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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Oct 14. 2019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


 모든 것에서 벗어나 할머니 집에서 할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할아버지가 TV를 볼 때면 어김없이 내뱉는 불만 어린 구시렁거림을 듣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이 마주해야 하는, 마주하기 싫은 현실에서. 한 번에 몰려온 감당하기 힘든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다. 달아나고 싶다. 병에 걸려 뼈만 남아 가는 아버지에게서, 그런 그를 바라봐야만 하는 이 집에서,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막막하기만 한 나의 현재에서.


 균형 잡힌 건강한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아니면 한 없이 가벼운, 중압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삶 속에 있고 싶다.


 작고 사소한 고민과 걱정들이 삶을 채웠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마주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결국에는 시간의 힘을 빌려 이겨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음에도 도망치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두렵지는 않다. 그러나 괴롭다. 아프지는 않다. 그러나 괴롭다. 괴롭고 괴롭다.


 더 복잡하고 심오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보다 더 괴로운 상황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의 괴로움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나의 괴로움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알고 있음에도 나는 괴롭기만 하다.

 이 모든 것에서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이상?, 쾌락?, 문학?, 고독?, 망각?, 외면?, 회피?, 그것도 아니면 죽음? 아니다. 아니다.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결국에는 수용뿐이다.


 두통이 밀려온다. 두통이 밀려올 선택들과 상황들이 남아있다. 두통을 맞이하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 선택 뒤에 남겨지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가끔은 우직한 사람들의 우직한 삶이 더없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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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글이 쓰인 날이 있었다. 공개하지 못 하고 나의 메모장에서 점점 아래로 밀려나고 있던 글이다. 그러다가 오늘, 하루키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단편 소설집을 읽고 삶이 살아갈 만하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재밌는 책 한 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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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내가 쓸 글은 여기에서 끝났어야 옳다. 삶의 무게의 짓눌림 그리고 그 뒤의 희망. 그러나 내가 접한 두 가지 소식은 나의 글을 여기에서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최진리’라는 한 인간이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매력적이고 아름답다는 것, 나와 동갑이라는 것, 자주 거론되며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94년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한 명이었다는 것 정도이다. 같은 년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지금껏 보고 들어온 연예인의 죽음 중에 가장 큰 충격이 찾아왔다. 위 글을 썼을 즈음해서 나 역시 죽음을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죽기에는 지금껏 살아온 삶이 아까웠고 어차피 죽을 바에는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해보고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찌 됐든, 나는 스스로 죽지 못했다. 그러나 나와 동갑인 그녀는 더 이상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대체 얼마만큼 무거운 무게에 얼마나 오랫동안 짓눌리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사퇴를 했다. 사퇴 입장문 전문을 읽었다. ‘조국’이라는 정치적 이슈가 한 명의 가장이자 그저 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렇지, 정치적 위치와 그가 추구하는 방향을 떠나서, 그도 아들과 딸이 있고 한 명의 아내가 있는, 지금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있는 이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었지. 왜 이 글을 읽기 전까지 깨닫지 못 했을까. 아니, 알면서도 ‘저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래도 되지. 저 정도의 권력을 갖기 위해서는 당연히 감수해야지.’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외면했던 걸까? 아, 40명 남짓한 사람을 앞에 두고 발표를 해야 될 때도 심장이 떨려 전 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 했던 나는 온 가족이 나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전 국민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지켜볼 자신이 없다.


 살아갈수록 일반적인 것을 한참 벗어난, 평범하지 않은 행동에는 그에 맞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어떤 행동에 대해 더 이상 쉽게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그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면 ‘그럴 수도 있겠다’ 혹은 ‘나라도 저렇게 했을 것 같다’ 아니면 적어도 그 행동을 '조금은 납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항상 판단을 최대한 유보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잘 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려고 끊임없이 되뇌며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된 또 하나의 진실. 사실상 아무런 이유가 없는 행동들도 존재한다는 것. 이를 통한 무분별하고 비이성적인 절제되지 않은 폭력 역시도. 내가 아닌 모든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은 분명 이론의 여지없이 잘못된 행동이다. 허나 적어도 이유가 있는 폭력은 교화의 여지가 어느 정도 있다고 나는 본다. 그러나 사실상 아무런 이유가 없는, 무분별하고 비이성적이고 절제되지 않은 폭력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사라져야 마땅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최소한의 자격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짜증이 흩뿌려진 칙칙하고 어두운 곳에 있다가 ‘역시, 밝은 세상으로 나가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웃음과 가능성의 세계로 발을 딛자마자 어둡고 칙칙한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졌다.


 어느 철학자가 이야기했듯이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좋음과 싫음 같은 감정은 감정을 느낀 정도만큼 (딱 떨어지게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엇비슷하게) 그 반대의 감정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큰 슬픔을 느껴 본 사람만이 그와 비슷한 정도의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데, 오해해서는 안 된다. 커다란 슬픔을 느끼는 것은 그에 비례하는 기쁨을 느끼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말이지 충분조건이라는 말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과 기쁨, 좋음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에 반대되는 감정이 느껴질 순간이 두렵기 때문이다. 잔잔하고 평온한 감정이 계속되었으면 싶다. 아니면 적어도, 내가 반대되는 감정을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만 행복하고 기쁘고 좋았으면 싶다.


 끝으로, 나와 같은 나이의 한 인간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 사람의 선택에 진실한 존중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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