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야, 얼른 일어나 출근해야지.” 진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그곳은 이전에 자기가 살던 집의 자기 방이었다.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보니 2015년 5월 20일이었다. 이런 상황까지도 어쩌면 예측한 대로 정확히 들어맞았다. 진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는 벌써 일어나서 거실 소파에 앉아계셨고 어머니는 주방에서 한창 식사 준비 중이었다. 물론 깜짝 놀랄 일이었기는 한데, 만일 라이터의 재간으로 자기가 다시 이곳으로 온다면, 그것은 2015년 5월 20일의 진수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책상 위의 라이터는 역시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제 그 남자에게로 간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제 다시는 현아와 유정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지금 이곳에 있는 이상, 더군다나 주혁의 얼굴이 아닌 지금의 얼굴로는 현아 앞에 나설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현아와 살던 시간도 마찬가지로 2015년의 어느 날이라면 당연히 현아는 아직 주혁과 결혼하기 전일 것이고 유정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진수가 현아 앞에 어찌어찌해서 나타난다고 해도, 현아와 주혁 사이에서 끼어들 틈도 없을 것이다. 그 둘은 앞으로 오 년 후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정말 라이터가 무슨 큰일을 벌인 것만 같았다.
“어제는 술을 많이 마셨니?” 어머니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뇨. 별로 많이 마시지 않았어요.” “속은 괜찮고?” “네. 괜찮아요.” 지극히 형식적인 몇 마디 대화 후에 아버지와 동생까지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진수는 밥맛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현아와 함께 생활한 기간이 삼 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현아가 없는 식탁은 이상하리만치 어색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곳의 부모님이나 동생에게는 하룻밤에 불과했을 테지만 말이다. “왜, 입맛이 없어? 그래도 조금 먹지 그러냐?” 진수가 밥을 끄적거리는 것을 본 어머니가 말했다. “네, 왠지 입맛이 별로 없네요. 저는 그만 일어설게요. 천천히 드세요.” 식탁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온 진수는 출근 준비를 하면서 간간이 현아 생각에 빠졌다. 생각할수록 믿기지 않는 기억이지만, 그리고 주혁이 되었다가 다시 진수가 된 상황이지만, 현아와 유정에 대한 기억만큼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보통 자기처럼 이상한 경험을 했다든지, 아니면 기억을 잃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직전 기억을 모두 잃는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진수의 기억은 놀랍도록 생생했다. 이 모든 일이 라이터의 조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누구의 손에 들어갔을까? 혹시 진수에게 다시 돌아와서, 라이터가 진수를 현아와 유정에게 데려다줄 수는 없을까? 그런 상상이 진수의 뇌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출근해야 할 시간이다. 진수는 방에서 출근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저 지금 출근합니다. 다녀올게요.” 그때까지 주방에서 정리하던 어머니가 진수를 보며 말했다. “그래, 항상 차 조심하고. 잘 다녀와.” 역시 부모는 항상 밖에 나가는 자식에게 그저 ‘차 조심’, ‘차 조심’하라는 말이 전부인 것 같았다. 어머니의 그런 ‘차 조심’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왜인지 진수의 가슴속에 깊이 담겼다. 진수도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현관을 나섰다.
