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기록적인 폭염과 함께 10년 만의 무더위가 한국을 강타한 8월의 어느 일요일, 진철은 거래처 사장의 억지와 강요에 못 이겨 그와 함께 마라톤을 달리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김 대리! 결승선 못 넘으면 계약도 없을 줄 알아!” 뜨거운 태양 볕에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거래처 사장이 했던 얘기가 진철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까짓 거 풀도 아니고 하프 마라톤인데 그걸 못 하겠어? 주말마다 조기 축구도 하는데 말이야. 우리 아들 정수만을 생각하자. 정수만을….’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진철은 스트레칭을 마무리했다.
휘슬과 함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자 거래처 사장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갯짓 하고는 달려 나갔다. 처음 5분이 지나고, 덥긴 하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진철의 머리를 스쳤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부풀어 올랐지만, 그는 나약한 자식을 채찍질하며 계속해서 달렸다.
“뭐야―, 벌써― 지쳤어― 김 대리? 그래― 가지고― 계약― 딸 수― 있겠어?” 거래처 사장이 점점 뒤처지는 그를 힐끗 보더니 호흡을 조절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조잘거렸다.
‘악마 같은 놈.’ 그는 속으로는 이렇게 울부짖었지만, 구겨진 얼굴은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내가 당신 때문이라도 악마한테 영혼을, 아니 몸을 팔아서라도 결승선을 넘는다. 넘어!’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자랑스러운 아빠이자 남편, 영업팀의 자랑, 업무 평가 같은 것들은 그에게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제기랄, 다 필요 없으니까 그만하고 싶다. 달리는 것을 멈출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거래처 사장과 격차가 점점 벌어지자 그가 중얼거렸다. 옆으로 빠지는 길을 보며 ‘확 그냥 저기로 도망쳐 버릴까’란 생각을 하자마자, 악마 같은 거래처 사장이 속도를 줄여 그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속삭였다.
“계약서만― 생각해, 계약서”
대답할 기운도, 웃어 보일 힘도 없었던 진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람은 이렇게 많은 땀을 흘리고도 죽지 않는 건가, 인체를 구성하는 성분 중에 반 이상이 물인 것은 이를 위함인가, 출발선을 떠난 지 약 40분, 땅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에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이었다.
“자네― 괜찮나―? 이거― 피―나는― 것 좀― 보게. 넘어질 것― 같으면― 걷든지― 해야지―. 사람이― 미련-해가지고는―. 저기― 그늘에서― 좀― 쉬다가― 도착 지점에― 먼저― 가 있게.” 앞서가던 사장이 땅바닥에 누워 헉헉거리고 있는 진철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제자리 뛰기를 하며 호흡을 고르면서 마라톤 코스 옆으로 나 있는 푸릇푸릇한 거대한 나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닙니다. 하아. 계속. 하겠습니다. 하아.” 땅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은 채로 숨을 몰아쉬며 진철이 답했다.
“아이고―, 그 꼴로―, 퍽이나―. 됐네―.”
“그럼 저…, 계약은….” 몸을 살짝 들어 사장을 올려다보며 그가 말끝을 흐렸다.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뜨거운 태양에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아이고, 계약 운운하는 거 보니 아직 살 만은 한가 보네. 가 있게!” 호흡을 가지런히 정리한 사장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지도 사람이면 해주겠지. 뭐.’ 다시 쓰러지듯 누운 진철이 가쁜 호흡을 고르며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 원점으로 되돌아온 진철은 의료팀에게 응급처치를 받고는 그늘에 앉아 ‘정말 지랄 같은 날씨군. 이 날씨에 마라톤을 하려고 모인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야. 이걸 하겠다고 온 나도 나지만, 이 사람들도 정상은 아니구먼.’ 따위의 생각을 하며 속속 들어오는 사람들을 흘겨보고,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자네 지금 내 욕하고 있지? 뭘 그렇게 고개를 젓고 있나, 그래?” 사장이 인기척도 없이 뒤에서 나타나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사장님. 아쉬워서 그랬습니다. 아쉬워서. 넘어지지만 않았으면 저도 완주를 했을 건데. 하하” 다시 영업팀의 자랑으로 돌아온 진철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사래를 치며 재치 있게 받아쳤다. 속으로는 ‘하여간, 귀신같은 노인네.’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래, 넘어진 곳은 좀 괜찮나? 어디 좀 보게”
진철이 멋쩍게 웃으며 손바닥에 붙어있던 반창고를 떼어 사장에게 상처를 보여주었다.
