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수필집을 한 권 주문해서 읽었다. 원래는 우하 박문하 선생의 글을 읽고 싶어서 책을 찾았던 것인데, 몇몇 수필집은 이미 절판되었고 그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책으로 정한다는 것이 작고하신 5인의 의사 수필가가 쓴 글을 모은 책 ‘잃어버린 동화의 추억’ (도서출판 재남, 2015)이다. 이 책에는 박문하 선생을 비롯하여 최신해, 이장규, 빈남수, 김사달 5인의 수필 총 41편이 실려 있다.
다섯 명의 의사 수필가는 작고하신 해는 각자 다르지만, 1928년부터 1928년 사이에 태어나서 일제 강점기의 시기를 보냈다. 박문하, 김사달은 독학으로 의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주로 부산, 대구, 포항 등지에서 의사로 근무하면서 수필가로도 활동했다. 다섯 분 저자가 개인적으로 각각 수필집을 출간하긴 하셨지만, 이 책에 수록된 수필들에는 예외 없이 일제에 대한 강한 분노를 적절한 수준으로 순화해서 그리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의사로서 인명에 대한 의무감과 문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양심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신념 또한 글의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느 글은 단순한 일상 수필처럼 가볍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또 어느 글은 나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도 있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은 단독 저자의 책인 것에 반해, 이 책은 저자가 다섯 분이므로 우선 간단히 저자에 대한 소개를 한 후에 각 작품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을 몇 개 소개하겠다.
박문하는 부산 동래 사람이다. 아버지는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뒤 비통을 참지 못하여 자결했고, 박문하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형과 누나는 모두 광복 항쟁과 역사의 격랑 속에 세상을 떠났다. 특히 누나 박차정은 여자 의용군 대장으로 34세의 나이로 순사한 집안의 막내였다. 후에 독학으로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했으며, 부산에서 민중병원을 개원하였다. 간암으로 58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정신의 심층 속에서 우러나는 인간의 병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병 자체가 곧 인간 그것일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인간의 병을 어찌하여 단순한 진통제나 소염제 정도의 약으로써 나아질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인간의 병을 진료하기 위해서는 그 병의 주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 그 자체의 관찰과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의사와 문학 중에서)
박문학은 문학이 의학에 연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갖고 있는 의학의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신해는 울산 출신으로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아들이다. 미국 유학파 의사로서 후에 국립 청량리뇌병원의 원장으로 재직했다. 의료 문인 단체인 ‘수석회’와 ‘박달회’를 만들어서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일 국교를 맺는답시고 왜놈 중의 몇몇 놈이 ‘잘못했다. 후회한다’고 가벼운 입을 놀렸다고 해서 전체 왜놈들이 한국인에 대한 잔인한 침략근성과 과거의 만행을 뉘우치고 있다는 증거이니 우리도 숙원을 잊고 선린해야겠다는 한인이 있는 모양인데, 당장에라도 청량리뇌병원을 찾아와서 지능검사부터 받아야 좋을 것 같다.” (앙칼진 숙적 중에서)
최신해는 이처럼 자신의 전문 분야인 뇌과학을 슬며시 동원한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장규는 대전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원자력 병원장을 역임하였고, 간결한 필치로 풍자와 해학을 담은 수필을 많이 남겼다. ‘외상 진찰’에서는 정부 관료를 날카로운 재치와 유머로 비판하기도 했고, ‘사깃니’에서는 “코끼리발만한 그의 손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입술은 터져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예쁜 간호원 아가씨가 꼭 쥐어주는 그 따듯한 손길만 없었다면 아마 틀림없이 기절했을 것이다. 간호원 아가씨의 손길은 실오라기 하나로 내 아픈 이를 뽑아주셨던 어머니의 그것과 상통하는 것이었다.”라고 못 견디게 아픈 치과 처지의 순간을 재치 있는 유머로 그리고 있다.
빈남수는 경남 사천 출신이다. 대구 의과대학과 미 공군병원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상주 적십자병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문인협회 포항지부를 결성하고 지회장으로 활동했다. 1969년 문예지에 ‘상처후유증’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수필을 썼다.
“그 삼층장은 아내의 사진이며 아내의 얼굴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보고 싶으면 아무도 모르게 대전으로 훌쩍 떠나는 것이다.” (회억의 삼층장 중에서)
“나는 낙방의 소식을 듣고 다소 마음이 흔들렸지만 내가 중심을 잡고 아들을 위로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뒤돌아섰다.” (재수생의 고배 중에서)
“그래도 아들이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고 가슴에 대니 안심이 되시는지 괴로운 표정 속에서도 웃음을 지으신다. 병원은 하루 비었더라도 헐레벌떡 아내와 같이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든 청진기보다 아들의 얼굴이 더 보고 싶었던 게다.” (망각의 이방 지대 중에서)
빈남수의 작품에서는 이처럼 은근한 가족애가 담겨 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고령의 연로하신 부모님을 뵙는 모습에서 그려지는 가족애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게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오늘도 구르몽의 시구를 읊으며 낙엽을 밟고 거리를 거닐면서 가는 가을을 아쉬워한다” (낙엽을 보며 생각한다 중에서)라고 낭만적 분위기를 즐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김사달은 독학으로 의사, 서예가, 문필가로 대성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서울에서 박애병원을 개업하였고, 능력이 남달라서 당시 전서하면 독립기념관 현판을 쓰신 일중 선생님이었고 초서는 김사달 박사라는 말까지 있었다. 수필집을 5권 내셨고, 많은 책과 논문을 남겼다.
“다만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남자는 이른바 물건의 용모와 자태가 예뻐야 하겠다는 것을 한결같이 소망했고 다만 아둔하지만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여자는 잘생기고 험상궂은 것쯤으로는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고 했고, 학문의 여부와 먹이를 구하는 능력을 중요시한 점이다.” (선택 중에서)
“다리의 노출이 심하면 심할수록 에티켓에 신경을 써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보곤 한다. 자기 집에서, 사무실에서, 초대석에서, 극장에서, 야외에서 조심성 없이 앉아 있을 땐 보기에 민망스럽다.” (족지절 중에서)
이처럼 수필가의 눈으로 본 시대적 풍경에 대한 유머를 동반한 풍자의 글도 즐겼고, ‘나의 수필적 경험론’에서는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형식 없는 글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곤드레가 된 치한처럼 아무렇게나 써버린 넋두리가 되어서는 수필이랄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수필을 쓸 때에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명상을 하며 쓰는 버릇이 있다.”
“모름지기 직업인의 수필은 그것대로의 구미와 감칠맛이 있어야 하겠다. 생명과학을 다루는 의사들의 수필은 솔직 간결해서 산뜻한 멋이 있다. 너절한 수식을 주렁주렁 달고 살을 억지로 끌어다 붙인 수필을 읽노라면 역겨울 때가 있다.”
라고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자세에 대해서 일침을 놓는다.
한국 의사수필가협회 초대 회장인 맹광호 님은 축사에서 “이 같은 의사들의 인문학적 수필 쓰기가 의사의 삶을 좀 더 유연하고 보람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의사-환자 관계를 개선해서 환자 진료에도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주게 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입니다.”라고 의료인의 수필 쓰기에 대한 의미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사실 처음으로 수필집을 읽은 소회는 이렇게 몇 글자의 리뷰로 대신할 수 없으나, 그래도 이번 독서를 통하여 수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만족스러운 독서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