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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사랑은 다가오고

사랑인지 뭔지 모르는 감정의 시작은 언제일까?

by 정이흔

초저녁 학교 앞 주점은 항상 대학생들로 바글거렸다. 그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영은의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경주와 이야기 중이던 영은이 미처 벨 소리를 듣지 못하자, 옆자리 재희가 영은의 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영은아. 이거 네 전화잖아. 재희의 말에 영은이 얼른 휴대전화를 들었다. 진수 전화였다. 지금 뭐 해? 오랜만에 통화하며 묻는 진수의 말에, 응, 과 친구들이랑 놀고 있지. 왜? 라며 영은은 평소와 같은 말투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 약간은 기운이 빠진 진수의 말에, 왜? 나 없어서 심심해? 영은은 살짝 놀리듯 물었다. 아냐. 그냥 잘 놀아라. 진수는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왜? 누구야? 응. 아냐. 아무것도. 그냥 친구야. 친구? 남자 친구? 목소리가 남잔데?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냥 어려서부터 알던 동네 친구야. 영은은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보니, 진수가 그냥 그저 그런 아무것도 아닌 친구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친구라는 말이야 맞는 말이겠지만, 혹시 지금 학과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남자 친구였던 적은 없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진수를 이성으로 여겼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만일 이성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요즘 잠시 관심을 두고 있는 학과의 남학생처럼 문득 떠오르거나, 가끔은 보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진수에게는 단 한 번도 그런 마음이 든 적은 없었다. 하긴 진수와는 영은이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사이로, 마치 매일 숨 쉬는 공기일수록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손에 닿는 친구라서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진수도 자기와 마찬가지였을 것이기에, 자기들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이성 친구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확신했다.

전화를 끊고 난 진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개월이었다. 영은과 자주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기간이라고 해 봐야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다. 매일 함께 학교에 가다가 각자 혼자 다니기 시작한 것이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동안 영은의 호출이 없어서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모른다. 그런 기분을 자유라고 한다면 영은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었던 하루의 일과 중에서 거의 절반은 사라진 것 같았다. 영은과 진수의 학교가 그들의 집에서는 거의 정반대 방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떨어져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은이 부른다고 이전처럼 즉시 달려가지 않아도 될 만한 거리였다. 그런데 그 거리가 오늘 통화 후에는 진수에게 색다르게 다가왔다. 마치 진수 자신과 영은 사이의 거리처럼. 그러고 보니 진수는 그들 사이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만큼 먼 거리를 유지하던 시기는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론 각자 가족 단위로 여행을 가거나 뭐 그런 이유로 잠시 떨어져 지낸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영은은 영은대로 진수와의 짧은 통화 후에 왠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기분을 느꼈다. 학과 친구가 말했던 남자 친구 이야기도 그렇지만, 진수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보였다. 말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혹시 할 말이 있어서 전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자기가 너무 학과 친구들과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요즘 들어 진수에게 소홀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다 보니 특별하게 잘못 한 일도 없으면서 공연히 진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진수를 찾았고, 정작 진수에게 자기가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가까운 친구이고, 언제나 볼 수 있는 친구 정도로 생각했달까? 아무튼 그랬다. 그랬었는데, 오늘 진수의 전화에서 왠지 진수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영은에게 다가왔다.

영은은 진수와의 통화를 끝내고 잠시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어디 가? 친구들이 물었다. 응, 좀 가볼 곳이 있는 걸 깜박했어. 잘들 놀고 내일 봐. 금방 그 전화 때문에 그래? 역시 그냥 친구가 아니었네. 아냐. 그런 거. 암튼 나는 먼저 갈게. 영은은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에 잠겼다. 요즘 진수와 연락이 뜸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먼저 전화를 하는 쪽은 항상 진수였다. 예전에는 자기가 먼저 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진수 얼굴이라도 볼까? 하다가 영은은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친구들과 놀고 있다고 하고는 갑자기 불쑥 진수 앞에 나타나는 것도 조금은 어색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이상했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생각할 것 없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진수의 집부터 들렀을 것인데, 그렇게 평범한 상황이 왜 지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영은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해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이것도 너무 생소한 감정이었다. 시간이 늦건 이르건 전화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 전화했는데, 갑자기 왜 늦은 시간 타령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도무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 영은은 그렇게 이 생각 저 생각을 들썩이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진수와 영은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앞뒷집 친구다. 물론 부모님끼리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로 항상 함께 다니다 보니, 가끔은 다른 친구들의 눈에는 거의 친남매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랜 만큼 서로에 대하여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영은은 어떨지 몰라도 요즘 들어 진수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영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어떨 때는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남녀공학이었던 까닭에 둘은 언제나 붙어 다녔다. 어떨 때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고, 어떨 때는 시기 어린 질투와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영은과 이성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저 여사친이었을 뿐이다. 내가 영은과 연애를 한다고? 진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은도 진수를 전혀 이성으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아주 어려서부터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한 방 한 침대에서 뒹굴고 장난치던 사이였으니 당연히 그랬을 법도 했다. 물론 서로의 이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신체적으로 부대끼는 그런 장난은 줄었지만, 여전히 둘은 서로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둘이 워낙 붙어 다니다 보니 진수에게 관심 있는 여학생은 영은에게, 또 영은에게 관심 있는 남학생은 진수에게 각각 진수와 영은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수없이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둘은 아무런 감정 없이 서로에게 이성 친구를 소개했고 소개팅은 잘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생각보다 소개팅 성사율은 거의 바닥을 기다시피 하였다. 그나마 어쩌다가 잘 성사되는 듯 보였던 경우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졌고, 이후로는 다시 둘이 붙어 다니곤 했다. 그러니 다른 친구들 눈에는 둘의 관계가 불가사의한 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영은은 아주 작은 일만 생겨도 진수를 불러젖혔다. 마침 집도 계속 앞뒷집이었으니 오죽 그랬을까? 영은은 아버지나 남동생도 있었지만, 힘든 일은 무조건 진수를 불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진수 부모님 태도였다. 영은이 또 부른다고 진수가 투덜거리면, 사내 녀석이 뭘 그렇게 투덜대느냐? 얼른 가서 도와주지 않고 뭐 하고 있냐? 그렇게 진수의 등을 떠밀 때마다 과연 진수는 자기가 부모님 아들인지, 아니면 영은이 부모님 딸인지 정말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였고, 부모님의 태도가 조금 지나치다고 느껴질 때는 약간 서운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입으로는 투덜대지만 정작 영은의 집에 들어가면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은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었다. 그래서 진수는 영은이 자기를 불러댈 때마다 자기가 너무 잘해줘서 자기 발등을 찧은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감수하며 지냈다.