“괜찮습니다. 사장님. 하하. 뭐, 얼마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어떻게, 기록은 만족스럽게 나오셨습니까?”
“그래, 심한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구먼. 자! 보게.” 사장이 손에 들고 있던 기록증을 그에게 건넸다.
“1시간 32분 23초. 사장님 이게 잘 나온 겁니까? 저는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자네만 넘어지지 않았어도 1시간 30분 안짝으로 들어왔을 거라네.” 짐짓 엄격한 표정을 한 사장이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이거 참….” 진철이 머리를 긁적였다.
“크하하하. 농담이네. 농담. 표정이 아주 볼만 하구먼.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지. 지난번 기록이 34분대였으니까 말이야. 자!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의 등을 찰싹 때리며 사장이 말했다.
“아이고, 정말 놀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가시죠.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
“자네 혹시 여기서 지하철 타고 집에 갈 수 있겠나? 내가 뒤에 일정이 좀 있어서 말이야. 주말에 불러서 마라톤까지 뛰게 했는데, 이거 참 미안하네.” 종로 인근의 어느 냉면 가게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장은 빈 그릇을 앞에 두고 휴지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예! 배도 든든하고, 지하철 타고 가는 게 훨씬 빨라서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들어가십시오. 하하.” 업무평가를 앞둔 직장인답게 진철이 호탕하게 말했다.
“그럼 사양 않고 먼저 일어나겠네. 조심해서 들어가고, 종종 같이 뛰자고!”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월요일에 계약서 들고 방문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인사하며 그가 씩씩하게 말했다.
사장이 계산을 하고 나가자 진철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보았다. 혈기왕성했던 고등학교 시절, 4교시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고 돌아와 점심도 먹지 않고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때를 환기시키는, 그립지만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곧바로 집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3살 배기 아들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가면 마음 편하게 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가로젓던 진철이 좋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사우나에서 샤워도 하고, 눈이나 좀 붙였다가 가야겠다.”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곤 아내인 은아에게 거래처 사장님이 밥 먹고 사우나도 같이 가자고 해서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본인도 정말 가기 싫지만, 일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을 풀풀 풍기면서.
-
“옷도 주세요.” 카드를 내밀며 진철이 말했다.
“여기요. 음….” 옷과 함께 수건을 내밀며 직원이 말끝을 흐렸다.
“아아, 상처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당연히 탕에는 안 들어가고 몸만 간단히 씻고 잠깐 눈만 좀 붙였다 갈 겁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직원에게 웃어 보이며 그가 말했다.
진철은 따끔거리는 손바닥과 무릎을 찬물로 헹궈내고 간단하게 샤워를 마쳤다. 평소 온탕과 사우나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시간 보내는 걸 즐기는 그였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도, 몸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곧바로 몸을 닦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섰다.
다 헤져있는 사우나복을 입고 남탕에서 사우나로 이어지는 문을 향해가며 ‘오늘은 정말 피곤한 날이야’라고 그는 생각했다. 진철은 두리번거리다 한쪽 구석에 있는 수면실을 발견하고는, 깔개와 베개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수면실의 첫인상은 ‘잠깐 눈 붙이기엔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10명 정도가 누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수면실은 어둡고 따뜻했으며,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깨끗해 보였다. 왼편 가장 안쪽 끝자리에서 두 자리 떨어진 자리에 2명이 나란히 거리를 두고 누워있었기 때문에, 진철은 가장 어둡고 구석진 오른편 끝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깔개를 깔고, 베개를 베고 누우니 곧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도 저녁 먹기 전에는 들어가야 되는데…, 잠의 문턱을 넘으면서 그가 생각했다.
진철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그가 잠이 든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그의 몸을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애무가 분명하게, 꿈이 아닌, 현실에서, 지금, 그에게, 다른 누군가로부터, 이뤄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잠이 확 깬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진철이 소리쳤다.
옆에서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킨 한 낯선 남자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다, 당신 뭐야? 당신 방금 내 몸 만졌지? 어?” 진철이 낯선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인상을 잔뜩 구겼다. 어두워서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낯선 남자는 여전히 대답 없이 진철을 빤히 바라봤다.
