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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Aug 13. 2024

첫사랑이었나?

어제가 입추立秋였었나? 이제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낸다. 아니, 차라리 날이 가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편한 것을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붙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젊었던 시절, 나이 든 어른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그냥 쉬엄쉬엄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살아도 충분하다는 말을 내가 편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경멸했다. 그렇게 대충 인생을 살아왔으니 지금 그 모양이 아니냐? 그렇게 가진 것 하나도 없이 궁색하게 사는 것이 좋으냐? 그랬다. 그렇게 그들을 비웃었지만, 오히려 어리석었던 쪽은 나였다는 사실을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과연 맞는 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순히 근면, 성실함을 가르치려는 뜻이라면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교훈은 아닐까? 

     

철없던 시절의 첫사랑이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의 순수한 마음이었으려나? 그저 마냥 좋기만 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첫사랑이라고 했던가? 누가 그랬단 말인가? 그 말을 비웃으며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게 남들 다 하는 예쁜 사랑을 하며 자라서 나중에 성인이 되면 당연히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그녀 손으로 직접 건네진 청첩장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신랑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친구의 이름이 적힌 그 청첩장을 그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나에게 내밀었다. 친구도 아닌 그녀가 나에게 친구와의 결혼을 통지하다니. 나는 친구가 갑자기 비겁하게 보였다. 왜 그녀를 앞세운 걸까? 나에게 직접 결혼 소식을 전하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나? 항상 같이 지내면서도 그런 내색은 일절 하지 않았던 친구답게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내 인생에서 데리고 나가버렸다. 

     

놓쳐버린 사랑이 더욱 애달픈 법인가? 아니면 그녀와 나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던가? 뒤늦은 회한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은 그러면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나? 그러고 보니 내가 그녀에게 과연 사랑한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나?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서 나와 그녀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반대로 그녀는 나를 그냥 친구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무엇 하나 확실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나의 인생에서 멀어졌다. 당연히 친구와의 우정도 그녀와 함께 떠나가 버렸고, 나만 홀로 남았다. 

     

못난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었다. 자발적 은둔형 외톨이인 양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다. 그 대신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그저 일상의 번뇌를 잊는 데에는 일에 미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필요 없었다. 최소한의 끈만 유지한 채 내 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도 누리지 못하고 삽 십 대를 보냈다. 가끔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고작 사랑에 차인 비련남의 처지가 무슨 위세라도 되는 듯 혼자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주위의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최소한 완벽하게 잊었다고 믿었던 그녀로부터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친구는 그녀와 한 명의 아이를 남기고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나로부터 그녀를 데려갔으면 나에게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일찍 그녀의 손을 놓을 거라면 도대체 왜 그렇게 그녀를 데리고 갔을까? 떠난 친구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아니, 나의 그런 마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친구의 손을 잡았던 그녀가 지금의 시점에 왜 나에게 전화한 것일까? 나의 손을 먼저 놓은 쪽은 그녀였지 않은가? 이제 다시 잡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다시 손을 잡는 것이 옳은 결정일까? 겨우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내 인생에 다시 작은 돌이 하나 던져졌고, 돌이 닿은 마음속 한 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동심원이 온몸을 감싸 안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후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남들은 내 기억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나의 기억은 전혀 문제가 없다. 그냥 그들의 말일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녀와 함께 있었고, 품에는 친구의 딸을 안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돌고 돌아서 결국 첫사랑을 이룬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녀에게 나는 어떤 친구였을까? 나에게 전화를 거는 손놀림은 과연 가벼웠을까? 정작 내가 전화를 받으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겠다는 각본은 있었을까? 그 각본에는 내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고려는 있었을까? 모르겠다. 

     

혼자 있을 때보다는 손에 쥐어야 할 것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든 줄을 몰랐고, 많이 쥐면 쥘수록 나에게 더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녀를 다시 만난 이후 사십 년 넘게 그녀가 기댈 어깨를 내어주었지만, 어깨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녀와 딸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게 되면서 점점 지난 기억은 나의 뇌리에서 아주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기억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이제 쉬고 싶다는 나의 의지에 따라 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타의로 손을 놓아야만 할 때가 가까워짐을 느낀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편안한 삶이라는 사실을 이제 뒤늦게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창밖 하늘이 오늘따라 맑다. 서서히 졸린다는 생각이 들 즈음 옆에서 낯익은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르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이제 좀 누워서 쉬실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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