사무실에서도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평소 같지 않은 진수를 주시하던 동료 창우가 다가와서 넌지시 물었다. “진수 씨.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창우의 말에 진수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아냐, 아무 일도. 그냥 뭘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에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여자 생겼어?” 뜻밖의 물음에 진수가 잠시 후,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냐, 여자는 무슨. 내가 여자가 어디 있어?” 그렇게 말하는 진수의 표정을 본 창우는 웃으며 말했다. “아냐. 분명해. 아니라고 펄쩍 뛰는 걸 보면 맞는 것 같은데? 어디. 나한테만 말해봐. 어떤 여자야?” 진수는 속으로 역시 귀신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현아와 유정의 이야기를 창우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라니까?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집안일이야.” 그러자 창우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창우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생각해 보았다. 현아와 유정은 지금 진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솔직히 말해서 2015년 지금 현재는 아무런 의미를 둘 수 없는 존재들이다. 유정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일 뿐 아니라, 현아가 주혁과 결혼도 하지 않았을 시기이지 않은가? 아무런 일도 결정되지 않았던 몇 해 앞을 진수 혼자 둘러보고 온 느낌이었다. 라이터 덕분에 자기의 미래를 보고 왔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자기를 무슨 정신병자나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만 간직해야 하는 비밀을 지닌 사람처럼 지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23년 이후가 되어도 현아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진수는 생각할수록 현아와의 기억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현아와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진수는 가장 먼저 담배를 끊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분리수거함 옆의 종량제 봉투 안에 깊이 버렸다. 진수의 생각에는 아마도 금단증상은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몇 년간 주혁으로 살면서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시 흡연 욕구가 일어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곤하게 자고 있던 현아의 전화벨이 울렸다. 현아는 잠결에 손을 더듬어 전화를 들었다. 화면을 보니 주혁의 번호였다. 잠시 갸우뚱하던 현아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이 전화기 주인 아세요?” 목소리는 다급했다. 주혁의 목소리도 아닌 다른 목소리가 왜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순간 현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네, 제 남편인데요?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전화기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저는 원지동 치안센터 김경수 경사입니다. 지금 남편분께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성주병원으로 실려 왔어요. 지금 오셔야 하겠습니다.” “저, 제 남편이라고요? 남편은 상태가 어떤데요? 무사한가요?” 현아는 눈앞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일단 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은 확실치 않아서요” 경찰은 주혁이 이미 사망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호자가 병원에 도착한 후에 사실을 말해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현아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현주가 받았다. “현주야. 형부가 교통사고로 성주병원에 실려 갔대. 지금 가봐야 하겠는데, 유정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네가 지금 성주병원으로 와서 유정이 좀 보고 있어. 내가 유정이 데리고 지금 병원으로 출발한다. 알았지?” 현아는 현주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 유정을 깨워 차에 태웠다.
교통사고라니. 하필 왜 주혁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 겨우 유정이를 낳고 셋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왜 그런 일이? 현아는 어떻게 운전하고 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병원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주도 잠시 후에는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다. 응급실 입구에 서 있던 제복 차림의 경관이 현아에게 다가왔다. “저, 혹시 전화를 받고 오셨나요?” “네, 그런데요? 제 남편은 어디에 있나요?” 현아의 말에 경관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죄송합니다.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가셔서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현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주혁이 죽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이렇게 자기와 유정을 두고 갈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죽을 수가 있는 건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된 건가요? 아니 도대체.” 현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현주가 현아의 부모님과 함께 도착했다. 현주는 현아의 팔에서 유정을 받아 안으며 물었다. “언니, 어떻게 된 일이래? 형부가 왜 갑자기 사고를 당해? 정말이야?” 어이가 없기는 현주도 마찬가지였다. 경관은 말없이 현아와 현주를 주혁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주혁의 시신을 확인하는 순간, 현아는 마침내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유정이 소리 내 울자, 현주가 유정을 데리고 나갔다.
주혁의 사고 조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원인이 차량 결함으로 밝혀졌기에, 운전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물론 운전자도 현아와 유족에게 죄송한 마음을 표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현아의 귀에 그런 사죄의 말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떻게 훤한 대낮에 사람을, 그것도 인도를 걷고 있는 사람을 뒤에서 치어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현아는 용서할 수 없었다. 주혁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 연결도 되지 않자, 태준이 현아에게 전화했다. 현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태준을 만나러 나가지만 않았어도 주혁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태준까지도 보기 싫었다. 현아는 그저 이제 앞으로 유정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주혁의 기억이 이상하다고 했을 때부터 이렇게 주혁이 죽는 일까지 모든 일이 이미 계획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터가 주혁을 죽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갑작스러운 주혁의 죽음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주혁의 집에서도 주혁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유정을 낳고 이제 막 행복한 가정을 꾸렸는데, 갑작스럽게 죽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은 앞길이 창창한 현아가 유정을 데리고 혼자 살아야 하는 것도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의외로 주혁의 부모는 사실을 사실로 곧바로 받아들였다. 아들을 잃은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대신에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겠냐고 하면서 현아의 슬픔을 달랬다. 주혁은 화장해서 현아와 주혁이 살던 곳에서 가까운 봉안당에 안치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주혁은 현아와 유정 곁을 떠났다. 주혁을 마지막으로 보내고 온 날, 현아는 서재에 있던 라이터도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내다 버려도 다시 돌아왔던 라이터인데, 주혁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현아는 집에 들어와서 유정과 단둘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과 현주가 살고 있는 친정으로 들어갔다. 집에서는 도저히 주혁 생각에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현아는 아빠도 없이 자라야 하는 유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주혁이 세상을 떠난 후, 몇 개월이 지나서 주혁이 출판사에 전했던 원고가 마지막 유작으로 출간되어 현아의 손에 들어왔다. 현아는 책을 손에 들고 주혁의 생각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혁은 이제 현아에게 한 권의 책으로만 남았다.
