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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Sep 09. 2020

나의 이야기


후회


 삶의 목표가 분명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수련회를 대신해 꽃동네에 갔을 때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죽자.’ 그리고, 처음으로 군대에서 그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를 찾는 이도, 기댈 곳도 없어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나 무서웠고, 아까웠다. 그래서 죽지 못했다.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몇 년 동안 꿈꾸고 바라 왔던 독일 유학. 전역만 하게 된다면, 나의 의무만 끝이 난다면 독일로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전역을 몇 개월 앞두고 아빠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의사가 감정 없이 얘기한 아빠의 남은 인생은 길어봤자 1년. 유학을 미루기로 했다. 당연하게 내린 결정은 아빠가 생각보다 건강한 모습을 오래 유지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역을 한 뒤에는 가족을 내팽개치고 군대에서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받겠다며 한 달을 떠나있었다. 유학을 미루는 선택을 했으니 최소한 이렇게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아빠는 그런 내게, 전화를 끊기 전 항상 자기는 괜찮으니 천천히 돌아오라고 말했다. 진짜로 그 말을 믿었던 건지, 단지 믿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믿었다. 그래서 웃고, 떠들고, 즐겼다. 군복을 더 이상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증스러운 사람들을 이제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너무 좋아 해방감을 느끼고 자유를 만끽했다.


 그렇게 나는 9월 초에 집으로 돌아갔고, 아빠는 11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나는, 일 년 중 고작 3개월 남짓한 시간만을 아빠와 함께한 것이다. 다시는 볼 수 없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당시에는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최선을 다해 옆을 지키고 있다고, 내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집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아빠로부터. 그 짧디 짧은 시간 속에서, 어느 날에, 한 친구에게, 힘들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어, 라고 얘기했었다. 지금의 나는 그 말을 했던 당시의 나를 죽도록 경멸한다.


 이리저리 도망만 치던 나와는 달리 엄마와 누나는 1년 동안 아빠 곁을 충실히 지켜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리고 내가 자리를 비운 그 시간 동안 셋이 많은 추억과 기억도 남겼다. 나는 그때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메꾸려는 듯이, 많은 시간을 들여 아빠를 추억하고, 그럴수록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이 많지 않다는 것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눈물짓는다.



유학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학교에서 주최하는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제휴를 맺은 바르셀로나의 어느 대학교에서 약 1달간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수평적인 관계로 소통하며 함께 수업을 만들어가는 낯선 경험 속에서, 공부도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한국에서 이런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다면, 적어도 영어만이라도 이렇게 배웠다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해서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는 한 친구와 친해졌다. 어렸을 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그 친구는 영어를 한국어만큼이나 잘했고, 스페인어 역시 —노력 대비— 빠르게 배워나갔다. 매일을 복습과 숙제하는 데에 1-2시간 이상을 소비하는 나보다, 하루에 고작 10-20분, 어쩔 땐 복습과 숙제를 전혀 하지 않는 그 친구가 수업을 훨씬 잘 따라갔다.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어렸을 때 이런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시간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 좀 더 시간이 지나 그 친구와 좀 더 많은 대화를 통해 마냥 행복한 어린 시절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시절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 거저 얻은 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즈음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의 한 대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친구와 함께 스페인어를 공부하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계획이 군 생활을 하며 모은 돈으로, 전역을 한 뒤에, 독일 베를린으로 가는 것으로 점점 구체화되었다. 군에 있는 동안 월급의 2/3을 매월 꼬박꼬박 저축한 덕택에, 해외에 나가 아끼고 아낀다면 2-3년 정도를 생활할 수 있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역을 하자마자 바로 출국을 하려 했지만, 아빠의 건강문제로 계획을 미뤄야만 했다. 아빠를 떠나보내고, 마음을 정리하고, 남은 가족들과 얼마간 함께하고, 일일이 지인들과 만난 뒤, 늦어도 4월에는 출국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월, 코로나가 중국을 넘어 한국, 아시아, 세계를 뒤덮어가며 사람들의 계획과 일상을 파괴했다.




