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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Sep 19. 2024

라이터 Lighter_16

되살아난 기억_2

어제는 오랜만에 기준과 술을 마셨다. 사실 진수가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주위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한 것도 사실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준만은 가끔 만나서 술자리를 가졌다. 물론 주희도 함께 만났다. 진수는 원래 보통의 남자들이 친구와 만날 때는 여자 친구가 같이하는 것을 약간은 꺼리는 것에 비해서, 주희가 함께 하는 자리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주희와 기준을 보면 마치 주혁이었을 때의 자신과 현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주희는 주혁과 직접적인 접점은 없는 동창이었다. 하지만 진수는 주희를 볼 때마다 현아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진수야, 그런데 너 담배 피우지 않았어? 피웠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예 피우지 않네?” 기준은 술자리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진수를 이제야 확인한 듯 물었다. “아, 나 담배 끊었어. 지난번에도 너 만날 때 담배는 피우지 않았는데, 몰랐어?” “그랬어? 언제부터?” 기준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듯 물었다. “왜? 너도 끊게? 아주 간단해.” “그래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옆에서 주희가 관심이 있다는 듯 달려들었다. 진수는 주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간단해요. ‘나는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라고 자신을 세뇌하는 거죠.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담배를 끊을 일도 없다.라고 말이죠.” “그냥 그렇게 하면 담배를 끊을 수 있어요?” “아니죠. 정확히 말해서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는 거죠.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끊을 담배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간단한 것 같지만 고도의 정신력 집중이 필요해요. 담배를 끊어야지. 하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금연은 실패합니다. 그리고 누가 혹시라도 담배를 권하면, ‘아, 저 담배 끊었어요’라고 말하면서 담배를 거절하는 사람이라면 금연은 실패합니다. 무조건 ‘아, 저는 담배를 피우지 못합니다.’라고 거절해야 하는 거죠. 사실이 그렇잖아요? 담배를 끊어야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는 담배를 원래 피우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니라, 담배를 못 피우게 됩니다. 저는 그렇게 담배를 안 피우게 되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주희가 기준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쉽네. 자기도 이제부터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되겠다.” 순간 기준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말이 없었다. “왜? 담배 끊기 싫어? 진수 씨 봐. 단번에 끊었다잖아.” 둘을 바라보던 진수는 속으로 웃었다. “아,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금연의 절대적인 조건은 바로 ‘사랑’입니다. 냄새나는 담배를 피우던 입으로 사랑하는 여자에게 키스하는 남자는 문제가 있는 남자거든요.” 진수가 기준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기준이 말을 받았다. “아, 이거 진짜 나를 순식간에 무지한 놈으로 만드네.” 아마 이제는 기준도 다음에 볼 때는 비흡연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주희가 진수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고맙다는 듯 씽긋 웃었다. 진수도 현아를 떠올리며 함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어차피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현아와 유정을 위해서라도 다시 담배를 피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금연은 진수에게 아주 맑은 정신을 유지하게 해 준 덕분에 글에도 더욱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준과 주희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진수도 이내 집으로 발을 옮겼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골목을 지나치려니, 갑자기 그 남자가 떠올랐다. 자기에게 라이터를 건네준 그 남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저만치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때 자기가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면, 자기의 일상은 평범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랬을 것 같지도 않았다. 라이터가 자기를 찾아온 것이라면, 꼭 그날이 아니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손에 들어왔겠지. 그리고 자기는 현아와의 일상이든 다른 일상이든, 어쨌든 변화는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택한 이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한 진수는 옷을 벗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틀었다. 정수리를 때리는 물살이 마치 현아의 집에서 처음 욕실에 들어갔을 때처럼 느껴졌다. 그런 것을 보면 이제 자기의 일상 하나하나가 현아와의 추억을 불러오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만에 레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효숙이 반갑게 맞았다. “선생님, 마침 잘 오셨어요. 오늘은 드디어 작가님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네요. 호호.” 효숙이 말하며, 예의 그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주혁과 현아가 앉아서 환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수가 잠시 입구 앞에 서 있자니, 효숙이 주혁의 테이블로 가서 진수를 가리키며 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고 다시 진수에게 돌아왔다. “제가 저분들께 선생님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만 괜찮다면 잠시 자기 테이블로 모셔도 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떠세요?” 주혁과 현아의 테이블을 바라보던 진수가 말했다. “그러면,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가서 인사를 나눌까요?” 효숙이 진수를 그들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자, 인사들 하세요. 작가 선생님들.” 효숙의 말에 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주혁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전현아라고 하고요. 우연히 여기 사장님께 선생님이 소설을 쓰시는 작가님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수는 본명으로 인사를 해야 할 것인지 망설이다가, 나중에 주혁의 입에서 진수라는 이름이 나올 때를 생각해서 그냥 지금은 필명으로 인사하기로 하고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강이석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진수는 주혁과 현아를 번갈아 보며 인사하고는, 그들이 권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진수의 정면에는 주혁이 있었고, 그 옆으로 현아가 앉았다. 얼마 만에 바로 눈앞에서 보는 모습인가. 현아는 진수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 모습이 결혼 전의 모습이었나? 하고 잠시 생각에 빠진 진수에게 주혁이 물었다.     


