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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Feb 01. 2024

변명

결국 내가 오랫동안 윤주를 짝사랑해 왔다는 소문이 친구들 사이에 퍼졌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 주위에서 나와 윤주 사이의 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남사친과 남자 친구 사이의 관계에서 오르락거리며 조바심을 낸 지가 과연 얼마 만이던가. 어린 시절에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위의 사람들이 남과 여라는 거대한 군락에서 싱글과 커플이라는 구조로 관계의 변화를 이루어 가는 동안 나는 윤주와 그 어떤 관계의 변화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윤주가 나를 멀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나에게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도는 딱 거기까지였지만 말이다.

     

윤주는 무슨 일만 생기면 나를 불렀다. 집안에 윤주의 부모님도 계시고, 오빠와 남동생도 있었지만, 항상 윤주에게 일어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어느새 나의 임무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윤주는 나를 신뢰했고, 나 역시 그렇게 나를 믿어주는 윤주가 고마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밖에는 없었다. 그 정도로 윤주의 곁을 정리할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그동안 몇 번에 걸친 결별의 위기에서 내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십 대 초반의 풋풋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청춘의 계절은 이미 한참 앞으로 달아나 버렸고, 문득 되돌아보니 우리도 어느덧 서로에게는 삼십을 훌쩍 넘은 나이의 성별이 불분명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윤주에게 나는 그저 주위 여자 친구들과는 생긴 모습만 조금 다른 또 한 명의 여자 친구였을 뿐이었다. 물론 내가 나의 마음을 윤주에게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윤주는 이런저런 핑계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나에게서 빠져나갔다. 나는 그런 윤주가 간혹 얄밉다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이제야말로 정말 윤주 곁을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윤주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윤주야, 이제 우리 관계를 조금은 정리해야 할 것 같지 않니?” 어느 날 늦은 시간에 둘이 마주 앉은 찻집에서 내가 물었다. “응. 뭘? 정리하기는 뭘 정리해? 그만 만나자고?” 윤주는 짐짓 딴청을 피우면서 되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붙어 지낸 지가 벌써 십오 년이 지났잖아.” “그런데?” “그런데 라니? 몰라서 물어?” “응, 난 모르겠는데?” 윤주는 또 화제를 돌릴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매번 그랬으니까 말이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혹시 우리 남자 친구, 여자 친구 뭐 그런 거, 그런 사이니?” “아이, 답답해 죽겠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 지금 우리 친구잖아. 친구도 아니면 이 밤중에 왜 둘이 이러고 있겠어?” 여전히 윤주는 이렇다 할 뚜렷한 대답을 피했다. 나는 정말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대화할 수 없었다. 나도 남들에게 윤주가 내 여자 친구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윤주가 계속 저런 태도라면 이제 우리의 사이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윤주야. 우리 이제 이런 놀이 그만하고 정식으로 사귀자. 남들처럼 연애하는 거야. 나는 그러고 싶다. 너는 어때?” 결국 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 말을 들은 윤주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나는 윤주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했다. 물론 지금까지 윤주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단번에 좋다는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윤주의 대답에서 긍정적인 표현이라도 낚아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윤주의 대답은 나를 다시 한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사귄다느니 뭐니 하는 것도 지금 이런 사이와 다를 것도 없지 않아?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보고 싶으면 보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너는 꼭 그렇게 관계를 정해 놓고 나를 만나고 싶어? 내가 너를 남자로 봐주길 원하는 거야?” 윤주의 대답은 나에게 더 이상 말문을 허락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야말로 윤주와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 놓여 있음을 느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윤주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마무리가 될 관계였다면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는 편이 옳은 것 같았다. 윤주는 그 후에도 종종 나를 불러 젖혔지만, 나는 그렇고 그런 핑계로 윤주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자주 얼굴을 보면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것만 같았고, 윤주를 멀리해야 하겠다는 나의 마음도 자꾸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윤주를 짝사랑했다는 소문은 이내 수그러들었고, 윤주는 다른 친구들과 그저 그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 봐야 다른 친구들은 이미 커플투성이가 되었는데, 그 사이에서 싱글인 윤주가 어떻게 버틸지는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또 흘렀다. 



         

“뭘 그렇게 생각해?” 커피잔을 사이에 놓고 잠시 옛 생각에 빠져 있던 나에게, 어느새 머리카락이 희끗해진 윤주가 물었다. “응, 아무것도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말해봐. 응?” 윤주의 재촉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한참 전에 내가 너랑 사귀자고 했을 때, 네가 싫다고 하고 우리 잠시 헤어졌잖아? 그때 생각했지.” 그러자 윤주도 생각이 나는지, 눈을 곱게 흘기면서 웃었다. “아무리 내가 그렇게 말했어도 무슨 남자가 그랬어? 그래도 내 옆에 있었어야지. 내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너로부터 가기는 어딜 가겠니?”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나를 괄시하래?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말이야. 하하하.” 나는 웃으면서 윤주를 놀렸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우리 앞에 놓인 아침 햇살과 따듯한 커피 향이 잠시 지난날을 불러주었다.  




마지막 문장을 끝마친 진수는 파일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소설이 아니었다. 누가 읽어 보더라도 소설가 본인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것이다. 물론 당연히 진수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읽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수를 만날 때마다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놀려댈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진수가 아니냐고? 그리고 여자 주인공 윤주는 진수가 혼자 마음에 두고 있는 지혜가 아니냐고 말이다. 이래서 소설가는 로맨스 근처에 가는 소설은 쓰기 힘들다. 결코 사실이 아닌 허구임에도, 읽는 사람은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지레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우려는 뒤집어 말하면 그렇게 읽어달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수가 다른 쟝르에 비해 유독 로맨스 소설을 창작하지 못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진수는 이번에도 로맨스 소설 쓰기에 실패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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