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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Aug 28. 2024

소설을 쓰며

항상 고민을 한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는 불과 이 년 남짓이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한 한 톨의 지식조차 없는 기반에서 글을 끄적였으니, 그간의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음은 특별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당연히 소설도 아닌 글을 뭐 하러 쓰고 있냐는 혹평도 있었지만 꿋꿋하게(아니, 어쩌면 미련하게) 나만의 글을 써오고 있다. 간혹 소설 쓰는 법이라도 책에서 배우거나, 혹은 문학 강좌에서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꾹 참고 그 시기를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 훈련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그리는 이야기들을 잘 쓰건 못 쓰건 글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데, 글을 쓰는 법은 배워서 무엇할 것인가 하는 나만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럴수록 더 처음부터 제대로 된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논리가 완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글쓰기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다. 건방지게 끄적인 글을 온갖 공모전에 투척하고, 매번 낙방하는 일과를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브런치 플랫폼에 글을 올리며 구독자들의 반응을 살피고, 혹시 사라질지도 모르는 나의 초기 작품들을 모아서 종이책으로 출간하기도 하면서 계속 혼자만의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그렇게 글쓰기를 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지만, 알고 보면 엄연히 다른 생각이다. 이전에 했던 생각은 독자가 자꾸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와 주인공을 동일시하려는 경향 때문에 작가가 자신의 평소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주인공의 성격을 설정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소설가는 경험과 기억을 파먹고 사는 직업이라서 그런지, 조금만 성격이 이상한 주인공을 앞세워도 혹시나 하는 의심을 받는다. 이거 작가의 이야기 아니야? 에서부터 극단적으로는 작가가 이런 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성격파탄자네? 뭐 그런 세평이 두려워서 튀는 성향의 주인공을 창조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물론 나부터도 그런 증후군에 빠지곤 한다. 주인공은 작가야.라는. 하지만 이 논거를 부정하기에는 지금까지 있어 온 수많은 문학 작품 중에 이런 범주의 소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전혀 부정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진정한 창조적 인물관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요즘에 와서는 또 다른 고민이 떠오른다. 소설의 문체와 형식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소설을 읽다 보면 어떤 작품은 비유와 묘사로 가득하고, 또 어떤 작품은 해설과 설명으로 가득하다.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제 무덥던 여름이 가고 있다.’라는 문장과 ‘늦여름 내내 하늘을 떠돌던 고추잠자리가 저만치 앞에서 함께 가자며 뒤처진 여름을 부르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치자. 처음 느끼기에는 글자 수의 차이가 보인다. 두 번째로는 해설과 설명, 묘사와 비유, 뭐 그런 표현의 차이도 보인다. 그렇다면 소설 전반에 걸쳐서 모든 문장의 형식에서 위와 같은 차이를 보이는 작품이 있다고 치자. 과연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 누가 장담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아, 물론 이런 고민은 소설을 주제나 구성하는 요소, 그리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플롯의 전개 등 모든 부분은 같고 단지 문장의 표현 방법만 다르다는 전제 하의 고민이다. 나는 지금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문학적으로 나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 지낸다. 내가 여러 번의 공모전에서 낙선한 이유도 이런 기본적인 부분에서 훈련이 덜 되어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소재가 좋고, 참신하면 뭐 하겠는가? 줄거리 진행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읽듯 그렇게 설명형으로 일관하면 당연히 점수를 받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문학 장르별로 작품을 발표하기 위한 공간에서 요구하는 분량이 있다. 하다못해 별 시답지 않은 공모전에도 그런 기준을 강요한다. 별것 아닌 거 같아도 집필을 끝낼 때쯤 되면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글을 쓰면서 문장의 길이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완결하고 수정할 때도 신경이 쓰인다. 아무튼 그렇다. 물론 분량 고민은 그나마 큰 고민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분량을 늘리거나 자르는 것을 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면의 효율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노력은 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독자가 같은 시간을 들여서 작품을 읽어 주고 있는데, 작품의 길이가 의미 없이 늘어나서 가도 가도 결말이 안 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글을 읽을 재미가 나겠는가? 아마도 지겹다고 외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측면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지만,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있는지는 나는 모른다. 아마 수많은 작품을 통하여 기존 독자에게 검증받은 작가가 있다고 해도 그 작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의 작품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가 독자의 선호도, 즉 취향이 제각각이지 않은가? 누구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른다. 물론 그러므로 간혹 작가는 대상 독자층을 설정하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구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나에게는 광범위한 독자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하다. 

     

내가 이런 글을 쓰면 창작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쓸데없는 고민을 다 한다고 책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 맞긴 하다. 발표되면 읽어 줄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글을 쓰면서 작품의 질에 신경을 써도 모자랄 판에, 이런 고민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시간을 허비하느냐?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근본적으로 내가 그리는 소설을 어떤 펜으로 그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필요할 것 같다. 부드러운 수채화 붓으로 그릴 것인지. 아니면 뻣뻣한 유화 붓으로 그릴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루뭉술한 한국화 붓으로 그릴 것인지부터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싶다.  

   

그래도 이렇게 글을 쓰면서 단 한 번이라도 독자층에서 나의 소설에 대해 인정해 주는 날이 온다면, 나도 그즈음에는 나의 작품 집필 방향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써 볼 생각이다.




이미지는 Pintrest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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