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제목을 붙이는 행위가 바로 낚시질이다.
구독 작가님들 글을 다시 읽다가 문득 이세벽 작가님의 “아내의 첫사랑이 죽었다.”라는 글 서두의 한 문장이 내 눈길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 없는 성애장면이 거슬렸다.” 작가님의 공모전 응모작에 대한 어느 원로 작가라는 사람의 심사평 중에 한 구절이었다고 한다. “작가님 글 안의 성애장면처럼 농익은 육체적 사랑을 해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 불쌍한 사람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한마디 더 하죠. 그 불쌍한 원로 작가에게... ‘부러우면 지는 거다.’” 이 부분은 내가 남긴 댓글의 한 부분이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나도 소설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소설가가 사실과 허구, 상상의 사이에서 위태하게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쓰는 사례가 많다. 가깝게는 작가의 경험이나 기억부터 시작해서 점점 주위 사람들의 경험이나 기억, 혹은 상상까지 글감을 확대하면서 써나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소설에서의 완벽한 순수 창작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반론이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면 요즘 인기가 많은 판타지 계열의 소설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 그것들도 작가의 경험이나 기억이나 뭐 그런 것들로부터 탄생한 작품이냐? 라든지 하는 반론 말이다. 그런 반론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호그와트 마법학교가 세상에 어디 있냐?라고 되물을 것이다.
갑자기 왜 판타지 이야기로 갔느냐 하면, 단지 소설은 부분적으로 실화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허구적으로 보는 것이 작품을 읽고 즐기기 좋다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만일 소설의 진행상 필요하다고 하면 어떤 형태의 묘사나 진술도 용인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아무리 글로 묘사된 표현일지라도 사회 통념상 용인되는 범위 안에 포함되면 더욱 시비를 걸 수 없다. 단, 너무 폭력적이거나 사회정의에 반하는 과격한 내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다. 만일 그런 장면이 자주 반복되는 작품이라면 읽는 독자에게 편향되고 잘못된 가치관을 은연중에 전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가가 불특정 다수 잠재적 독자에게 일종의 사회적 책임을 갖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다시 성애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솔직히 이세벽 작가 브런치의 이전 작품, 월화의 이야기에도 그런 장면에 대한 묘사가 비친 부분이 어쩌다 간혹 등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분이 소설의 전개상 흐름을 방해하고 거스르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의 몰입도를 높이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제시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소설에 과격한 성애장면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등장했다고 해서 그 작가의 성생활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정도도 구분하지 못하는 독자라면 작품을 권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니 작가는 이런저런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자기가 소설을 구상했을 초기의 생각대로 작품을 집필하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세벽 작가의 소설 전개에 대해서는 이유가 있는 성애장면이건 이유가 없는 성애장면이건 가리지 않고, 나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응원하는 쪽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이율배반적으로 농도가 짙은 성애장면을 소설에 삽입하는 것에는 망설임이 앞선다. 일전의 다른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독자가 나에 대하여 소설 속 주인공과의 일체화를 시도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기우가 앞섰기 때문이랄까? 뭐 아무튼 비슷한 이유도 있고, 앞에 이야기한 대로 소설의 전개상 꼭 필요한 장면이라는 확신과 소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는 나와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가 그 소설을 읽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런 저속한 생각만 가득 차 있었구나.라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심함 때문이랄까? 아니면 혹시 가족에게도 숨겨왔던 은밀한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냐?라는 오해의 소지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 그것도 아니면 경험하지 않은 묘사에 대해서 사실상의 그 방면 전문가(?)로부터 불어닥칠 나의 전문적 지식의 무지함에 대한 비난이 걱정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다양한 핑계를 대는 것이 번거로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쪼잔한 걱정 때문에 내 소설에는 자극적인 성적 묘사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내 소설이 그래서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은 적당한 파격과 막장 같은 묘사가 심심찮게 양념처럼 삽입된 작품들이 인기가 많지 않은가? 이쯤이면 나도 이제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된 것 같다. 소설은 현실과 엄연히 다르다는 나의 소신을 작품 안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그 표현의 대상이 되는 장면을 어떻게 구상할 것인지에 관한 다양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마냥 젊잖은 표현과 묘사에 충실한 고상한 작가의 탈을 고수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소설은 사회의 어느 한 계층이나 한 집단만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 아니므로 소설 안에는 다양한 독자의 성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장면들이 혼재해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 소설을 쓰면서 어떻게 보면 나 스스로가 소설마다의 독자층에 일종의 제한을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그런 부분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이세벽 작가의 글을 읽다가 나의 창작 생활에 대한 반성의 길까지 접어들었다. 이런 가르침을 글 속에서 무언으로 준 이세벽 작가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