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기억_1
진수는 현아와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아마도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흐르던, 영원히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기준에게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으니, 아마 십 년 정도 알고 지낸 친구일 것이다. 퇴근 후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랜만에 얼굴이나 좀 보자고 하기에 그러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에 문자로 약속 장소를 보내왔다. 이 녀석은 항상 그랬다. 진수를 생각해 주느라고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진수 집에서 가까운 쪽으로 약속 장소를 잡는다. 간혹 진수가 기준의 집 근처까지 가겠다고 해도, 기준은 항상 자기가 진수에게로 오겠다고 했다. 덕분에 기준과 술을 한잔 마시고 들어가는 날이라도 집에 늦게 들어가는 법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진수는 일을 정리하고 동료들에게 “저는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라고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잠시 걷기로 했다. 불과 하루만이었어도 기억 속에서는 삼 년 가까이 떠나 있던 거리였기에 혹시라도 뭐 달라진 것은 없는지 돌아보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거리를 보며 진수는 혼자 피식거리며 웃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며칠 사이에 변할 것이 뭐 있겠어? 그러면서 버스 정류장 하나만큼의 거리를 걷다가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랐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진수가 나중에 들어오는 기준에게 손짓하다가 기준 옆에서 함께 들어오던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기준 혼자 나오는 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여자를 동반한 자리가 되자, 진수가 어색한 듯 물었다. “어떻게? 혼자 아니었어? 이분은 누구?” “아, 너는 당연히 모르지. 지금 소개하려고 함께 나온 거니까. 인사해. 이쪽은 내 여자 친구야. 이름은 ‘진주희’ 나이는 우리랑 같아.” “아, 안녕하세요? 저는 기준이 친구 김진수라고 합니다.” “아, 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기준은 주희와 함께 진수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 주혁의 고등학교 앨범을 볼 때, 어디에선가 본 얼굴이라고 느꼈던 여학생이 진주희였다. 이렇게 알았던 사이였는데, 그리고 결국 그녀가 친구와 결혼까지 갔는데도 주혁의 앨범을 볼 때는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앨범 사진은 원래 심하면 자기 얼굴도 달라 보이는 법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주혁이었을 당시의 진수는 2015년까지의 기억만으로 2020년으로 갔으니 당연히 진주희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혁의 앨범을 보는 순간 진수가 진주희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고 느꼈다는 사실은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라도 주혁과의 연결 고리가 하나 생긴 것만 같아서 진수는 은근히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둘은 어떻게 만난 사이야?” 진수가 기준에게 물었다. “아, 그냥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났어. 만나보니 서로 마음에 들어서 계속 사귀기로 했지.” “아, 그랬구나. 잘 됐다. 주희 씨 고맙습니다. 이거 제 친구를 구제해 주셨네요. 하하하.” “야, 말은 바로 하자. 우리는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서로 구해준 걸로 하기로 했거든.” 기준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진수가 보기에도 주희가 기준에게는 아까울 정도로 미인이었기에, 기준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주희는 그냥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술이 몇 잔 돌다 보니 여자 친구가 생겨서 기분이 좋았는지, 기준이 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혹시 주희야. 친구 중에 괜찮은 얘 있으면 진수에게 소개해 줄 수 있어? 이 녀석이 보이기는 이래도 괜찮은 놈이거든. 아직 혼자이고, 직업도 석산 반도체 연구원이야. 아주 안정적이지.” “아~ 아냐. 주희 씨 아닙니다. 저는 아직 생각이 없어서요.” 무의식 중에 진수가 손을 내저었다. 아마 현아 생각에 그런 반응이 나온 것 같았다. “싫긴, 마. 너도 여친 없잖아. 주희 친구 중에 착하고 예쁜 친구들 많아. 그렇지, 주희야?” “많은 것은 아니고 몇 명 있지. 그런데 진수 씨가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시는지 모르잖아.” “아, 그건 내가 잘 알아. 얘는 무조건 현모양처 스타일을 좋아해. 그렇지, 진수야?” “아, 괜찮다니까 자꾸 그러냐? 주희 씨. 정말 저는 괜찮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셋은 술을 마셨다. 주희는 술도 아주 많이 마시는 것 같았다. 술을 잘 마시는 주희를 보니 진수는 현아 생각이 떠올랐다. 현아도 술을 많이 마셨는데. 한참을 떠들며 술을 마시다가 기준이 이제 일어서자고 했다. 아마 오늘은 주희를 사귀기 시작한 사실을 진수에게 말하고 싶어서 보자고 했던 모양이었다. 셋은 얼큰하게 술에 취해서, 술집을 나왔다. 진수는 기준과 주희가 택시를 타고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택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집으로 발을 돌렸다. 집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거리라서 천천히 술을 깨면서 걷기에는 적당한 거리였다. 