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말기 암 확진을 받고 며칠 지나지않아 내 방에 와서 물었다.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고모부네 가족이 부럽지 않냐고. 넓은 집에서 풍족한 지원을 받는 사촌 형들이 질투 나지는 않느냐고.
“아니”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번에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지금 삶에 만족하고 있고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부럽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질투를 느낀 적도 없었다. 오히려, 보수적이고 엄격한 고모부 밑에서 자란 사촌 형들이 안쓰러울 때가 더 많았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도 못 하고, 20살이 넘어서도 매를 맞는 사촌 형들이.
아버지는 항상 본인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며 나에게 고마워했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믿어주었다. 나에게 신뢰와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가능한 선에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다.
내가 어찌 이것보다 많은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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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 반 오십. 어른도 애도 아닌 어설픈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너무 일찍 가버린 아버지는 내게 무엇을 남겨주고 갔을까.
세 명이 전부인, 엄마와 딸 그리고 아들이 있는 가족이 남았다. 그렇게도 아버지가 바라 왔던 사이좋은. 아버지를 만나면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 가끔 갈등이 있긴 하지만, 옛날처럼 오래가지 않는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좋은 것을 가족들과 나누려 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진작 하지 못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렵지 않게 말이다.
당연하게도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눈물이 남았다. 누군가의 상실로 이렇게 슬퍼하고, 누군가를 이렇게 그리워하고, 누군가 때문에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하루하루 살이 빠져 뼈밖에 안 남아 언제 임종을 맞게 될지 모를 때조차도 말이다. 미약하게나마 존재하는 것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정말 몰랐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왜 좀 더 하지 못 했을까, 란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질책한다.
허무가 남았다. 인생의 덧없음, 삶의 허무함. 헌데 모순적이게도 여기서 삶의 방향을 찾게 되었다. 어차피 뭘 해도 의미가 없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죽음 앞에 모든 것이 공(空)이라면, 가장 재밌고 즐거운 것을 찾자.
건강에 대한 집착이 남았다. 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드나들며 들었던 생각은, 진부하지만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처럼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 그리고 병실을 꽉꽉 채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살기 위한 삶, 듣기만 해도 힘들고 지치고 재미없지 않은가. 나는 그런 삶을 살기도 싫고 살 수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남았다. 혼자서 몇십 년 동안 짊어지고 있었을 가장이라는 이름의 무게. 가정에 홀로 남은 남자라는 이유로 잠깐이나마 짊어져야 했던 그 무게는 실로 무거웠다. 그렇게도 참을성이 없었던 아버지가, 어떻게 이렇게 오랜 시간을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을까, 란 의문이 들 정도로.
비어있는 공간이 남았다. 4인 식탁의 남아있는 한 자리, 자동차의 왼쪽 뒷좌석, 안방 커다란 침대의 한쪽 면, 칫솔이 걸려있지 않은 칫솔 거치대, 항상 담배가 놓여 있던 서랍장 위, 항상 누워 티브이를 보던 거실 바닥, 3켤레만이 남은 신발장까지. 그 흔적은 사라져 가고 비어있는 공간이 늘어간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얼마 없는 기억은 그 자리를 지켜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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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버지를 추억하며 쓰인 이 글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