주혁이 떠난 지 벌써 일 년의 세월이 흘렀다. 주혁의 사고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어느 날 시어머니 윤희로부터 현아에게 전화가 왔다. “현아야, 나 엄마다.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지?”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자, 주혁이 생각나서 현아의 목소리가 약간 울먹였다. “응, 그래. 근처에 왔다가 전화했어. 너랑 유정이가 보고 싶어서 말이야.” “어디 계세요 지금? 근처라면 집으로 오세요. 마침 유정이 외할머니도 계시거든요.” “아니다. 내가 안사돈 얼굴을 보기도 그렇고, 그냥 네가 잠깐 나오면 안 되겠니?” 현아는 시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머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유정이 데리고 나갈게요.” 현아는 장소를 확인하고 유정이에게 외출 준비를 시켰다. 준비라고 해 봐야 그저 실내복 위에 춥지 않도록 겉옷을 입히기만 하면 되므로 준비는 금방 끝났다. “엄마, 유정이 할머니 잠깐 뵙고 올게. 근처에 오셨다니까.” “아니 왜 들어오시지 않으시겠대?” 현아는 엄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유정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에 들어서니 시부모가 함께 앉아 계셨다.
“현아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윤희가 현아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현아는 그저 윤희에게 안겨서 울기만 했다. 영문을 모르는 유정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유정을 바라보자니, 주혁의 부모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 어린것이 아빠를 잃고 엄마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남편을 잃고 딸만 키우며 살아가기에는 현아의 나이도 너무 젊었기 때문에 현아에게도 한없이 미안할 뿐이었다. 이윽고 잠시 그렇게 울음바다에 빠져있던 현아와 윤희는 숨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네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오실 거였으면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잠시 말이 없던 윤희가 힘들여 입을 열었다.
“아가, 현아야. 우리도 그냥 온 것은 아니고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저에게요? 무슨 말씀인데요?” 순간 현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왔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길래 전화로 이야기해도 될 일을 직접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시려 들린 것일까? 혹시 유정이 문제인가? 궁금증은 끝없이 솟았다. 그런 현아의 얼굴을 보면서 윤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현아야, 이상하게 듣지는 말고 네가 며느리이긴 하지만, 우리는 너를 지금까지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러니 우리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라. 주혁이가 그렇게 가고 나서 우리 두 늙은이도 한동안 정신이 없었어. 그러니 젊은 너는 오죽했겠냐? 더군다나 어린것 하나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현아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했지. 주혁이가 간 것은 간 것이고, 살아있는 너희는 너희대로 살아야 할 거 아니겠니? 그래서 말이야.” 답답한 현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어미로서 차마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에게 말해야만 하겠기에, 이렇게 온 거야.”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냐니까요?” 현아가 재차 물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뜸을 들이는 이야기라면 현아에게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래. 그냥 말하마. 주혁은 어쩔 수 없이 갔지만, 이제는 하루라도 네가 젊을 때 너도 네 인생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지? 우리도 네가 주혁이 생각만 하면서, 혼자 사는 것을 원하지는 않아.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네가 잘 살아주기만 한다면, 그저 우리는 고마울 뿐이야.”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주혁이 보낸 지 이제 겨우 일 년이에요. 일 년. 그리고 유정이가 있는데 제가 무슨 팔자 고칠 일이 있어요? 어머니 말씀은 알겠는데, 앞으로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아셨죠?” “그러길래 유정이는 당분간 우리가 키울 생각도 했어.” “아니 어머니. 그게 말이 되나요? 아빠는 죽고, 엄마는 일 년 만에 딸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다른 남자 만나서 살고, 그러면 유정이는 뭔데요? 말이 안 되잖아요.” “네 말은 알겠지만, 그러면 어떻게 하니? 너 같으면 네 아들이 애 딸린 여자와 결혼하겠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겠니” 현아는 말문이 막혔다. 시부모님의 말뜻은 알겠지만, 지금은 자기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유정이를 떼어 놓는다는 것은 현아로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현아는 주혁의 부모에게 못을 박았다.
