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동안 일을 하면서, 몇 번의 퇴사를 하였는가?
"퇴사는 했지만, 사직서를 써 본 적이 없다”
책상 서랍 안쪽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가, 어느 날 말없이 대표님 책상에 올려놓는다. ‘사직서(辭職書)’ 라고 찍힌 하얀 봉투. 그 안에 어떤 종이가 들어있는지, 그 종이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봉투 앞에 찍힌 세 글자 ‘사직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들과 짧은 대답들. 통쾌한 순간일 때도 있고, 씁쓸한 순간일 때도 있고, 아픈 순간일 때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익숙한 장면이다. 나는 경험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겪은 현실의 순간이다.
이번에 퇴사를 하면서, 생각했다. 20년 동안 일을 하면서, 몇 번의 퇴사를 하였는가? 그동안 퇴사는 했지만, 한 번도 사직서를 써 본 적이 없다. 영화 마케팅 일을 하면서, 나의 고용 형태는 대부분 계약직이었다. 작품 프로젝트로 계약을 하기도 하고, 기간으로 계약을 하기도 하였다.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고 업무를 하기도 하였고, 구두상으로 간단하게 협의를 하고 일을 하기도 하였다. 정규직보다는 작품 프로젝트로 참여한 경력이 많다보니, 사람들은 나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정착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의도하거나, 계획된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작품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한 선택이었다. 경력관리에는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선택이었다. 주위에서 우려도 있었고, 충고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이렇게 일하는 게 좋다고. 자기 만족과 자기 합리화로 방어하면서 지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이, 현재에 충실하게 일만 하면서 지난 시간이 어느덧 20년.
영화 마케팅 업무는 개봉이라는 고지를 바라보며 전력투구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그래도 개봉일은 온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지고 버티기도 한다. 무사히 개봉을 한 뒤, 잠시나마 숨을 돌린다. 지친 심신을 조금 추스리면, 또 다른 바퀴가 개봉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염없이 굴러간다. 내가 멈추기 않으면 계속 맞물려굴러가는 톱니바퀴다. 이제는 내가 임으로 멈춰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갑자기는 아니다. 작년부터 꾸준히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렇게 퇴사를 결심했다.
난 또다시 퇴사를 준비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 인생에서 퇴사는 마지막이다.
모든 일과 과정에서 타이밍은 중요하다. 퇴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특히나,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는 더더욱. 사직서를 쓰는 공식적인 절차는 없다. 나의 사직서는 서면이 아니라, 대면이다. 언제 대표에게 얘기하는 게 좋을 것인가? 업무 상황을 본다. 대표님 미팅 일정을 신경 써서 확인한다. 컨디션도 살펴본다. 나 혼자,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해 본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면, 점점 조급해진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면 안 된다. 난 계획대로, 퇴사에 대한 의지와 결심을 잘 전달해야 한다. 수시로 마음을 다잡으며 자기 최면을 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들 서둘러 퇴근을 한다. 나는 조금 더 마무리할 일이 있다며, 괜스레 책상을 정리한다. 혼자 계신 대표님 방에 들어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저, 다음 달까지만 일했으면 해요”
“너무 갑작스러운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작년 말부터, 생각하고 고민하고 했어요”
“그만두고, 무슨 계획이 있어요?"
퇴사 의향을 밝힌 한 마디가 나오면, 그 뒤로는 면담처럼 짧은 문답이 오고 간다. 회사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직이었다. 최근 업무 상황에서 문제는 전혀 없었다. 업무가 너무 많아서 불만이거나, 스트레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한 업무 환경이었고, 이제는 편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년부터 퇴사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내일, 작년과 다를 바 없는 내년. 그런 시간들은 더 이상 쌓이지 않는다. 흘러간다. 그러면서 나만의 내일, 나만의 내년에 대한 계획도 그냥 같이 흘러간다. 이렇게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행동에 옮겼다. 퇴사에 대한 갈망이 시작되면, 나의 추진력은 그 무엇보다 빠른 편이다.
그렇게 나는 마음속에만 담아둔 퇴사를 상상이 아닌, 현실로 만들었다. 말을 꺼내기 힘들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점차 현실이 된다. 나만의 달력에는 퇴사일이 체크되고, 마지막을 향해 마무리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생각해본다.
끝과 시작, 퇴사는 새로운 시작이다.
끝이 있으면 또 다른 시작이 펼쳐진다.
“어디로 이직하는 거예요?”
“무슨 계획이 있는 거죠?”
“지치셨구나, 좀 쉬고 다시 오세요”
익숙하게 듣는, 주위의 반응들이다. 이직할 곳도 없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다. 그렇다. 이제 나이도, 경력도 넘쳐나는 지금 이 시점. 어찌 보면, 대책 없는 결정이다. 나의 퇴사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다. 다음 스탭을 위한 잠시 멈춤이다. 나같이 단순하고, 속이 뻔히 보이는 사람은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구상을 한다는 건 불가능이다. 그래서 난 단순 무식하지만, 순차적인 선택을 했다. 우선 지금의 회사에서 매듭을 짓는다. 끝과 시작. 끝을 내야지 무엇이든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 마케팅 업무를 20년 가까이하였다. 매 작품마다 개봉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고,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쌓여갔다. 영화를 보다 흥미롭게,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을 하고, 콘텐츠를 만들고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작품을 소개하는, 감독과 배우를 소개하는 글을 끊임없이 작성하였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뀐다. 그렇게 지구가 태양 주변을 공전하듯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퇴사를 했고, 공전을 잠시 멈춘다. 이 회전축을 바꾸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이제, 나를 위한 회전축을 세워본다. 나를 위한 독립을 준비한다.
나의 독립 일지는 이렇게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