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남과 죽음_1
계절은 어김없이 흘렀고, 뜨거운 여름도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진수도 출간 후에는 별로 하는 일 없이 다음 작품을 구상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혁이 출간한 소설까지 해서 지금 주혁의 이름으로는 이 년마다 장편 소설을 발표한 셈이었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것이지만, 진수는 기왕 주혁의 삶을 살아가기로 한 바에는 철저하게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또 사실은 지금 당장 진수가 창작에 열을 올리지 않으면, 특별하게 다른 할 일이 없기도 했다. 가끔 부모님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지금 진수의 처지에서는 부모님께 돌아갈 방법도 없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정말 현아와 헤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더욱이 라이터는 아무리 내다 버려도 돌아올 것이므로 부모님께 돌아가는 문제도 어차피 라이터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인지라, 아예 잊고 지내도 특별히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주혁야. 이거 볼래?” 욕실에서 나오던 현아가 진수를 불렀다. 손에는 임신테스트기가 들려있었고, 진수의 눈에도 뚜렷한 두 줄이 보였다. “이거, 임신이라는 소린가?” “응, 일단 이걸로 진단한 결과는 임신이지. 정확한 것은 산부인과에 가 봐야 하겠지만 말이야.” 진수는 기분이 좋아서 소리쳤다. “야호, 이제 드디어 임신이구먼. 그러면 언제 병원에 가 볼까?” “아예 오늘 가 볼까?” 현아도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주혁과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아이를 갖게 될지 몰랐는데, 정작 임신이 확인되자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진수는 그런 현아를 말없이 꼭 안아주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또 한 번의 봄도 지나가던 즈음에 현아는 예쁜 딸을 낳았다. 현아의 집은 물론 주혁의 집에서도 온통 부모님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고, 누구보다 현아의 기쁨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딸 이름을 유정이라고 지었다. ‘이유정’, 이주혁과 전현아의 딸이었다. 진수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행복이 라이터 덕분인 것 같았다. 현아도 이제는 주혁이 진수라는 사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물론 얼굴은 여전히 주혁이었지만, 유정을 갖자고 할 때부터 현아의 마음속 주혁은 진수였다. 주혁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주혁도 현아로부터 느끼는 심경의 변화를 눈치챘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현아도 이즈음부터는 주혁이와 진수를 편한 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주혁이라고 부르다가, 또 어떨 때는 진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저 진수의 행동을 보고, 그런 진수를 현아가 누구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곤 했다. 물론 양가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친구처럼 주위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철저하게 주혁이었지만, 이제 둘만 있을 때는 주혁이 기억을 잃어서 진수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연이 있어서 주혁의 안에 진수라는 남자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도 않기로 했다. 그렇다 보니 자꾸만 유정의 친아버지는 주혁이 아닌 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주혁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것이지만, 주혁과 현아 사이에 진수라는 남자가 없었다면, 애초에 유정을 임신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정의 출생과 더불어 현아와 주혁의 집에는 더욱 생기가 돌았다. 원래 그렇다고들 하지 않던가? 역시 집에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야 더욱 화목한 가정처럼 보이고, 남들이 보기에도 행복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현아는 그렇지 않아도 주혁의 안정된 기억 상태나, 자기에 대한 태도의 일관성 등으로 인해서 이전보다는 훨씬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 유정까지 태어남으로써 가정적으로도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주혁은 완전히 딸바보 그 이상이었다. 유정을 대하는 주혁의 모습을 볼 때면 자기와 현주가 어릴 때 유정의 외할아버지가 자기 자매에게 기울인 애정이 상기되곤 했다. 아버지도 지금 주혁이 유정에게 흠뻑 빠져 지내듯이, 자기 자매에게 모든 사랑을 쏟으셨던 것을 기억한다. 주혁은 유정이 태어나자 당분간 글 쓰는 일까지 전폐하고 하루 종일 유정을 끼고 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주혁이 다시 진수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유정은 무럭무럭 자랐다. 한 달 한 달 지날 때마다 유정의 얼굴에서는 절묘하게 섞인 현아와 주혁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정말 옛날 할머니들 말처럼 씨도둑질은 못 한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을 정도로 정확하게 주혁과 현아의 모습을 절반씩 닮았다. 사실 진수는 얼굴만큼은 현아를 빼닮기를 원했다. 아무래도 딸이므로 모녀간에 얼굴이 닮는 것이 좋기도 해서 그렇지만, 무엇보다 진수의 눈에 현아보다 예쁜 여자는 없는 것 같았다. 유정이 태어난 지도 다섯 달이 지나갔다. 이곳에서의 세 번째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진수는 주혁이 되어 현아와 알콩달콩 생활하다가 이제 딸까지 얻었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수는 현아와 함께 유정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섰다. 주머니에는 그동안 미루고만 있었던 라이터를 넣고 집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을이기는 해도 아직은 날이 약간 더웠다.