잠시 후 갑작스러운 소란에 수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실루엣이 하나둘 몸을 일으켜 그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2명이 전부였던 수면실 안에는 어느새 5명이 있었고, 일제히 그들의 시선을 받게 되자 진철은 얼굴이 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일단 밖으로 나와. 당신, 따라 나오라고.” 낯선 남성의 눈앞으로 손가락을 들이밀며 진철이 위협했다.
진철이 몸을 일으키자 낯선 남자도 순순히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 수면실 밖으로 나섰다.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사람이 없는 구석진 곳을 찾은 진철은 떨리는 심장을 애써 의식하지 않은 채 몸을 꼿꼿이 펴고 팔짱을 끼고는, 낯선 남자를 향해 몰을 돌렸다.
“당신 아까 내 몸 만졌지? 어? 내가 다 느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 낮은 목소리로 진철이 으르렁거렸다.
“그래요. 만졌어요. 이반 아니에요?” 낯선 남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뭐? 이반? 이반이 뭐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진철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이상하다. 내 감은 틀린 적이 별로 없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낯선 남자는 덧붙여서 말했다.
“여기 크루징 스폿이에요.”
“뭐? 크루, 뭐? 이런 시발,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똑바로 말 안 해?”
하아…, 완전 잘못짚었네, 낯선 남자가 낮게 중얼거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이반은 게이를 의미하는 거고, 크루징 스폿은 게이들이 파트너를 찾는 장소라는 거예요. 어쨌든 아니라면 미안하게 됐어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뭐? 뭐라고? 게이?”
충격적인 대답에 진철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낯선 남자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남자는 그와 비슷한 ―180cm는 되어 보이는― 키에 꾸준한 운동으로 잘 다듬어진 체형과 깨끗한 피부, 그리고 균형 있게 자리 잡힌 이목구비와 그와 어울리는 깔끔하고 잘 정리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게이라는 거야? 그렇게 멀쩡하게 생겨서?” 그를 위아래로 천천히 계속해서 훑으며 진철이 물었다.
“이 사람 진짜 무례하네. 아니, 뭐 무례는 내가 먼저 범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예, 맞아요. 저는 게이고, 여기는 게이들이 하룻밤 상대를 찾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그것보다, 진짜 아니에요?”
“뭐? 게이들이 하룻밤 상대를 찾는 곳? 이런 미친…. 그리고 뭐? 이것 봐, 나는 결혼도 했고, 애도 있는 사람이야. 3살 먹은 애가 있는 사람한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당신? 미쳤어?”
“결혼하고 애 있는 게이도 많아요. 결혼해서 아이 없이 사는 게이도 많고. 어쨌든 아니라면 제가 정말 잘못했네요. 죄송해요.” 낯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아니 이게 지금 사과한다고 해결될 문제야? 어? 당신 나를 성추행한 거야. 성추행한 거라고!” 진철이 주위 눈치를 살피면서 낮은 소리로 낯선 남자를 향해 사납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잖아요. 저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반말하는 것도 계속 참고 있고요. 그럼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요? 경찰서에 가서 남자한테 성추행당했다고 신고라도 하시게요? 동네방네 게이 사우나 왔다가 성추행당했다고 소문내고 싶어요? 회사에도 다 소문날 텐데?”
“허…, 참….” 진철은 할 말을 잃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정말 몰랐어요? 여기가 그런 곳인지?”
“몰랐다고 했잖아! 나는 게이 아니라고!” 진철이 욱해서 소리친 후 주위를 둘러보며 다급하게 소리를 죽이고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모를 수가 없어서 그렇죠. 올 때 카운터에서 수건 주지 않았어요? 보통 사우나는 탕 안에 있잖아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봐요.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
대답을 하고 진철은 천천히 주위를 돌아봤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분명 뭔가 이상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과 여자 손님이 ―특히 삼삼오오 모여 있어야 할 아줌마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대다수가 혼자 있거나 둘셋씩 모여 있는 다양한 연령층의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와 낯선 남자를 알게 모르게 훔쳐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재밌는 구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순간적인 위화감이 덮쳐오면서 소름이 온몸을 덮었다.
“이게 대체….” 말문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으면서 진철이 말했다.