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때까지 붙어 다녔던 모습에서 벗어나 각자의 대학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로의 옆에 서로가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빈자리를 다른 대학 친구들로 채우게 되었다. 진수도 마찬가지지만 영은도 곁에 진수가 없는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진수가 아닌 다른 남학생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얼굴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면 생각하는 시간도 줄어든다고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연락도 줄어들었으며, 진수가 느닷없이 영은에게 불려 가는 일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을 서로에게 얹혀서, 아니 서로에게 라기보다 영은이 일방적으로 진수에게 얹혀서 지낸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활했던 습관이 줄어든 만큼 진수에게는 마치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26시간으로 사는 것처럼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라도 갈 것만 같았던 생활의 여유가 점점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두 달 정도 지난 후였다. 진수는 영은으로부터 연락이 하루에 한 번이라도 없는 날은 공연히 불안감을 느꼈다. 학교에 가도 집에 뭔가 두고 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고, 틈만 나면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혹시 부재중 통화는 없었나? 아니면 문자라도. 진수는 그런 자기 모습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제발 영은이 좀 그만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영은으로부터 연락이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도 그냥 무의식 중에 영은에게 전화했다가 이유도 없이 심란해하는 자신과는 달리 영은이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다른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서운한 감정의 탈을 쓰고 마음속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수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애써 영은과의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가슴까지 내려가지도 못했다. 이미 가슴속에서는 그런 머릿속 생각을 진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부하고 있었다.

어제는 왜 전화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면 무슨 할 말이라도? 영은의 전화에 진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제 영은의 놀림처럼 영은이 없으니 심심해서 그랬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해 봐야 영은이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눈치 하나는 진수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빠른 영은이니까. 아냐. 그냥 전화한 거라니까? 진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니면 그만이고. 영은은 영은대로 진수가 조금 솔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창 붙어 다닐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정작 떨어져 지내다 보니 자기 혼자만 진수가 다르게 보인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조금 상할 것 같았기에, 진수도 옆에 영은이 없으니 왠지 허전하다는 말이라도 해 주길 원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진수는 솔직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몰라도 자기가 옆에 없는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옛날에는 진수에게 여학생도 여러 번 소개해 주기도 했음에도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어차피 진수는 남자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남자 친구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진수를 대하거나 생각하는 마음이 예전과 달라졌는지 영은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영은도 진수가 옆에 없으니 심심하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것은 진수와의 사이에 의문의 1패를 쌓는 것 같아서 마땅찮았다. 하긴 예전이라면 그까짓 자존심 따위는 개에게나 주었을 것인데, 요즘 들어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영은도 알 수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떨어져 지낸 지난 두 달은 진수와 영은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매여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에서 벗어난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셈이다. 진수는 학교 교정에서 오가며 마주치는 여학생 중에 영은만 한 여학생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런 점은 영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영은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라는 진수의 생각은 그대로 영은에게 전해져, 진수는 나에게 어떤 친구일까?라는 생각으로 영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어릴 적에는 몰랐어도, 지금은 이미 나이가 들어 서로 남들이 흔히 말하는 이성 친구의 신분으로 탈바꿈할 기회도 있었을 법한데, 아직 서로의 눈에 옛날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으면서도 둘이 함께 다닐 때 영은과 진수가 팔짱을 끼고 걸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냥 그런 친구였던 셈이다. 매사에 이미 서로 말하기 전에 벌써 상대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사이였음에도, 그리고 이성에 대한 궁금증이 한창일 시기를 지난 지금까지 서로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수는 영은에게 전화를 걸었고, 신호음이 가는 동안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몇 번의 신호 끝에, 응, 그래 나야. 하는 영은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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