공원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아무래도 집안에만 있는 것도 갑갑해서 모두 밖으로 나온 것만 같았다. 진수는 공원 잔디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유정도 언젠가는 자라서 저렇게 뛰어다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현아는 그런 주혁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도 이렇게 남편과 딸을 데리고 여유 있게 산책을 즐길 줄은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진수가 주혁에게 찾아오면서부터 자기 인생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주혁과 십 년을 넘게 함께 지냈으면서도, 지금 진수와 지내는 불과 이 년 반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느꼈던 사랑과 같은 그런 사랑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주혁의 기억이 이상해졌다고 안타까워했던 지난 시절이 아스라이 현아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외모만 주혁이었고 내면은 진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정을 낳고 나서야 비로소 주혁을 진수로 받아들였다고나 해야 할까? 뭐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진수가 현아를 불렀다. “현아야, 이거.” 진수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현아에게 주었다. “이거 네가 아무 곳에다 갖다 버릴래? 내가 유정이 보고 있을게.” 현아는 라이터를 받고는 주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혁의 표정에서 아쉬움이라든지, 안타까움이라든지 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알았어. 그러면 내가 버리고 올게. 아주 멀리 던져버려야겠다. 하하하.” 현아가 웃으며 라이터를 쥐고 저만치 나무 사이로 내려갔다.
산책에서 돌아온 진수는 우선 유정부터 깨끗이 씻겼다. 이제 나중에는 엄마인 현아가 씻겨 주겠지만, 아직 아기일 때만큼은 진수가 씻겨 주고 싶었다. 진수는 유정을 씻기면서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떻게 이런 존재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인간 출생의 신비는 영원할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인 출산 과정이야 뭐 밝혀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꼼지락거리는 생명체를 보면 그런 학문적 지식에 의한 설명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무언의 신비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자기가 라이터의 신비한 능력에 의해 지금의 주혁이 된 것 이상의 신비로움이었다. 현아는 그렇게 딸을 씻기고 있는 주혁을 보며 한없이 사랑스러운 마음을 느꼈다. 아마 옛날 자기의 아버지 시대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지금 주혁이 유정을 씻기듯 그렇게 씻기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주혁아. 딸 씻기는 게 그렇게 좋아?” 진수를 보며 현아가 물었다. “그럼 좋지. 너 같으면 안 좋겠니? 희한하잖아. 이 어린애가 꼬물거리는 거 말이야. 그리고 유정이 살이 얼마나 포동포동한데. 아주 귀여워 죽겠다. 하하하.” “그래? 그러셔. 유정이 더 커서 아빠랑 목욕 못 하겠다고 하기 전에 아빠가 많이, 많이 씻겨 주세요. 하하하.” 현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자기도 나중에 아빠에게 물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혹시 자기가 목욕을 아빠와 했었냐고 말이다.