“선생님은 어떤 소설을 쓰시는 분인가요? 저는 얼마 전까지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추리 소설을 쓰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저는 그냥 로맨스 소설입니다. 소재는 조금 평범한 편이죠? 추리 소설은 쓰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하하하. 아닙니다. 추리 소설도 소설이죠. 추리 소설이건 로맨스 소설이건 모두 소설가라면 다 쓸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작가님도 쓰실 수 있을 거고요.” “그러면, 혹시 전공이 그쪽이신가 보죠?” 진수의 물음에 주혁이 웃으며 말했다. “네, 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학과 동기 동창이고요. 하지만 사실 글을 쓰는 데에는 꼭 문창과를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글을 쓰시게 되었나요?” “저는, 이거 민망합니다. 전공자분들 앞인데, 저는 원래 반도체 회사 연구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생기는 바람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기로 하고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여간 힘들지 않네요. 역시 저 같은 비전공자가 넘볼 영역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하하하.” 진수의 말을 들은 현아가 말했다. “아니에요. 꼭 전공자만 글 쓰란 법도 없죠. 그리고 전공자라고 모두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요. 저만해도 그렇거든요. 여기 주혁이만 글을 쓰고 저는 그냥 무늬만 문창과 졸업생인걸요? 오히려 작가님 같으신 분들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보다는 어색하지 않게 주혁과 현아를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혁은 진수가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언젠가는 꼭 로맨스 소설을 써봐야 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서로 소설 집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번에는 진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 같아서는 현아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첫 만남에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후, 진수는 가끔 레테에서 주혁과 현아를 만났다. 만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일상적인 대화로 시간을 보냈다. 둘은 결혼해서 레테의 창밖에 보이던 집에 신혼살림을 꾸몄다. 그리고 드디어 주혁의 첫 장편 추리 소설이 출간되었고, 신예 작가로서는 대단한 호평을 받아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진수의 기억이 옳다면, 아마 일 년 정도 지나서는 자신이 주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레테에서 자기가 주혁이 된 경위를 파악할 때까지 현아와의 잠정적인 동거를 결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아와 헤어지고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다. 원치 않는 라이터의 장난으로 현아의 인생 한가운데로 떨어져서 삼 년 가까이 그녀와 지냈다. 그리고 원래의 진수로 돌아와서 지금이 사 년째 현아를 그리며 살고 있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삶이었지만, 이제는 진수도 현아를 만나기 전인 회사원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혹시라도 자기의 기억대로 주혁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현아와 다시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지금의 진수를 떠받치고 있었다.     

 