“어머님 아버님 생각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혼자 이렇게 살아도 이것이 제 팔자이고 제 인생이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유정이도 제가 잘 키우겠습니다. 물론 주혁이 딸이니 당연히 어머님 아버님의 자식이긴 해요. 하지만 저에게도 친자식이잖아요. 제가 예쁘고 건강하게 잘 키울게요. 그리고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자라게 할게요. 그냥 지금처럼 둘이 살게 해 주세요.” 주혁의 부모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젊은 여자가 혼자 딸을 키우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지금 며느리는 전혀 모른다. 그리고 결국 나중에 가서 재혼이라도 한다면, 지금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나이가 좀 든 유정이가 엄마의 재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아예 하루라도 빨리 현아가 재혼할 수 있도록 당분간 자기들이 키우려고 한 것인데, 현아의 생각이 저렇게 완강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지만 현아의 생각이 그렇다면, 자기들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냥 이 정도 이야기했으니까, 현아와 유정을 들여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일단 너의 뜻은 잘 알겠다. 우리도 다시 생각해 볼 테니, 너도 우리 말을 그저 늙은이들 말이라고 넘겨버리지 말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들어가서 양 사돈어른께도 안부 전해드리고, 가족끼리 의논도 해 보았으면 좋겠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지? 현아야.” 현아도 이쯤에서 이야기를 끊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네, 어머님 아버님 말씀하신 뜻 저도 잘 알아요. 저를 생각해서 하신 말이잖아요.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 주세요. 집에 가서 부모님께도 안부 전해드릴게요. 그러면 지금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응, 그래. 너 만나서 하려던 이야기 다 했으니 이제 가야지. 아무튼 기운 내서 잘 지내고 있어라. 나중에 또 보자.” 현아는 시부모님을 보내고 나서 유정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돈어른들 가셨니? 모처럼 오셨는데 잠깐이라도 들어오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냥 가셨구나.” “응, 아무래도 엄마 얼굴 보시기가 좀 그러셨나 봐.” 현아가 그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예까지 오셨대?” “아니 별일은 아닌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 그러니까 아빠랑 현주랑 들어오면 저녁에 모두 있을 때 말해줄게.” “무슨 말인데 그래?” “아니, 이따가 이야기해 준다니까.”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는 현아는 유정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거실에 있다가는 계속 엄마에게 시달릴 것만 같았다. 방에 들어온 현아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면, 주혁의 부모님으로서는 그렇게 말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도 유정을 키우며 혼자 언제까지 살아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제 겨우 주혁을 보낸 지 일 년이다. 그렇기에 자기가 벌써 재혼을 생각할 정도로 주혁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가 하루라도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여자도 아닌데, 재혼 이야기는 조금 이른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상을 오래 살아오신 시부모님의 뜻을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냥 이대로 살고 싶었다. 아무튼 저녁에 가족들에게는 시부모님의 의중을 전달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기껏 고민해서 하신 말씀인데, 사돈 댁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현아에게는 단지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결국은 주혁과의 기억을 조금씩이라도 잃어갈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만 있었다. 그저 어린 유정이 걱정이었다. 언제까지 아빠가 없는 아이로 키우는 것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시부모님도 그래서 더욱 이른 재혼을 권하셨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재혼해도 친 모녀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언제든지 유정이 현아의 재혼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런 방법이 좀 더 현명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유정을 바라본 현아는 유정을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유정만이 이제 유일한 주혁이자 진수의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