“봤죠? 저도 잘못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더운 주말 낮에, 굳이 남자 혼자 크루징 스폿에 와서는 수면실을 들어가면 오해를 할 수밖에 없죠. 안 그래요?” 진철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낯선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얼이 빠진 진철이 갈 곳 잃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진철의 눈치를 살피면서 낯선 남자가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 그래도 될까요?”
진철은 입을 다문 채로 그를 노려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를 잡아둘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라도 연락할 일 생기면 연락해요. 카운터에 제 명함 맡기고 갈 테니까.”
“내가 왜 당신한테 연락을…” 고개를 들어 말을 이어가려고 보니 남자는 벌써 그의 말소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가 있었다.
하아, 진철은 벽에 등을 기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벽을 따라 서서히 내려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까진 손바닥과 무릎이 따끔거렸다.
“저기….”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 진철을 카운터 직원이 불러 세웠다.
“예?” 지쳐있는 얼굴로 그가 물었다.
“아까 용이가 그쪽한테 명함을 주라고….” 직원이 명함 하나를 진철에게 내밀었다.
○○모직
디자이너 심재용
010-2112-○○○○
그가 건네받은 명함을 눈을 가늘게 해서 내려다봤다. 그를 만졌던 게이는, 재용이라는 이름의, ―평소 패션에 관심이 없는 그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의류 회사의 디자이너였다. 진철은 깊은 한숨과 함께 명함을 구겨 출입문 옆에 놓인 커다란 은색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남자의 회사와 이름, 번호가 각인되어 있었다. ‘○○모직, 심재용, 010-2112-○○○○’, 너무 유명한 회사와 그의 친구와 같은 이름, 그리고 한 번 보면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전화번호였다.
-
진철이 집 근처 역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현관문 앞에 선 그는 들어서길 망설였다. 아내에게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찬 기운이 느껴지는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놓고 그는 생각했다. 그 스스로도 왜 지금까지 숨김없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눌 수 있었던 아내에게, 오늘 겪은 일을 이야기할 수 없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그저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늦었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설거지를 하고 있던 아내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짜증이 묻어 있는 말투였다.
“으응, 미안.” 안방으로 곧장 들어가며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답했다.
얼마간 물소리와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아내가 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누워있는 진철을 내려다봤다. 그는 이불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손등을 콧등 위에 올려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손바닥이랑 무릎은 왜 그래?”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 누워있는 그에게 물었다. 짜증과 걱정이 뒤섞인 말투였다.
“아…. 별거 아니야.” 진철은 미동 하나 없이 답했다.
“아니긴. 아파 보이는데. 왜 그랬냐니까?”
그녀는 작은 상처에도 예민하게 굴었다.
“정말 별거 아니야. 아까 마라톤 하다가 넘어진 건데, 정말 괜찮아. 정수는?”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하아―, 한참을 아빠 찾으면서 울더니 지금은 지쳤는지 곤히 자. 근데 왜 그래, 계약이 잘 안 됐어?”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투를 애써 바꾸며 아내가 물었다.
“은아야. 나 오늘은….”
“…. 알았어. 나중에 얘기하자. 오늘은 그냥 쉬어. 상처에 바를 약 식탁에 올려놓을 테니까 바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녀가 말했다.
애칭이 아닌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각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서로에게 부탁하는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그럴 때면 상대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곤 했다.
아내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진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물을 가장 차게 해서 틀어 두고, 가만히 그 물을 맞으면서 사우나에서 있었던 일을 되뇌었다. 잠결에 느껴졌던 낯선 손길, 분노와 놀람이 뒤섞인 감정, 낯선 남자, 그리고 충격적인 대화.
그가 그 일들을 한낱 해프닝으로 받아들이고, 웃으며 아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불쾌하고 더러워야 할 그의 기분이 재용이라는 낯선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좋은 기분은 결단코 아니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분명히 불쾌한 느낌이 옅어지기 시작했어. 대체….’
샤워를 끝낸 진철이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 중에 그의 아내가 들어와 옆자리에 누웠다.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 속에는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찬 한 남자와 마음이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찬 한 여자가 얇은 이불속에 나란히 누워,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에어컨이 간헐적으로 웅-하는 소리를 냈지만 두 사람 귀에는 닿지 않았고, 침묵은 밤새 이어졌다.