 17년 1월, 순례자의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것들을 네이버에 있는 한 카페에 올리기 시작했다. 길을 걷는 내내 나를 옥죄는 고독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시작했고, 내가 걸었던 길을 이미 걷고, 앞으로 걸을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와 공감, 그리고 응원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써나갔다. 그렇게 그날그날 느꼈던 그대로를 자기 전 핸드폰으로 작성해서 업로드한 글은,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에 쓰인 것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글은 내게 있어 순례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걷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그 역할을 다하자 금방 잊혔다.


 그 글들을 다시 읽게 된 건, 2018년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퇴근 후 작년 이맘때 갔던 마지막 여행을 떠올리고 있었고, 추억에 잠겨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읽기 위해 글을 올렸던 카페에 들어갔으며, 내 손으로 작성된 창작물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용이 형편없음은 물론,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엉망이다 못해 처참한 수준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었는지 1년 전의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내가 썼던 글을 하나하나 다시 쓰기 시작했다. 카페에 올렸던 글로 당시를 환기시키며.


 칙칙한 담벼락에 둘러싸인 곳에서 한없이 자유로웠던 여행을 한 장면, 한 장면씩 회상하며 그려내는 것은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꽤나 재미있었다. 그렇게 다시 써 내려간 글들을 출판사에 다니는 한 친구의 권유로 브런치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비록 엉망이긴 했지만, 내 경험을 녹여낸 글들을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퇴고하다 보니 순례길이 아닌 다른 글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과 상상, 경험, 마음, 고민 등을 글이라는 형태로 담아내고,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새로운 취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취미가 절실한 탈출구가 된 것은 상실을 준비하면서부터이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쉽게 매몰되는 나는, 감당하기 벅찬 불규칙하고 무분별한 감정의 솟구침을 토해낼 수단이 필요했다. 나약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편히 기대지 못하는 내게, 글은 유효하고 적합했다. 특정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날 것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 나는 이를 통해 가까스로 삶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글은 내게 있어 점점 중요한 위치를 점해갔고, 친구네 공장에서 짧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 문득 깨달았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죽을 때까지 글은 쓰겠구나, 하고 말이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하루 경험하고는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고개를 젓고 나가는 힘든 노동 환경 속에서, 나는 글로 써 내려갈 소재들을 생각하며 버텨냈다. 확신과는 별개로 요즘 들어 글이 잘 써지지 않지만 말이다. 



불안


 어디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더없이 익숙한 집에서 남은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딴섬에서 분명 좋은 사람들인 이들과 함께 있어도,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어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잠을 자고자 눈을 감으면 그곳이 어디든 심장이 뛴다. 커다란 울림으로.


 이 불안한 울림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부재, 바이러스로 붕괴된 계획, 막막하고 어두컴컴한 앞날, 마음 편히 기댈 곳 없는 상황, 써지지 않는 글, 줄줄 흘러내리는 주식, 혹은 전염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의 하모니.


 원인이야 뭐가 됐든, 나는 불안하다. 불안하고 불안하다. 불안증은 점점 심해져 전혀 불안하지 않던 것들까지 불안해지고 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나를 덮쳐오고, 떠올릴 수 있는 온갖 상황이 내 앞에 펼쳐진다. 갑갑하게 죄인 심장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없다. 



공허


 아빠를 잃고, 속이 텅 빈 인간이 되어버렸다. 무엇을 해도 여운이 남는 진득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휘발성 감정만을 배출할 뿐이다. 누구를 만나도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쉽게 지쳐버린다. 삶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니,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 덧없게만 보인다. 의미를 잃어버린 삶 속에서 마음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선을 넘어버린 기분이다. 언제나처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대가 들 때가 있는가 하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불길한 생각으로 가득 찰 때가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가지 감정에서 파생된 동류의 감정들은 더 섬세하게, 더 깊이, 더 자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슬픔, 괴로움, 비통함, 허무, 서글픔, 후회, 회한…. 이것들은 때때로 아무런 전조 없이 나를 찾아오고, 비어있는 나를 가득 메운다. 그러다 다시 공허를 맞이하고, 또다시 젖어있는 감정들이 나를 가득 채운다. 한없이 축축한, 머리가 찡하도록 무거운 감정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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