레테에 드나들면서 신경이 쓰인 일은 자기가 주혁의 육체로 깨어난 날 이후의 상황이었다. 현실 속의 진수 자신은 지금 이렇게 원래의 모습으로 카페를 드나들고 있는데, 그곳에서 현아의 눈에 기억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주혁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는 자기가 원래의 모습인 채로 있으므로, 주혁이 기억을 잃는다든지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안 될 것이다. 라이터가 어떤 능력을 펼치든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겪어오지 않았던가? 진수가 겪은 불가능한 일이 이제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불가능한 일과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이렇게 지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020년 5월 20일 진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자신의 기억에 남은 시간보다 조금 늦게 카페를 들어섰다. 입구에 도착하니 마침 현아도 카페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둘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이층 계단을 올랐다. 우연히 강이석과 마주친 현아는 미리 와서 앉아 있는 주혁이 신경 쓰였다. 이 남자는 주혁이 갑자기 기억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모를 텐데, 가능하면 그냥 인사만 하고 동석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저기 창가 자리에 앉아 계세요. 어떻게 함께 들어오시네요?”라는 주인의 인사에, 우연히 입구에서 만났다고 대답하고는 주혁이 앉은 자리로 향했다. 현아와 함께 주혁의 테이블로 간 진수는 “이 작가님 오랜만입니다.”하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주혁도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요즘 저희도 자주 들리지 않아서 뵙지 못했나 봅니다.” “뭘요, 저도 실은 자주 들리지 못했어요. 그러면 나중에 또 이야기하기로 하고,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진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혁과 현아가 앉은 자리를 지나 안쪽 자리에 앉았다. 진수가 자리에 앉자, 현아가 주혁에게만 들리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입구에서 만나서 같이 올라왔어. 저분, 강이석 작가님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그건 그렇고, 어때? 커피 맛 좋지?” 진수는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 진수가 가장 궁금했던 불가사의한 일이 라이터에 의해서 일어난 것 같았다. 자기가 자기의 얼굴을 하고 주혁의 육체에서 깨어난 오 년 전의 자기 모습을 보고 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응, 아주 맛있는데?” 주혁의 대답에 깜짝 놀라는 현아의 얼굴이 진수의 눈에 들어왔다. “기억이 돌아온 거야?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 “아냐, 아직은. 그래도 네 말대로 이제 주혁이에 적응해 보기로 했어.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해 보니, 계속 어리둥절한 상태로 여기에 적응하지도 못한 채 지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네가 나보고 너한테 반말로 말하라고 했잖아?” 주혁의 대답에 현아는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현아야! 이제 된 거지? 어때? 내 기억이 말짱해 보이기는 해? 하하하” 주혁이 웃는 소리가 진수의 귀에까지 크게 들렸다. 이어서 현아의 목소리도 들렸다. “야. 너 진짜 놀릴래?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아? 하여간 이렇게라도 너랑 다시 이야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지. 가끔 네가 기억나간 것처럼 행동할 때는 내가 알아서 도와줄게.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자. 알았지?” “그래, 알았어. 잘 지내보자.” “이제 집으로 들어가자, 엄마도 갔으니까, 집에 가서 좀 누워서 쉬자. 나 신경을 써서 그런지 조금 피곤한 것 같아.” “그래, 그럴까?” 주혁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진수에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갔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듣고 진수는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까 그 대화는 분명 주혁으로 깨어난, 진수 자신과 현아가 나누었던 대화가 틀림없었다. 도무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라이터의 능력이 신비하다고 하더라도, 무슨 평행 우주도 아니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2020년에는 진수가 두 명이 되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라이터와 관련된 일은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라는 사실만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경험했던 미래의 기억대로 앞으로 일 년 정도 후에는 주혁의 새로운 로맨스 소설이 출간될 것이고, 다시 일 년이 또 지나면 그들 사이에 딸 유정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나면 주혁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현아와 유정만 남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미리 다 알고 있는 진수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시점에서 자신이 주혁이나 현아의 인생에 뛰어들거나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건 아마도 라이터의 영역일 것이다. 

    

진수는 이제 모든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라이터로 인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힘으로도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저 진수는 현아와 주혁을 지켜보다가 주혁이 세상을 떠나면, 그때라야 비로소 어떤 방법을 통하든 현아 앞에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주혁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안타깝지만, 만일 라이터가 이 모든 일들을 전부 설계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혹시, 진수 자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던 주혁이 세상을 떠난 후에 홀로 남겨질 현아의 일생을 진수가 함께하게 하려고 오 년 전에 미리 둘을 만나게 해 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억측일 수도 있다. 허무맹랑한 헛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일이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주혁과 현아는 진수의 존재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지만, 진수는 라이터의 이 같은 농간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일이야 어찌 된 영문이건 간에 진수는 현아와 가까워질 날이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만 굳게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진수는 주혁과 현아가 결혼하고 나서는 레테 출입을 줄였다. 아무래도 주혁으로 깨어난 자신과 이야기하는 기분이라서 좀 이상하기도 하고, 주혁이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수로서는 아닌 척해야 하는 현아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아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주혁이 잠시 기억이 이상해졌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텐데, 레테에서라도 자주 자기를 마주치면, 마음이 불편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당분간 레테에는 가지 않기로 하고, 집필 중이던 소설의 마무리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세월은 역시 빨랐다. 주혁과 현아가 결혼하고 이 년이 지났으며, 주혁의 새로운 로맨스 소설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아마 진수와의 이야기 이후에 로맨스 소설의 창작에 열을 올렸던 모양이었다. 소설의 내용도 좋고, 추리 소설 작가 같지 않은 부드러운 문체가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 출간작이 추리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소설 작가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에 대해서 문단에서는 호평이 줄을 이었다. 진수는 어차피 자기가 쓴 소설이었으므로 내용은 다 알고 있었지만, 서적을 주문해서 읽어 보았다. 자기가 쓴 글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물론 사람들은 주혁이 집필한 작품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두 해가 또 지나는 동안 진수는 열심히 글을 써서 세 번째 소설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내년 초쯤 소설을 출간하게 되면, 세 번째 출간작이 되는 셈이다. 이제 작가의 삶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비록 간신히 혼자 먹고사는 정도이지만 생활도 안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주혁과 현아는 딸 유정을 낳았다. 그리고 그해 늦은 가을 결국 꿈속 그 남자의 예견대로 라이터가 주혁의 손을 떠나면서 주혁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진수는 자신이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와서 주혁의 사망 소식을 듣자, 잠시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제 주혁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진수와 현아와 유정만 남았다. 이 모든 일이 진수가 집으로 돌아온 지 팔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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