“뭐야, 너 게이냐?” 맨 끝자리에 앉은 진철은 못 볼 것이라도 본 표정으로 옆자리에 엎드려 있는 지웅의 옆구리를 툭 치며 물었다.
“으응? 무슨 소…, 내 핸드폰! 내놔. 그거.” 자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벌떡 일어난 지웅은 짝꿍의 손에 들려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보고는, 못 볼 것이라도 본 얼굴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게이 새끼야. 문자에 다 나와 있는데. 봐봐 여기.”
“형, 저 확신이 서질 않아요. 게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바이인가 싶고. 너무 혼란스러워요. 형도 다 그런 과정을 거쳤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달려드는 지웅을 한 팔로 막으면서 진철이 문자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거기! 조용히 안 해! 한 번만 더 떠들면 복도로 내보낸다. 공부 안 할 거면 잠이라도 자라. 다른 애들 방해하지 말고.” 자습시간을 주고 책을 읽고 있던 국어선생이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네, 죄송합니다. 샘. 조용히 할게요.” 진철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지웅을 바라보며 숨죽여 말했다.
“애들한테 다 말하기 전에 가만히 있어라. 너, 내가 이거 말하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알지?”
“하아,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남의 핸드폰 문자를 왜 뒤져. 빨리 줘. 핸드폰.” 주위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울상으로 지웅이 속삭였다.
“뒤져? 뒤지긴 뭘 뒤져. 뒤질래? 그냥 본 거지.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학교 전체에 너 게이인 거 소문난다고 생각해라.” 진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하아….” 괴로운 표정의 지웅은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분간 핸드폰을 더 들여다본 진철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지웅의 책상 위로 핸드폰을 던지듯이 올려 두더니,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뭐 더 볼 건 없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비밀은 지켜줄 테니. 이 호모 새끼야. 근데, 바이가 뭐냐?”
따라라랑 따라라랑
난데없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진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알람을 끄고 옆을 바라보니 아내인 은아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며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 위로 덮고 있었다.
‘후우, 깜빡 잠들었나 보네.’ 익숙한 공간에 안도감을 느끼며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화장실로 향했다.
‘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오랫동안 떠오른 적 없는 기억인데….’ 순식간에 머리를 감은 뒤 세수와 면도를 마치고 칫솔 위로 치약을 눌러 짜며 그가 생각했다.
진철은 거울을 통해 양치질하는 본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도, 지난밤에 꾸었던 철없고 못됐던 고등학교 시절의 꿈도. 그러나 이 두 가지 기억에서 비롯된 온갖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눈을 감아도, 떠도 그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없자, 그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서 세면대로 시선을 떨구고 입에서 떨어지는 하얀 거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투-욱. 투-욱. 자신의 손과 칫솔을 타고 흘러내린 하얀 거품들이 세면대에 떨어져 은색 물마개 사이로 보이는 어두컴컴한 세면구멍을 향해 천천히 흘러 내려갔다. 어떤 힘에 이끌려, 느리지만 꾸준하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식탁 위에 올려진 적갈색의 포비돈 요오드 병과 연고, 그리고 대일밴드가 눈에 띄었다. 진철은 잠시 망설였지만 시계를 힐긋 보고는 이내 까진 무릎과 손바닥 부위에 요오드와 연고를 바른 뒤 대일밴드를 붙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포스트잇에 ‘다녀올게.’라고 적어 식탁 위에 붙여둔 뒤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섰다.
-
거래처 사장이 날인한 서류를 들고 회사로 돌아가면서 진철은 고등학교 친구인 영걸이 동네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들렀다. 돌아가는 길이긴 했지만, 조금 늦어도 그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꽤나 규모 있는 계약을 성공시킨 오늘 하루만큼은.
“어우 시원해.” 카페 문을 열고 다짜고짜 진철이 말했다.
“어어, 웬일이냐, 이 시간에?” 영걸이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계약하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렀어. 오늘은 손님 좀 있냐?” 진철이 카페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테이블 4개가 고작인 작은 카페였다.
“매번 똑같지 뭐. 아아?”
“응. 얼음 꽉 채워서, 투 샷. 딱 보니까 출근한 지 얼마 안 됐네. 그렇게 마음대로 열고 닫고 하니까 단골이 안 생기는 거라니까.”
