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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Feb 04. 2024

환각

과연 어느 것이 나의 진짜 삶인가?

“당신 뭐 하고 있어?”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나에게 주방에서 나오던 아내가 물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 여자는 나의 아내가 아니다. 나는 결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여자와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내가 그녀를 아내라고 칭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녀 스스로 자신이 나의 아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에 점점 그녀의 말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그냥 나도 그녀를 나의 아내라고 믿고 지내는 편이 덜 혼란스러울 것 같아 그냥 지내고 있을 뿐이다.

     

“응, 아무것도 아냐. 그냥 밖에 내리는 눈을 보니 옛날이 생각나서 그래.” 나는 그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긴 내가 어떤 기억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 여자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원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내가 아는 내용과 이 여자가 아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가 나와 다른 어떤 사람을 혼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에 대해서 나와는 전혀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여자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 확실히 여자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맞다.


우리는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번듯한 부부 행세를 한다. 같은 집에 살면서 서로에게 최소한의 동거인으로의 의무만 이행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표현이고 그녀는 정말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살가운 아내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다. 보통의 부부처럼 함께 거의 모든 일상을 보낸다. 심지어 우리는 잠을 잘 때에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자고, 남들처럼 정상적인 부부관계까지도 자연스럽게 즐긴다. 정말 부부가 맞기는 한 것 같다. 그저 아이만 없을 뿐이다. 여자가 나의 아내가 아니라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상상인지도 모를 정도로 우리는 자연스러운 부부다. 내가 그나마 여자를 나의 아내로 인정해 주는 척하는 이유는, 여자가 예뻐도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여자가 나의 아내가 아니라는 생각만 떨쳐 버린다면, 정말 나무랄 데가 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이다. 여자와 부부관계를 가질 때만큼은 지금의 생활이 거짓이라고 믿는 나의 믿음이 오히려 거짓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도 많았다.

     

물론 내가 이런 관계를 파헤쳐서 진실을 찾고 관계를 정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옆에 나의 아내라고 하면서 나타난 여자를 내가 그냥 인정하고 함께 살아오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나도 할 만큼은 해 보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고, 그녀는 물론 다른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내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진실을 밝히는 일을 거의 포기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여자도 처음에는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대하더니 내가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잠시 덮고 나서부터는 다시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다. 여자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꼭 지금의 일상이 거짓 일상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야 말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는 여자에게 나의 이런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잘 감추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마음을 들킨다면, 예전처럼 나를 무슨 정신병자 보듯이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어차피 나중에 가면 내 생각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과연 내가 정신이 이상했던 것인지? 아니면 여자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 정신이 이상했던 것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질 것이다. 

    

여자는 이제 잠자리에 들자면서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평상시처럼 그녀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여자가 옆에 누워서 내 팔을 베고 내 배에 그녀의 다리를 올린다. 항상 취하는 자세인데, 이렇게 누워야 잠을 잘 잔다. 하긴 언제나 먼저 잠이 드는 쪽은 나였으므로, 여자가 잠을 잘 자는지는 사실 모른다. 그저 아침에 나보다 먼저 눈을 뜨는 법이 없었으므로 잠을 잘 잤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난다. 나의 거짓된 하루가 또 지난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지속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이런 나의 생활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내가, 결혼한 적도 없는 내가 지금 이런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받아들일 수 없다. 언젠가는 원래 나의 인생을 되찾고야 말 것이다. 그런 날이 언젠가는 꼭 올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만일 이런 생활이 거짓된 생활이라면 이 여자는 왜 나와 부부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무슨 공작도 아니고 나 같은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과 이런 생활을 가장해야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주위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자만큼은 나에게 거짓 인생을 강요하는 만큼 자기의 인생도 거짓으로 점철될 것 아닌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인생인데,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 한 번뿐인 인생을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고 나와 부부인 척하면서 지낸단 말인가? 그 점이 바로 내가 풀지 못하고 있는 수수께끼다. 만일 내가 노력한 결과로 지금의 생활이 거짓된 것임이 밝혀지고 그녀와 내가 서로 남남이 되어 헤어진다고 하면, 나와의 생활에서 그녀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결국은 나의 거짓된 일생이 그녀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아무튼 지금은 이제 잠에 들 시간이다. 어차피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길고 힘든 작업이 될 것이므로,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어제처럼 나의 아내를 자처하는 이 여자를 끌어안고 잠자는 일만 남았다. 이제 꿈속에서라도 지금의 생활이 있기 전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고 싶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되찾을 나의 인생을 꿈꾸며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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