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CT를 기다리며 I - 유품정리

by distritopersonal

PET-CT 촬영을 기다리며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내 물건을 빨리 정리해야겠다.”였다. 다소 생뚱맞은 이 생각이 든 이유는 2년 간의 투병 끝에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보내드린 후 남편이 겪었던 일들을 목격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남편은 죽음을 애도하고 슬픈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아버님이 남겨 놓으신 짐을 정리하느라 고생했다. 시어머니가 오래 살았던 큰 집을 정리하고 작은 집으로 옮기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남편은 짧은 시간 동안 아버지가 평생 간직하고 사용하던 물건을 정리해야 했다. 혹시나 아버지가 남겨주고 싶었던 물건은 없는지, 의미 있는 물건은 없는지, 행여 중요한 것을 버리는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싶었겠지만 그럴만한 시간은 없었고 그래서 그 상황을 아쉬워했다.


특히 꼼꼼한 성격이셨던 아버님은 요새 유행하고 있는 “하루 기록”을 오랫동안 하셨는데 그 기록의 양이 상당했다. 또 이것저것 모아두신 물건들도 많아서 아들 입장에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읽어보고 소중한 것은 간직하고 싶었을 텐데 그러다가는 1년이 지나도 짐정리가 안 될 상황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지 채 한 달이 안 된 상황에서 나에게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최대한 내 물건들을 정리해야 남은 가족들이 덜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 것이다.


“어떤 물건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가장 먼저 매년 써온 다이어리가 생각났다. 쓰다가 말다가 한 해도 많아서 빈칸도 많은 다이어리가 열댓 권은 될 텐데 가족들이 그걸 그냥 버리기도, 그렇다고 하나하나 읽기도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병원에서 나가자마자 다이어리를 다 정리해서 버리고 꼭 남겨야 할 내용만 정리해서 한 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정리 대상은 그동안 여행지에서 모은 티켓과 기념품들,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에 살면서 사용하던 물건 중 내가 애착을 가지고 지녀온 물건들이었다. 약간의 호더 기절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과거 물건에 애착을 가지고 버리지 못했다. 20세부터 열심히 다닌 각종 공연 티켓, 비행기 티켓, 여행지에서 가져온 안내지도, 그리고 공부하면서 받은 졸업장, 상장 그런 것들이 꽤 있는데 나에게나 추억이지 정리할 가족들에겐 그저 마음 아픈 물건들일 것 같아 그것도 싹 다 버리겠다고 작정했다.


마지막으로 옷과 신발, 액세서리 등도 당장 입는 것이 아니면 나중에 가족들이 최소한으로 버릴 수 있도록 다 정리하기로 했다.


일단 불필요한 물건에 대한 정리가 마무리되면 그 후에는 중요한 것들을 모으는 작업이 중요하다. 내 물건 중 그냥 버리긴 값어치가 있는 물건들 – 좋은 시계, 반지 등을 비롯한 주얼리, 명품 가방 등 – 을 한 곳에 모아서 가족들이 그 물건들만 간단히 체크한 후에 필요한 것만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여기저기 서랍에 흩어져 있는 현금, 상품권, 외국화폐 등도 모아서 보관 위치를 알려주고 얼마 없는 내 재산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결국은 정리의 문제가 선택과 소유의 문제로 확장되어 가는 것을 깨달았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내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물건과 사람)은 무엇인지, 시간이 한정적이라면 나는 어떤 우선순위로 선택해야 하는지...


인생에서의 선택의 기준이 명확해지면서 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인생에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생각 하나가 이렇게도 선택을 용이하게 해 준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소유도 결국은 이와 같은 결정의 결과일 텐데 나는 그동안 왜 그렇게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을까. 안 입는 옷은 왜 그렇게 미련을 가지고 보관하고 있고 죽으면 짐이 될 뿐인 시계, 반지 등은 왜 그렇게도 갖고 싶어 했을까? 다시 보지도 않을 추억의 물건들은 왜 그렇게 버리지도 못하고 국제항공까지 태워서 가지고 왔을까…


가볍게 살다 심플하게 죽는 것이 나에게도 주변에게도 유익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어서 빨리 퇴원해서 집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번외>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