유정은 유정대로 진수를 많이 따랐다. 보통은 엄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을 텐데, 진수가 유정을 너무 이뻐하다 보니, 현아에게까지 차례가 가질 않았다. 항상 찡얼거리다가도 진수가 안아주면 곧바로 그치고 웃었다. 진수가 한 팔로 유정을 안아서 가슴에 대고 다른 팔로 유정의 등을 두드리면 얼마 가지 않아서 유정은 쌔근거리며 잠이 들곤 했다. 어떨 때는 진수가 누워서 유정을 자기 배 위에 올리고 재울 때도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마치 진수의 심장 박동이 유정에게는 자장가라도 되는 듯 보였다. 현아가 보기에도 주혁은 만점 아빠였다. 그래서 남편들이 딸을 낳으면 죄다 딸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현아는 새삼스럽게 라이터에 고마움을 표했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던 주혁의 마음을 돌렸고, 유정 같은 예쁜 딸을 낳게 해 준 고마운 라이터였다. 물론 현아는 그 고마움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진수의 인생이 이렇게 바뀔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진수도 완전히 자신을 잊은 것은 아니었기에, 가끔 떠오르는 부모님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진수였다는 사실까지 잊을 정도로 주혁의 역할에 몰입되었다. 그냥 이런 상태로 언제까지나 지내고 싶었다. 조금 있으면 이제 유정이 걸음마를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얼마나 유정의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할까? 부모들은 다 그렇게 애들을 키웠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진수도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아와 유정을 떠날 수도 없었다.
창밖의 경치가 점점 가을이 깊어 가는 것 같았다. 이 집에서 세 번째 보내는 가을이다. 정말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다시 조금씩 글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을 낳고 나서는 아예 글 쓰기를 중단했지만, 작품 구상까지 중단하지는 않았었다. 주혁의 인생은 작가의 인생이므로 잠시 쉴 수는 있지만, 결국은 다시 글 쓰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재에 들어가 보았다. 유정은 안방 침대에서 현아와 함께 곤히 자고 있었고, 진수는 떠올랐던 소설 소재를 잊기 전에 노트북에 정리해 두기 위해서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진수는 잠시 라이터가 있던 자리를 둘러보았다. 물론 라이터는 진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현아와 함께 공원에 가서 내버린 지 꼭 사흘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는 그런 현상을 보아도 괴이하다거나 두렵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단지 현아가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현아도 라이터가 돌아온 사실에 별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튼 더 이상 라이터와 관련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자, 진수와 현아는 거의 라이터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었다. 진수는 노트북을 열었다. 그러다가 문득 노트북의 서류 폴더를 훑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노트북을 열어도 한글 프로그램만 실행해서 소설을 쓰고 저장하기만 했기 때문에, 노트북의 다른 서류 폴더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그 폴더들 안의 파일 내용이 궁금했다.
주혁의 노트북은 작가의 컴퓨터답게 아주 내용이 깨끗했다. 한글 프로그램 이외의 다른 프로그램들은 거의 없었고, 그저 있다는 파일은 소설 초안이 담긴 폴더에 있는 파일들이 전부였다. 초안들을 열어보던 진수는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글을 하나 발견했다. 장르는 로맨스였다. 그러고 보면 현아가 주혁이 언젠가는 로맨스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렇다면 진수 자신이 주혁이 되기 전에 이미 로맨스 소설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제야 현아가 진수에게 새로운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했던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의 뜻은 진수가 주혁의 이름으로 새로운 소설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주혁이 구상 중이던 소설을 서서히 마무리하지 않겠냐는 말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뜻일 것 같았다. 소설의 내용은 추리 소설 작가의 글답게 달콤한 분위기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굳이 분류하자면 로맨스 소설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 같은 글이었다. 원고는 거의 완성 일보 직전이었다. 사실 추리 소설 작가에서 로맨스 소설 작가가 되기에는 진수가 쓴 소설보다 이 글이 먼저 발표되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진수의 소설이 출간되었으면, 이주혁이라는 작가의 변신을 좀 더 극적으로 그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진수는 주혁을 대신해서 그 소설을 다듬기로 했다.
