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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부엌

by 정재은

우리 집 부엌에서는 네 명이 살림을 한다. 시어머니는 평일에, 친정 엄마는 일주일에 두 번, 나는 퇴근 후와 주말에, 그리고 남편은 아주 가끔. 네 명 각자의 살림 스타일이 달랐는데 그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행주’였다.


나는 하얀 면으로 된 주방용 타월을 마른행주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세탁기에 수건과 같이 빨아서 건조기에 말려 썼고 주로 그릇이나 냄비의 물기를 닦는데 썼다. 더러워진 싱크대나 식탁은 부직포 행주를 사용해 닦았다. 부직포 행주는 빨면 더러움이 쉽게 사라져 음식물을 닦기에 좋았다. 나도 친정엄마도, 전자레인지에 행주를 삶아 쓰시는 시어머니도 부직포 행주를 선호했다. 그러나 아주 가끔 부엌일을 하는 남편만이 부직포 행주를 '극혐'했다. 원인은 바로 젖은 행주에서 나는 쉰내 때문이었다. 가끔 말리지 않은 채로 방치된 부직포 행주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났다. 남편은 젖은 행주를 발견할 때마다 곧장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면 다음날 어머니들은 부직포 행주의 행방을 나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나는 의자를 딛고 냉장고 위 수납장에 들어있는 새 부직포 행주를 꺼내 드렸다. 그러다 또 빨아 널지 못했던 날엔 쓰레기통에서 주워 올린 행주를 비누로 박박 빨아 남편이 찾지 못할 곳에 널어놓기도 했다.


나도 역시 불만이 있었는데, 보이차나 우롱차를 즐겨 마시는 남편이 나의 새하얀 마른행주로 흘린 차를 닦는 것이었다. 얼룩덜룩 찻물이 든 행주는 영 뽀얀 맛이 없었다. 마른행주를 물에 적셔 식탁을 닦는 남편도 행주를 빨아서 널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이런 나의 행주 스트레스에 관해 친정엄마에게 하소연했다가 젖은 면 행주가 더 냄새난다는 역설을 들었다. 이럴 바에야 가족의 평화를 위해 일회용 행주를 써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건 환경을 위해 참았다.


내 살림이지만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닌, 공유해야 하는. 면 행주만 쓸 수도, 부직포 행주만 쓸 수도 없는 부엌. 나와 남편의 부엌이었지만, 살림을 도와주시는 각자의 취향을 나는 존중해야만 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셔틀버스를 타고 유치원에 다니는 첫째는 3시면 집에 오고, 둘째는 4시에 어린이집으로 데리러 가야 한다. 칼같이 퇴근하고 서둘러 저녁 6시에 집에 와도 엄마가 올 때까지의 공백을, 누군가는 메워줘야 했다. 도움을 받기 싫어도,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월요일 아침. 지난번에 반숙란을 맛있게 먹던 아이들 생각이 나서 달걀을 두 개 삶았다. 9분 정도를 삶았는데 하나는 알맞게 반숙이 됐고, 다른 하나는 흰자에 덜 익은 부분이 보였다. 아이에게 덜 익은 것을 먹이는 것이 마음에 걸려 껍질을 깐 달걀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30초 버튼을 눌렀다. 여기서 멈췄으면 될 것을. 전자레인지를 열어보니 뭔가 덜 익은 것 같아 다시 30초를 눌렀는데...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났다. 달걀이 터진 것이다. 형태를 잃은 그것은 전자레인지 안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펑 소리에 놀란 아이들과 신나게 웃었다. 기막힌 전자레인지를 열어놓고 집을 나왔다.


주말에 빨아놓은 낮잠 이불과 식판이 든 가방 두 개, 실내화가 든 신발주머니+수영가방에 내 가방까지 들고, 우산을 쓰고 어찌어찌 아이들을 무사히 등원시켰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나는 이렇게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악을 쓰게 된다. 다행히 그럴 수 있을 만큼 아이들은 커주었다. 퇴근 후에 저녁 준비를 하려 부엌에 들어섰는데, 부직포 행주 색깔이 초록색에서 분홍색으로 바뀌어 있다. 돌아보니 아침에 난리가 났던 전자레인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은 시어머니가 우렁각시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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