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흔 May 13. 2024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송지현 작가의 소설집을 읽었다.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난 송지현은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펑크록 스타일 빨대 디자인에 관한 연구>가 당선되면서 등단했고, 소설집 <이를테면 에필로그 방식으로>,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와 산문집 <동해 생활>을 출간했다. 제6회 내일의 한국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어딘가 모르게 다른 소설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이어지는 옴니버스 스타일 같은 소설 7편과 신춘문예 당선작인 <펑크록 스타일의 빨대 디자인에 관한 연구>가 실려 있다. 얼핏 보면 작가의 소설은 모두 무슨 이야기인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간간이 보이는 가족 이야기가 테마인 것처럼 생각되다가도, 뜬금없는 성장통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생각을 일일이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작가의 현란한 설명과 묘사가 줄을 잇는다. 사실 이런 종류의 작품에 나는 그다지 친근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을 한 편 한 편 넘길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글자 형태의 묘사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 내면의 심리에 누가 강요하지도 않은 공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느끼면서 화들짝 놀라곤 한다. 

     

‘선인장이 자라는 일요일’에서는 평범한 사춘기 딸의 성장통을 그리고 있다. 흔히 성장에 따른 고민을 묘사하는 장면에는 손목을 긋는 자살 시도가 흔하게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녀의 성격과는 정반대인 소녀의 동생을 등장시킴으로 언니의 성장통에 대한 반론을 슬며시 던져놓는다. 과연 사라지는 것이 존재를 확인시키는 방법일까? 누구도 답은 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좀비 아빠의 김치찌개 조리법’에서는 다소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좀비化한 아빠와의 공존을 통한 가족애를 그리고 있다. 좀비가 되는 것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가족에게 보험금을 남겨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아빠의 모습에서 공연한 우울함이 마음을 울렸다. 죽고 싶어도 이미 죽은 상태에서 다시 죽을 수도 없고, 물론 그렇게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활동이 아주 정지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죽어도 죽은 것 같지 않은 좀비는 이제 결국 죽음의 의미조차 상실하고 만다.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는 청소년기를 거치며 성장하는 청년들의 성장 일지이다. 흔히 사람들은 지나 보면 다 안다고 말하곤 하지만, 미처 지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성장 이야기이다. 그다지 존재감 없는 청년들은 각자 자신들의 길을 가면서도 함께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 흔히 몰려다닌다고 하면 좀 어울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기들 사이를 끈끈하게 잇고 있는 그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계획하는 모습에서도 틀림없이 자신들의 의도에 걸맞은 멋진 영화가 탄생할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역시 그 계획은 불발이다. 역시 사람의 일이란 지나 봐야 아는 것임이 분명했다.

    

탐정과 조수 오소리의 이야기를 소재로 엮은 세 편의 소설은 의뢰받은 사건의 실체를 조사해서 해결해야 하는 탐정과 조수가 오히려 적당히 현실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의뢰자의 시각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하여 사건 해결의 의미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건이 발생했으면, 그 원인이 있을 것이고 남겨진 증거를 따라가면 결국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탐정 수사의 기본을 저버리고 그저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통해 엉뚱한 사회의 단편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볼 때, 나도 모르게 피식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흔한 가정식 백반’과 ‘구석기 식단의 유행이 돌아올 때’와 같은 작품 역시 평범한 소재라고 볼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여성 전용 사우나에서 만난 여자 넷이 여행을 계획하면서 일어나는, 별 쓸모없어 보이는 대화의 나열에서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떠올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동거 중인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가족의 형태와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이런 종류의 작품에서 조금은 불만인 점은 작가가 아주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넣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긴 하지만 간혹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지금 어디쯤에서 어떤 글을 읽고 있는지 모른 채 눈만 글을 쫓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모습은 정말 싫었다. 

     

요즘 내가 읽는 작품은 거의 단편소설들이다. 이유는 첫째로 내가 소설을 쓰다가 거의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 다른 작품들은 어떤가 하는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한 작가가 쓴 여러 편의 단편을 읽다 보면 그 작가의 작품관이랄까? 뭐 그런 종류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소설 읽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이번 송지현 작가의 작품은 양면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편안한 소재와 문체로 독자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 반면에, 평범한 어휘의 집합에 불과한 소설일지라도 그 안에 곱씹어서 생각해 보아야만 눈치챌 수 있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심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첫 번째는 편하게 읽고, 두 번째는 조금은 깊이 생각하며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소설을 만났다. 아마 함께 대출한 같은 작가의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까지 다 읽고 나면 송지현이라는 작가에 대해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