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차를 몰아 혜화로터리를 돌아 나오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들 방학인데 하루쯤은 할머니 댁에 가서 자도록 하는게 어떠냐는 것이다. 평소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지 않기에 1분이라도 더 빨리 집에 가려고 애쓰고 있었기에 남편의 제안이 잠시 망설여졌다. 하지만 남편과 나 둘만의 시간을 가져본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히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러자고 했다. 아이들에게 의견은 물어보라고 덧붙였다.
큰애는 문밖을 나설 때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 오락가락 했다. 할미집에 가고 싶기는 한데 엄마랑 자고 싶어 한참을 망설이더니, 아빠가 할미집에 가서 퍼피구조대를 많이 보라고 했다며 나갔다. 그저 외출이 즐거운 둘째는 '엄마 시타, 이할미 조아!'를 외치며 집을 나섰다. 아이 둘이 없는 휑한 집. 남편과 나는 오랜만의 자유 시간에 뭘 할지 머리를 맞댔다. 외식을 할까 했는데, 식탁에 남겨진 주먹밥과 집에서 튀긴 탕수육이 먹음직스럽게 보여 일단 배를 채웠다. 영화를 볼까 마사지를 받을까 술을 마시러 갈까 고민했다. 나는 책을 보고 싶다고 했다. 책을 읽고싶다는 마음은 늘 굴뚝같았지만 막상 읽을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도 마침 가져온 만화책이 있다고 하며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는 그렇게 집에서 퍼지기로 했다.
나는 먼저 아주 느릿느릿 샤워를 했다. 두피를 꼼꼼히 문질러 샴푸를 했고 수건으로 물기를 없앴다. 수납장 높은 곳에서 15분에서 20분을 방치하라는 트리트먼트를 꺼내 발랐다. 머리에 젖은 수건을 둘러쓰고 얼굴엔 팩을 붙였다. 스킨-로션-크림 단계별 토닥토닥은 커녕 급히 크림만 쓱쓱 바르고 지낼 때가 많았다. 머리를 말릴 때도 조금이라도 빨리 말릴 마음에 뜨거운 바람으로 후다닥 말린다. 오늘 저녁은 트리트먼트를 무려 30분이나 방치하고, 천천히 찬바람으로 드라이를 했다.
첫 아이를 낳고 1년을 쉬었다 복직했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5개월만에 다시 휴직했다. 그렇게 또다시 1년을 쉬고나서 복귀한 회사. 일하는게 즐거웠고 잘 해내고 싶었다. 일찍 오겠다는 아이와의 약속을 미루고 조금만 더 야근을 하던 사이, 아이에게는 깎아줄 손톱이 없었다. 수시로 손톱을 물어 뜯는 버릇은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어르고 달래도, 혼쭐을 내도 고쳐지지 않았다. 일은 어느하나 쉬이 가는 법 없이 이런저런 문제들만 잔뜩 생겼다.
다시 글을 쓰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일도 육아도 잘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정신 없이 공연들을 무대에 올리고 잠시 짬을 내어 뿌염을 하던 9월 어느날, 나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했다. 미용실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고개를 숙였을 뿐인데, 나에게만 지진이 난듯 어디론가 몸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나더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놀란 남편이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나는 미용실 소파에 식은땀을 쏟으며 드러누워 있었다.
종합병원에 가서 뇌MRI를 찍고, 심전도 검사를 하고, 평형감각 검사를 했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이비인후과에서 귀에 바람을 불어넣기도 하고, 갑자기 뒤로 눕기도 하며 여러 검사를 한 끝에 '메니에르'라는 결론을 얻었다. 당뇨처럼 평생을 관리해야 하는 병이며 '저염식'만이 답이라고 했다. 술은 물론 카페인도 좋지 않다고 해서 커피도 끊었다. 채소와 과일, 코코넛음료 등으로 연명하다가 어느날 친구를 만나 바깥음식을 오랜만에 먹었다가 극심한 위경련으로 또 한 번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서는 차라리 먹지를 않았다. 뭘 먹어야 좋을지 몰랐고 마땅히 먹을게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왜이렇게 살이 빠졌냐고 묻는 것이 곤욕스러웠다. 어지러움증 약과 이뇨제를 아침저녁으로 먹으며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졌다. 아무거나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다음주부터는 한동안 못했던 운동도 다시 하기로 했다.
어지러움이 언제 찾아올 지 모른다는 것은 굉장한 공포이다. 만약 운전을 하다가 그렇게 세상이 뒤집혔다면... 건강이 제일이라고, 남들에게 실컷 인사는 하면서도 내 스스로는 챙기지 못했다. 올해는 건강하게, 조금 약게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