이제 이 시절로 다시 돌아와서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이미 확실하게 지금의 시기에 적응되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제 현아와의 일도 잊고 지금의 진수로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솟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현아와의 기억은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진수는 꿈속에 상복을 입은 현아를 보았다. 분명 지금이면 주혁의 상을 치르기는커녕, 아직 주혁과 결혼도 하지 않았을 때인데 왜 현아의 모습이 그렇게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니 진수의 가슴도 찢어지듯 아팠다. 그냥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나갔던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을까? 그 순간만큼은 라이터가 저주스러웠다. 아무리 좋은 의미로 자기에게 다가왔다고 믿고 싶어도, 현아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라이터를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현아에게 유정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정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어야 한다는 말인가?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라이터를 내다 버릴 것이 아니라 아예 조각조각 부숴버릴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렇게 라이터가 어떤 농간이라도 부릴 수 없도록 했다면, 지금의 이런 사태는 없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 정도로 라이터를 원망했다. 그만큼 애처로운 현아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진수는 밤새 꿈에 시달리다가 새벽이 되어 잠자리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며칠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꿈에 시달리던 진수는 휴일을 틈타서 현아와 살던 집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그 지역 일대는 지금 재개발이 시작되려는 듯 온통 공사로 복작거렸다. 아마 현아와 살던 그 당시에는 재개발이 끝나서 주민들이 입주를 막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 같았다. 그곳에서도 현아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때는 현아와 주혁이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진수는 길가로 나오다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 길 건너를 바라보았다. 다행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레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마 주택가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 같았다. 진수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진수를 반겨주는 주인 여자의 모습은 현아와 함께 왔을 때 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주인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진수는 자기가 앉았던 창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카페 안에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이전(사실은 더 미래였겠지만)과 하나도 다름없었다. 진수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오며, 앞으로는 가끔 들려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해가 다 지나갈 무렵 진수는 갑작스럽게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가족과 주변의 친구들은 도무지 왜 그러냐고 하면서 진수를 만류했지만, 진수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 길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라이터를 원망하면서 지냈다가 한동안은 다시 라이터에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지내기도 했었다. 그때 느꼈던 생각은 어쩌면 라이터가 자기에게 그런 조화를 부린 것도 모두 진수가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올바르게 찾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년 앞의 모습도 미리 겪도록 해주었고, 다음으로는 적절한 시기에 자기를 다시 지금의 세상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난번 꿈속에서처럼 현아의 모습은 슬프게 보였지만, 그런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모두가 결코 진수가 가슴 아파만 하고 지내지는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일종의 암시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출근하고 있는 연구실까지도 진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말이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누가 진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주위에는 아무런 말을 하지도 않은 채, 진수는 그렇게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진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레테에서 자기가 주혁의 얼굴을 하고 있던 진수 자신을 만났을 때, 자기가 주혁과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였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써야 하겠다고 생각한 이후로 진수는 레테에 더욱 자주 나가 있었다. 