“아,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래. 그리고 점심 장사만으로도 충분하거든요.” 영걸이 원두 가루를 탬핑하며 미소 지었다. 영걸은 고등학교 때부터 근심걱정이 없는 친구였다.
“부럽다, 부러워. 임대료랑 인건비 걱정도 없겠다, 먹여 살릴 자식이랑 와이프도 없겠다. 누군 주말에 불려 나가서 마라톤까지 뛰는데. 인생 참 편―하게 산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진철은 괜스레 이죽거렸다.
“왜 또 와서 심술이냐? 어제 은아 씨랑 한 판 했냐?” 얼음을 꽉 채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영걸이 그를 떠봤다.
“땡큐. 커피 맛있네.”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커피를 냉큼 받아 챈 영걸이 한 모금 쭉 들이켠 후 말했다.
“한 달에 서너 번은 와서 마시면서 무슨.” 영걸이 피식 웃었다. 내심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영걸은 흘러나오는 경쾌하고 발랄한 댄스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뒷정리를 했고, 진철은 커피를 홀짝이며 미간을 어루만지면서 지난 밤 꾸었던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꿈에서 본 사건 이후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지웅이 어떻게 되었더라.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어느새 정리를 마친 영걸이 진철에게 물었다.
“응? 아, 아니. 고민은 무슨.”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고민도 없으면서 뭘 그렇게 심각해?
“별건 아니고…. 너 혹시, 우리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현지웅이라고 기억하냐?” 진철이 넌지시 물었다.
“현지웅? 지웅이라….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영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아! 그…, 전학 간 애인가? 게이라고 소문나서?”
영걸의 말에 진철의 흐릿했던 기억들이 또렷해졌다. 진철이 지웅의 핸드폰을 들여다본 이후, 그는 짓궂은 짝꿍의 그 어떤 장난에도 반응하지 않고 무시로 일관하는 방법을 택했고, 이에 발끈한 진철은 홧김에 친한 친구 몇몇에게 그가 본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게 학교 전체로 퍼져 지웅은 결국 전학을 가야만 했다.
“그래…. 그랬었지.” 진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기지개를 켜며 영걸이 물었다.
“아…. 아니야. 아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그만 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진철이 말했다.
“뭐야, 궁금하게.” 영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간다. 커피 고맙다.” 진철이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머리 위로 들어 흔들며 인사를 한 뒤,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영걸이 무슨 말인가 하는 듯했지만 진철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곧, 후끈한 기운이 그를 덮쳐왔다.
현지웅.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진철은 그에 대해 떠올렸다.
키가 작고 마른, 평범하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학생.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예술이면 예술 그 어느 것 하나 특출 난 것 없는 ―좀 더 솔직한 표현으로는 그 모든 것이 평균 이하였던― 아이. 그의 특징이라고 해봐야 작고 마른 그의 체형에 비해 각지고 넓은 어깨를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공부도, 운동도 곧잘 하면서 반 친구들은 물론 교내에서 힘깨나 쓴다는 ―소위 노는 애들이라고 일컬어지는― 학생들과도 어색함 없이 잘 지냈던 진철이 우연히 짝이 되지 않았다면 1년 내내 말 한 번 섞어 보지 않았을, 그런 친구였다.
진철이 그런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된 일은 여러 상황이 어긋남 없이 맞아떨어져 발생한 우연의 결과였는데, 그 상황인즉 이러했다.
그들이 짝이 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국어 선생이 자습시간을 부여했을 때, 그날따라 진철은 심히 무료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고, 책상 위에 놓인 지웅의 핸드폰에 그의 눈길이 닿았을 때 마침 문자가 옴으로써 그의 흥미를 끌었으며,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그 핸드폰을 들어 열었을 때, 그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기기는 비밀번호가 걸려있지 않은 상태였다.
국어선생이 수업만 했어도, 진철이 그때 무료함을 느끼지만 않았어도, 지웅이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엎드려 있지만 않았어도, 때마침 문자만 오지 않았어도, 적어도 핸드폰에 비밀번호가 걸려있기만 했어도, 꿈에서 환기됐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진철이 익숙한 풍경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들을 하는 중에 그의 차는 어느새 회사 앞에 다다랐다. 커다란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가득했던 에스프레소를 희석한 물이 바닥을 보일 즈음이었다.
