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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Aug 20. 2023

어떤 분노

힘없는 분노는 무력감의 다른 이름이다.

오늘따라 늦게 퇴근한 그는 집으로 향하는 발길을 서둘렀다. 집에서 기다릴 아내와 아이들 생각에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에 거의 다 와서 버스에서 내린 그는 조급한 마음에 길을 건너기 위해 아직 보행 신호등의 녹색불이 깜박거리는 건널목으로 발을 내디뎠다. 잠시 좌우를 살피던 그는 다가오는 차가 없음을 확인하고 급하게 도로의 중앙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순간 갑자기 어디에선가 나타난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그의 발을 그대로 도로 위에 붙잡아 버렸고, 그는 다가오는 불빛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부신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면서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에게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에 그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바로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빨리 피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달려오는 차를 바라보면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사람을 볼 때 왜 빨리 피하지 않고 저렇게 서 있을까? 하는 답답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정작 그 자신이 그런 경우와 마주하다 보니 그런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부터 발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차량을 피해야 한다는 두뇌의 판단은 그저 머릿속에만 머물고 있었고, 실제 두 발을 움직이도록 하는 신경계를 통한 지령은 일시에 멈춘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는 길 한가운데서 눈이 감겼다. 생각보다는 아주 미세한 충격이 그를 흔들었으며, 그 후의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얼마 만인지 모르게 긴 시간이 흐른 후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이 어느 병원의 침상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의 부상이 점차 회복되어 간다는 증상은 아니었고, 그저 숨만 붙어있는 정도였다. 그가 완쾌해서 일어날 수 있을지는 의료진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뺑소니 교통사고의 희생자였던 그가 눈을 뜬 것은 사고가 난 후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를 친 차가 사경을 헤매는 그를 그대로 내버리고 달아났다는 사실도 그 후에 알게 되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이십 대 중반의 젊은 여인이었고, 그녀는 사고 직후 겁에 질려서 그대로 달아났다가, 경찰이 현장 주변의 CCTV 화면에서 찾아낸 차량 번호 덕분에 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원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녀는 국내 굴지 대기업 회장의 손녀로, 유학 중이던 외국에서 잠시 귀국하여 모처럼 방학을 집에서 보내는 중이었고, 사고를 낸 그날은 친한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함께 즐기다가 집으로 가던 길에 그를 친 것이었다.

      

문제는 사고 직후 경찰에 붙잡힌 그녀의 음주 측정 결과가 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수치였음에도, 신원이 확실하고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일시 귀가시켰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게 되면서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음주 운전자에게 관대한 나라라는 인식이 외국까지 알려진 차에, 음주 사고의 피해자가 아직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단지 신원이 확실하다는 이유로 추후 소환해서 조사하겠다며 귀가시킨 것은 누가 보아도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않은 처분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신원이라는 것이 대기업 회장의 손녀였기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국민은 분노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신분이었어도 그런 처분을 했을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대부분 의견은 경찰이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을 했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더군다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해자는 변호인단의 뒤에 숨어서 피해자에게 직접 어떤 사과의 의사도 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결국 피해자가 사망에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결과는 가해자에게 또 한 번의 관대한 처분을 보장할 것이다. 초범에, 반성문도 법원에 제출하고, 피해자에게 충분하게 보상했고, 처벌 불원의 합의서를 제출했다는 등의 상황을 참고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것이다. 피해자는 병원에서 퇴원도 하기 전에 가해자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일반 국민은 잠시 분노하다가 잊을 것이며, 국회에서는 사고 예방과 처벌 강화를 운운하는 법률의 개정을 논의하다가 슬며시 발의된 법안을 폐기할 것이다. 이런 전철을 수없이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이 정도는 심하게 비유해서 거의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녀에게 그런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많이 보상받고, 치료를 완벽하게 끝낸다고 해도 그의 몸이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사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법에서 허용하는 최대한의 관용을 받아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왜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으로 인해서 그의 가족이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징역형 실형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음에도 재판부에서 마음대로 그녀에게 관대한 형량을 선고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돈이면 안 되는 일은 없다고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가족은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그녀가 제시하는 막대한 금액의 합의금과 향후 발생할 수도 있는 사후 치료비 전액의 대납을 보장하겠다는 합의서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론은 그의 편이었고 그녀를 강하게 비난했지만, 그런 비난이 그의 가족에게 현실적으로 확실한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어차피 남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론에 편승해서 그저 적당히 분노해 주었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냥 잊고 마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였다. 그들에게 그의 가족은 가족도 아니고 친척이나 친구도 아니었다. 그저 불합리한 사회문제에 관한 이슈를 불러일으켜 준,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무리 그의 편이 되어 준다고 해도, 정작 당사자인 그는 가해자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합의금은 받고 그의 편에서 분노해 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면서 돈 앞에 굴복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사회 정의를 위하고 피해자를 생각한다는 위선적인 분노였을 뿐이다. 그런 행동이 더욱 그의 가족을 화나게 했다.  

   

결국 그의 가족은 그런 일시적인 대중의 위선적 분노가 그의 가족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행위라는 생각에, 현실적인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 측과 합의서에 서명하고 병원으로 돌아오던 아내는 병실을 지키던 아들로부터 기어이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글은 단행본으로 출간한 "초여름의 기억"에 실린 글이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937928&start=pnaver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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