카페가 워낙 조용해서 글쓰기에 적당했을 뿐 아니라, 가끔은 현아 생각에 잠겨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수의 글쓰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전에 주혁의 이름으로 글을 써서 출간한 경험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전에는 글을 써본 적이 없어서 감히 글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의 진수는 이미 출간 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새로운 소설을 쓰지 못하란 법도 없었다. 소설은 당연히 현아와 진수의 이야기였다. 주혁이 등장하는 구조는 삭제해 버렸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너무 상세하게 타인의 모습을 그리는 소설이 될 것 같아서이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레테에서는 글이 잘 써졌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을 지금처럼 실감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진수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벌써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책을 두 권이나 출간했다. 그리고 레테 주인 효숙과는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효숙은 진수가 갈 때, 간혹 손님이 없는 경우에는 진수와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진수의 글 쓰기와 레테 출입은 점점 일상이 되어갔고, 충분한 수입은 아니지만, 몇몇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일과 작은 규모의 강연을 통해서 작가로서의 길을 차분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돈 문제는 어차피 자기 혼자만의 생계를 책임질 정도의 수입이면 충분했으므로, 지금의 수입만으로도 큰 걱정은 없었다. 공연히 조금 더 넉넉한 생활을 하겠다고 글 쓰기와 관련 없는 다른 일거리를 찾았다가는, 기껏 자리를 잡아가는 작가로서의 일상마저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수는 일을 찾아도, 글 쓰는 작업과 관련 없는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진수가 그렇게 글에 집착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미 주혁의 미래를 다 알고 있는 진수는 언젠가는 현아 앞에 다가갈 기회가 있을 때, 작가인 진수로 다가가고 싶었다. 현아도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저 일상이 단조롭고 삭막한 회사원 진수로 현아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갈 기회는, 비록 자기 손에서는 떠났지만, 라이터가 이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이터가 자기 손을 거친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믿음이 더욱 진수를 글 쓰기에 전념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진수는 레테에서 뜻밖의 사람을 보았다. 현아와 주혁이었다. 진수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의 현아는, 주혁의 기억이 이상해지면서 자기는 주혁이 아니라 진수라는 사람이라고 하던 시기를 겪기 이전의 현아였으므로, 설령 눈을 마주친다고 해도 전혀 자기가 진수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더군다나 현아는 지금의 진수 얼굴을 모르지 않는가. 주혁과 현아는 창밖 공사장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년 봄이면 주혁과 현아가 결혼해서 지금 공사가 한창인 이 동네에 신혼살림을 차릴 것이다. 아마 그래서 집 짓는 모습을 보려고 가끔 이 동네에 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진수는 계속 그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무엇인가 쓰는 것처럼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주혁아, 이제 집 거의 다 지은 거 같아. 조금만 지나면 우리가 미리 들어와서 살아도 되겠다.” 창밖을 보던 현아가 말했다. “그러게, 이제 정말 우리 집이 다 지어졌네.” 그들은 그저 집 이야기와 보통의 연인들이 데이트하면서 할 만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진수는 현아가 주혁과 함께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자기가 주혁의 위치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처럼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현아가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자기가 그런 여자와 삼 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고 생각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현아 앞에 내가 진수다.라고 하면서 나타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진수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현아와 주혁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수가 일어서서 카페를 나가려는데, 효숙이 진수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도 글을 쓰시는 분이라고 하셨죠?” 진수는 뜻밖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 그래요. 소설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그러자 효숙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아, 별건 아니고요. 