


〈untitled f*ck m*ss s**gon play〉
뮤지컬 〈미스사이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바탕으로 만든 퍼포먼스/연극 작업입니다. 서구 시각의 오리엔탈리즘, 인종·성별의 문제를 뒤집어 질문하는 형태로, 기존 고전 뮤지컬을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한 실험적 작품입니다.

알렉산더 젤딘(Alexander Zeldin)의 〈The Other Place〉
영국 연출가·극작가 알렉산더 젤딘은 사회적 약자·노동·가족과 같은 현실 문제를 날카롭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해요. 〈The Other Place〉 역시 일상 속 불안과 고립, 인간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드라마 작품입니다.

브리지 씨어터(Bridge Theatre)의 〈A Midsummer Night’s Dream〉
영국 런던의 브리지 씨어터에서 선보인 셰익스피어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의 현대적 재해석 버전입니다. 관객이 무대 안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배우들과 함께 공간을 체험하는 ‘이동형/몰입형 퍼포먼스’가 특징이라,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연출로 손꼽혀요.

브리지 씨어터는 작품마다 공간 구성 자체가 계속 바뀌어서 연출가로서 상상력이 확장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극장으로는 COLAB Theatre 터널을 추천하고 싶어요. 저는 비전통적 공간에서 작업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COLAB Theatre는 런던의 대표적인 몰입형(immersive) 공연 제작 단체로, 관객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직접 서사를 움직이는 형식의 공연을 만드는 곳이에요. 전통적 무대가 아닌 도시 곳곳의 건물과 공간을 활용해, 실제 장소를 무대처럼 확장시키는 실험적 작업을 합니다. 특히 ‘The Tunnels’라는 공간은 영상·디지털 아티스트들의 전시가 상시로 열리는 창작 허브 역할을 하며, 공연과 전시가 자연스럽게 뒤섞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관객·창작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곳이라 새로운 시도와 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처음 방문하는 사람도 편하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참 시기적절하게 이렇게 소중한 인터뷰 기회를 마주했어요.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2년 동안 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내년에 똑같은 인터뷰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답이 또 많이 바뀌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만큼 앞으로의 제가 너무 기대됩니다. 미래의 김효진을 비롯한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드리며, 제가 마음에 드셨다면 모두 빠른 성공, 성취하셔서 저를 이끌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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