소설의 정리를 거의 끝낸 11월의 늦가을 어느 날, 진수는 밖에서 태준을 만나기 위해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아는 유정을 돌보느라 집에 있기로 하고 진수만 나가기로 했다. 진수는 외출 전에 소설 원고를 출판사 김 대표에게 보냈다. 출판사에서 보면, 주혁이 지난번 출간 후에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집필한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이미 주혁이 써 놓았던 원고를 진수가 다듬어서 출간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빠른 출간도 아니었다. 김 대표는 며칠 내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고, 진수는 현아에게도 그 소식을 전해 두었다. 현관에서 현아가 진수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잘 다녀오고, 너무 늦지 마. 네가 늦으면 유정이가 싫어한단 말이야. 알았지?” “알았어. 늦지는 않을 거야. 사랑해.” 이제는 닭살 돋게 사랑한다는 말이 잘도 나왔다.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것 같았다. 현아도 진수에게 다시 입을 맞추고는 “나도 사랑해. 늦지 마. 유정이도 그렇지만, 나도 네가 늦는 거 싫단 말이야. 알았지?” 하며 눈을 예쁘게 흘겼다.
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술을 마시자고 할 것 같기도 하고, 약속 장소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해서, 차는 두고 가기로 했다. 큰길로 나와서 길 따라 걷다 보니 바지 주머니가 불룩한 것이 자꾸만 거슬렸다. 원래 바지 주머니가 튀어나오는 것이 싫어서 주머니에 뭘 넣고 다니지 않았는데 이상했다. 잠깐 그 자리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라이터가 손에 잡혔다. “어? 내가 라이터를 갖고 나왔나? 아닌데?” 진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주혁으로 살아가면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에 어차피 라이터를 몸에 지니고 다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출을 준비할 때 자기 손으로 라이터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라이터가 주머니에 들어 있을까? 라이터를 꺼내 손에 쥐고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저, 실례지만 담뱃불을 좀 빌릴 수 있나요?” 그 남자는 진수가 라이터를 들고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말을 건 것 같았지만, 그 순간 진수의 머리를 뒤흔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때가 되면 라이터가 스스로 선생님을 떠날 것입니다.”라고 했던 꿈속의 그 남자가 한 말이었다. 지금이 그때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라이터를 지금 앞의 남자에게 준다면 라이터가 자기를 떠날 것이고, 자기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며, 주혁은 원래의 주혁 정신으로 돌아갈 것인가? 궁금증이 떠나질 않았다. 진수가 앞의 남자와 자기 손 안의 라이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진수가 자기 말을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말했다. “죄송한데 담뱃불을 좀 빌려주세요.” 진수는 망설였다. 지금 내가 직접 라이터로 불을 켜 준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라이터를 주고 직접 불을 붙이라고 하면, 자기와 같은 일이 지금 이 남자에게 일어날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라이터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은 머릿속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진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남자에게 라이터를 건네주고 있었다. 진수는 순간, 이것이 바로 라이터의 의지인가? 하고 생각했다. 라이터가 이 남자를 진수에게 이끌었고, 이제 라이터가 스스로 진수의 손에서 벗어나 그 남자에게로 가고 있는 지금의 이 상황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마자 진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남자의 눈에는 진수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일은 이미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수가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거울 앱을 실행해 보아도 얼굴이 진수의 얼굴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휴대전화 연락처를 보아도 단축번호 1번은 여전히 ‘나의 사랑’이었다. 그제야 라이터의 신비에 대해 의문을 생겼다. 이런 정도의 변화라면 처음부터 라이터를 항상 들고 다니다가 누군가 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라이터를 주었어도 상관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수는 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왜? 유정이 깨게 왜 전화했어?” “아냐, 그냥. 유정이 잘 자는가 해서.” “싱겁기는. 그냥 얼른 다녀오기나 하세요. 나도 좀 유정이 옆에 누워야겠다.” 진수는 알았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 전화 통화가 제대로 연결된 것만 보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이제 아무 걱정 없이 현아와 유정과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류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저씨. 조심하세요.”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진수는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브레이크 파열인지, 아니면 운전 부주의인지 진수의 눈에 채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대형 덤프트럭이 진수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인도를 덮쳤다. 진수는 순간 두려움보다는 평온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라이터의 의도였었나? 이렇게 진수 자신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려 했던 것인가?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진수의 머리를 스쳤다. 쓰러진 진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혁의 육체는 이미 의식 잃은 상태로 누워 있었고, 거의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오직 지금까지도 허공을 떠도는 영혼처럼 진수의 의식만 그 모습을 내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주혁이 숨을 거두는 순간, 진수도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자리에서 끌려 나와 어디론가 흩어졌다. 그저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