아까 금방 나가신 두 분도 글을 쓰시는 분이라고 해서요. 여기 자주 오시거든요.” “아, 그런가요? 몰랐어요. 저는 여기에서 처음 뵙는 분들이라서요.” “그렇죠? 선생님께서 오시는 시간에는 잘 안 오셨으니 보신 적이 없을 거예요. 하하하.” “아, 그랬군요. 인사는 나누지 않았지만, 그래도 글을 쓰시는 분이시라니 반갑네요. 하하하.” 웃음을 짓던 진수는 효숙의 다음 말에 깜짝 놀랐다. “그래요? 그러면 나중에 혹시라도 같이 들리실 때가 있으면,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사람들은 참 좋으신 분들이세요.” “아, 네. 하긴 글 쓰는 사람끼리 서로 알아서 안 좋을 일은 없겠죠.” 그냥 가볍게 인사치레로 대답하고 진수는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카페에 갈 수 없었다. 아직 현아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진수가 다시 레테를 찾은 것은, 그해 겨울이 다 가기 전인 2019년 2월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두 달 후면 주혁과 현아가 결혼할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벌써 이렇게 되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효숙이 활짝 웃으면서 반겼다. “아이, 왜 이렇게 오랜만에 들리셨어요? 어디 다녀오셨나 보죠?” 진수는 자세히 말하기 귀찮기도 해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 좀 다녀올 곳이 있어서 그동안 들리지 못했네요. 저 따듯한 커피 한 잔 마실게요.” “네, 그러셨구나. 자리에 앉아 계시면 커피를 갖다 줄게요.” 효숙이 커피를 내리려고 돌아서자, 진수는 매번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에 보이는 주택들은 이제 모두 완성이 되어서 골목 안은 아주 깨끗한 주택가로 탈바꿈하였다. 주택들을 바라보다 보니 현아와 같이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자기가 처음으로 주혁이 된 날, 현아의 어머니가 오신다고 해서 잠시 여기 카페에 나와 있었지 않은가? 아마 일 년 정도 지나고 나면 그날이 돌아올 것이다. 과연 진수는 자기가 여기에서 주혁과 마주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지금이면 가능하겠지만, 일단 자기가 주혁이 되고 난 후에도 지금처럼 진수의 몸으로 주혁의 몸에 들어가 있는 진수 자신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라이터라고 해도 그런 재간은 부리지 못할 것 같았다. 하긴 오래된 이야기라서, 진수가 처음 주혁의 몸으로 이곳에 왔을 때, 자기 말고 다른 손님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마 한 명인가 있었던 것도 같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효숙이 커피를 들고 진수의 테이블로 왔다.
“그동안 바쁘셨나 봐요?” 효숙이 커피를 진수 앞에 놓으며 말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가끔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테이블에 같이 앉은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네. 집안일로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못 들렀어요. 잘 지내셨죠?” 진수도 그냥 인사하듯 대답했다. “그동안 그분들 몇 번 다녀가셨어요.” “그분들이라니요?” “아, 제가 말씀드린 그 글 쓰신다는 분들 말이에요. 남녀 두 분이 자주 오신다고 했잖아요?” “아, 그분들이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진수는 효숙이 진수에게 주혁과 현아를 기회가 되면 소개해 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설마 하는 생각에 물었다. “제가 전에 그분들과 함께 오실 기회가 있으면 소개해 드리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얼마 전에 선생님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들도 반갑다고 하시면서, 언제 한 번 마주치게 되면 인사나 하고 지내고 싶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아, 그러셨어요? 저는 그냥 그때 지나가는 말로 하신 것인 줄 알았죠. 하하하.” “아이, 제가 손님들과 실없는 이야기를 왜 하겠어요? 그냥 제 가게에 글 쓰시는 분들이 찾아주시는 것이 희한해서 이야기를 드렸던 것인데, 마침 그분들도 무척 반가워하신 것이고요.” “그러면 요즘도 자주 들리시나요? 오늘이라도?” “아, 잘 모르겠네요. 그분들 4월엔가 결혼하시느라 바쁘다고 하셨거든요. 매번 올 때마다 창밖의 공사 현장을 바라보면서 말을 나누시길래 궁금해서 물어봤죠. 그랬더니 아마 신혼집이 저기 어디쯤인가 봐요. 그러니 앞으로도 자주 오실 것 같아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집이 바로 저 집이거든요.) 진수는 효숙을 쳐다보며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여기에 계속 들리면, 언젠가는 뵐 수도 있겠어요.” 진수는 그저 가볍게 웃으면서 효숙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쉬고 계세요.” 효숙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효숙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조만간에 주혁과 현아와 인사를 나눌 기회가 생길 것 같았다. 진수가 그들과 만나게 된다면 조금은 서먹한 인사가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피할 자리까지는 아닐 것 같았다. 진수가 사실은 정신이 말짱한 주혁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혹시라도 그렇게 주혁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혁과 현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뜻밖에 현아와 주혁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진수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현아와 살던 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