-
그 사건이 있고부터 몇 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진철과 은아는 그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았고, 한결같은 주중과 주말을 보냈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각자의 비밀과 고민으로 둘러싸여 하루하루 번뇌하며 살아가는 두 남녀가 있었다. 한 사람은 처음으로 겪은 낯선 감정에서부터 시작된 혼란을 숨기며 괴로워했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의 미묘하게 달라진 모습에 시달렸다. 두 사람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그런 ―갈수록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모른 척 살아가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먼저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아내인 은아였다. 열대야가 아직 가시지 않은 어느 금요일이었다.
‘우리 오늘 저녁에 술 한잔할까? 정수는 엄마한테 부탁해볼게.’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사무실로 향하는 중에 진철이 아내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읽었던 메시지를 계속해서 읽으며 진철은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회사에 들어가기 전,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그가 아내에게 답을 보냈다.
알겠어. 일찍 들어갈게.
짧은 심호흡으로 재정비한 진철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적막하고 고요한 가운데 아내가 식탁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씻고 올래?” 그녀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방으로 향했다. 한여름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군,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향했을 때는 그사이 몇 가지 음식들과 이미 채워진 소주잔 2개, 그리고 3분의 1 가량이 비워진 소주 한 병이 가지런히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 둘이 이렇게 술 마시는 건 오랜만이네.” 그가 자리에 앉자 아내가 이야기했다.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응, 그렇네.”
시간이 지날수록 침묵이 무게를 더해갔다.
“한 잔 마실까?”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진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자.” 가득 찬 유리잔을 들면서 은아가 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저기,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빈 잔을 들었다 놨다 어루만지면서 아내가 또다시 이어지려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 얘기는 오빠한테 해야 될 것 같아서.” 처음으로 둘의 눈이 마주쳤다. 결심이 선 한 여자의 흔들림 없는 눈과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한 남자의 눈이었다.
“나 오빠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아내의 고백에 진철은 할 말을 잃었다. 숨기고 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내가 오빠 만나서 결혼하기 전에 연애 딱 한 번 해봤다고 한 말, 혹시 기억해?” 눈만 깜박이고 있는 그에게 그녀가 물었다.
“으응.”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그가 답했다.
그들이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그녀의 지난 연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얼마나 오래, 몇 명을 만나봤으며,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 물었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다는 그에게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그리고는 “전에 만났던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할 거야”라고 단호하게 덧붙이며 못을 박았다. 그 뒤로 그는 그녀가 과거에 만났다는 그 한 사람에 대해 다시는 묻지 않았다. 그 말을 할 때에 그녀의 눈빛에서, 앞으로 몇 번을 묻든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 죽었어.”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 느닷없는 고백에 그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가 그려봤던 무수한 상상 속에 이런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3년을 짝사랑했고,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만났던 사람이야. 내 어린 시절은 그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금 오빠가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고여 있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것이 그냥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 얘기를 왜 지금….”미세하게 떨고 있는 아내에게서 눈을 돌리며 진철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죽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몇 번이나 이런 얘기를 했어. 너는 결혼해서 꼭 평범한 사람들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라고. 나는 먼저 가지만 너는 아이도 낳고, 그 아이가 낳은 손자도 보고 오라고. 행복하게 살다가 꼬부랑 할머니 되면, 그때 오라고. 그러기 전엔 절대 올 생각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끅끅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그 사람…. 후우…. 교통사고였어. 병원에 입원해서 몇 번이나 수술을 했는데도…. 그냥, 그렇게 허망하게 가더라. 둘 중 한 명이라도 취업하면 바로 결혼하자고. 나 닮은 딸 낳아서 행복하게 살자고. 그렇게…, 그렇게 얘기했던 사람이 틈만 나면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자긴 잊고 다른 좋은 사람이랑 남은 인생 살아가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처음으로 그 앞에서 오열하는 그녀를 두고 그는 남아있는 술을 연거푸 따라 마셨다. 그것 외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해했어. 나를 위해 하는 말이란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들을수록, 화가 나더라.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더라. 그래서 하루는 너무 화가 나서, 네 말대로 할 테니까 그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너 말고 다른 사람 만나서 평생 네가 부러울 정도로 행복하게 살 테니 그만 이야기하라고, 그렇게 얘기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웃더라. 만족스러운 얼굴로 해맑게 웃더라. 그러고는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다음 날 떠났어.”
