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여한은 없어. 야! 저런 놈이 정작 죽을병에라도 걸리면 기를 쓰고 하루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 친다는 거 몰라? 그러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나는 악착같이 더 살다 가련다. 아, 자식들 뭔 헛소리냐? 인생 백세시대에, 아직 절반밖에 안 산 놈들이 말이야. 그런 헛소리 할 시간 있으면 집에 가서 손주라도 봐줘라. 밥값은 해야지. 헛소리하고 있네. 자식들이 결혼해야 손주도 생기는 거야. 이놈들이 도통 결혼할 생각을 안 하는데 어떻게 손주가 생기냐? 놀고 있다. 결혼해도 애를 안 낳는다. 그저 개와 고양이만 기르고 있는데, 나보고 개나 고양이나 봐주라는 거야?
이제 막 오십 대 중반을 넘긴 친구 셋의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말들은 일자리를 구하는 취준생이라고는 하지만, 그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취준생이라, 그런 고급스러운 단어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발걸음을 내딛는 사회초년생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다. 그저 오십 대 사람을 구분 짓는 단어는 딱 두 가지뿐이다. 실업자와 재직자, 이 두 가지 범주라면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니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저 술집에서 떠드는 세 친구는 모두 실업자들이다. 술값마저도 가족 누군가의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운명의 실업자들이다. 그렇기에 만남도 기껏 일 년에 한두 번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럴싸한 일자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만만한 것이 남자는 아파트 경비직이고 여자는 식당 설거지 아줌마라는데, 그런 일은 또 하기 싫었다. 그러니 그저 놀면서 세월을 죽일 수밖에 없는 거다. 지금 당장 하는 일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화제는 자꾸 지난 세월을 긁어먹고 있다. 아, 참. 전에 말이지. 뭐 이렇게 시작하면 분명 만나서 지금까지 아흔아홉 번은 하고 또 했던 이야기가 나온다는 신호다. 매일 한 이야기 또 하면서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는 건지 도무지 대화의 발전이 없다. 기껏 회상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려고 만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생활에 그 어떤 새로운 변화나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도 아닌 이상에는 여전히 술집 안 풍경은 족히 삼사십 년은 흘러간 그 옛날의 풍경이다.
살아오면서 겪을 대로 겪은 주위의 경조사도 이제는 줄일 만큼 줄이고 있다. 각자의 집에 남은 경조사라고는 부모님 중에 아직 생존해 계신 분의 수만큼 남은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 한다. 물론 자식의 결혼식까지는 서로 챙겨야 하는데, 그것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간혹 오는 생전 소식도 없던 친구의 경조사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챙기지 않는다. 바쁘긴, 그냥 일일이 챙기자니 돈 나가니 그렇지. 그리고 어차피 나부터도 앞으로 그 친구에게 경조사 연락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경향이 미니멀인데, 그냥 자기들끼리 일을 치르면 안 되겠니? 하는 마음이 굴뚝같은 심정이다.
술집에서 한참을 떠들던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각자의 주머니 안에는 모처럼 들고 나온 가족카드는 있지만, 누구 한 명 앞장서 계산대로 향하지는 않으면서 말 같지도 않은 이차 이야기를 입에 올린다. 나가서 입가심이나 하고 갈까? 그러자 나머지 두 명이 잘 되었다는 듯 말한다. 그래, 일차만 하고 헤어지기는 아쉬운데, 나가서 한 잔 더 마시고 가자. 그렇게 술집 밖의 행선지가 결정되면, 그제야 한 명이 앞장을 선다. 여기는 내가 계산할게, 이차는 너희가 사라. 그래, 그러자. 그제야 셋 모두 안심이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대로 각자 돈을 내서 술값을 계산하면 될 텐데, 그들은 여전히 몇십 년 전의 계산 문화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한 친구들인지라, 쩨쩨하게 술집 계산대 앞에서 술값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문화는 용납할 수 없다. 원래 술값은 누구 한 명이 내야 제격이다.
이윽고 한 명이 계산하고는 바로 옆 호프집으로 향한다. 셋이 한 곳씩 계산하면 일단 삼차까지는 가능하다는 사실에 셋은 기분이 좋아졌다. 일 년에 거의 반기별로 만나는 처지인지라, 이런 날 마실 수 있는 만큼 마시고 들어가야 오랜만에 외출한 보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아가며 한 번씩 계산을 끝내고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술 마실 때는 좋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오늘 과연 각자 계산한 금액이 거의 비슷해야 마음이 편할 텐데, 어쩌다 보니 가장 술값이 많이 나온 친구가 가장 적게 나온 친구보다 두 배나 되는 술값을 계산한 것이다. 이게 문제였다. 옛날에 돈을 벌고 용돈도 많았을 때라면 생각지도 않았을 상황이 지금은 자꾸 눈앞에 떠오른다. 다음에는 이번에 가장 적게 계산한 친구가 가장 술값이 많이 나올 일 차에 계산하게 만들어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하여간 술만 마시러 나가면,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일찍 들어오면 어디가 덧나? 그 친구들이랑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다고 여태 있다가 들어오냐? 오래 마셔 봐야 술값이나 더 들지 무슨 득이 있다고 말이지. 카드 이리 줘. 아내의 호령에,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냐, 그래도 내가 제일 많이 계산한 거는 아니야. A는 C보다 두 배나 더 술값 썼다고. 나는 별로 안 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