초점 없는 눈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메인 목을 뚫고 나오는 눈물 젖은 목소리는 신 앞에 무릎 꿇고 잘못을 비는 독실한 수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보내고 몇 달을 폐인처럼 살았어. 나중에는 이렇게 살아갈 바엔 그냥 그 사람 따라서 나도 죽어버리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그렇게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보기 위해 찾아갔는데, 납골당에 있는 웃고 있는 사진이 나한테 그러는 거 같더라. 약속했던 것처럼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어. 남아있는 내 마음은 하나도 모르고 죽으려고 찾아온 나한테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는 그 사람의 해맑음이 어이가 없어서. 근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웃고, 울다 보니 집으로 돌아갈 때쯤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가 지긋지긋하게 말했던 그 말처럼, 내가 홧김에 내뱉었던 그 약속처럼. 그래서 취업 준비도 시작하고, 사람들도 다시 만나기 시작했어. 그렇게 일상을 되찾아가던 중에 오빠를 만난 거고.”
진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 더 마시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 한 병을 더 꺼내왔다. 그리고는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르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야.”
진철이 고개를 들어 그의 아내를 쳐다봤다. 그녀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당신한테 말하지 않은 이야기. 이게 다야. 그러니까 당신도 솔직하게 다 말해줘. 지금 당신이 숨기고 있는 이야기.”
“…….”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는 얼굴로 진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우나에서 겪었던 그 사건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주 동안이나 그를 괴롭게 했던 그 혼란스러움을 아내에게 털어놓는 것뿐이었다.
“일요일에 거래처 사장이랑 마라톤 한다고 나갔다 들어온 날 기억해?” 채워진 잔을 비우고 몇 초간 눈을 감았다 뜬 뒤에 그가 물었다.
“응. 사우나 갔다가 늦게 들어온 날.” 그녀도 그 날이 기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그가 입을 꽉 다물었다. 본인의 입으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게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남자한테 성…, 성추행을 당했어. 그 사우나에서…. 나를 만진 남자가 거기는 게이들이 하룻밤 상대를 찾는 곳이라고 하더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을 마친 그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왜 그때, 바로 얘기 안 했어?” 그녀도 잔을 비우고 물었다.
“문제는….” 그가 비어있는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문제는 나를 만졌다는 그 사람이랑 대화를 나누고 난 뒤로 마땅히 더럽고 불쾌해야 할 기분이 옅어졌다는 거야.” 털어내듯이 그가 말했다.
은아가 말없이 두 사람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인터넷에서 게이들에 대해서 찾아봤던 거야?” 그녀가 차분함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떻게…?” 도리어 놀란 그가 물었다.
“당신은 성격이 철두철미하지 못하니까. 근래 들어 컴퓨터랑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다른 여자라도 생겼나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여자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당신 컴퓨터 기록을 좀 찾아봤어.”
“아….” 진철은 몸에 있던 열기가 모두 얼굴로 향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체로 대로변을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모직은 왜 그렇게 찾아봤어? 옷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 그녀가 건조하게 물었다.
“….”
그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나를 만졌다는 사람…. 그 사람이 거기 디자이너야.”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
재깍, 재깍, 초침 소리가 오랫동안 거실을 울렸다.
“처음에는…, 그 세계를 알게 되면 명확해질 줄 알았어.” 체념한 목소리로 진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 일반적이지 않은 세계는 더러울 거라고, 이상한 사람들이 득실거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계속 찾아보다 보니까 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이랑 크게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사람인 거야. 사람에 상처 받고…, 아파하고….”
“…. 당신 만졌다는 그 디자이너라는 사람…, 자꾸 생각나?”
이번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미안해. 당신한테도, 우리 정수한테도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그가 울먹이며 토로했다.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평범하게 산다는 거, 쉽지 않구나.” 실소를 터트리며 그녀가 말했다.
“…….”
“쉬운 일이 아니네….”
-
시간은 또 흘러갔다. 두 사람은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다. 진철은 전 날 맞춰두었던 알람 소리에 일어나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와 ‘다녀올게’란 포스트잇을 식탁 위에 붙여두고 회사로 향했고, 은아는 아이가 깨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 아이를 돌보며 함께 밥을 먹고, 틈틈이 청소와 빨래를 하고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같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변한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해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