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인연_1
주혁이 떠난 지 일 년 하고도 몇 달이 순식간에 지났다. 현아는 여전히 유정을 데리고 친정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시어머니 윤희로부터 전화가 한 번 있었고, 윤희의 제안을 전해 들은 현아의 부모와 현주도 현아의 재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아 자신은 전혀 생각이 없었음에도 양가 어른들의 입장은 거의 공감대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주혁도 없는 처지에 현아도 계속 혼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었다. 이제 유정도 어느 정도 컸으므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맡기고 현아도 일을 시작해야 했다. 현아는 출판사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라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다행스럽게 김 대표는 현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재택으로 할 수 있는 교정, 교열, 윤문 일을 주선해 주었다. 덕분에 현아도 이제 주혁을 보낸 상심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든 사회로 돌아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현아는 이제 지난 시절만 되돌아보면서 살 수는 없었다. 주혁이 있을 때는 주혁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했고, 그 후로는 친정의 부모님과 동생 현주가 도와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당장 재혼하지는 않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유정에게도 아빠가 필요할지 모른다. 아직은 어리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이모도 있으니까 그럭저럭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다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빠가 없는 공백은 커져만 갈 것이다. 자신은 남자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과 유정이 아빠 없이 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현아도 결심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언니 시간 있어? 나랑 이야기 좀 할래?” 현주가 방문을 열고 물었다. “응, 왜? 무슨 말인데?” 예상치 않던 현주의 말에 현아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다른 말은 아닌데, 음. 아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그래, 말해 봐.” “언니, 남자 한번 만나 볼래?”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현주의 물음에 현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현주야. 무슨 남자? 형부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무슨 남자를 만나라는 거야?” 현아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만나보라는 거야. 언니 어차피 혼자 못 살잖아. 내가 알아. 언니가 남자 없이 혼자 살 여자가 못 된다는 거 말이야. 그러니 어차피 재혼하려면 하루라도 일찍 하는 것이 좋지 않냐 하는 말이야.” “아니, 너 갑자기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언니가 언제 재혼하고 싶다고 했니?” “그러니까 말이야. 그러면 언니가 형부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 유정이 할머니 할아버지께 ‘이제는 재혼하겠습니다.’라고 할 것도 아니잖아. 아니다, 그 어른들께서 먼저 언니 보고 재혼하라고 하셨다면서?” 현주는 단단히 결심하고 현아를 몰아세웠다. “몰라, 아무튼 나는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나 있어.” “그러면 언제까지 이 집에서 이러고 살 건데? 아빠 없는 유정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아빠라면 정신 못 차리고 따르던 애가, 갑자기 아빠가 없어진 것을 알고 있기나 해?” 현주도 물러서지 않았다. “몰라. 생각 없으니 다시 이야기하지 마.” 현아가 그 정도에서 말을 잘랐다. 그러자 현주가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하여간 알아서 해. 그냥 주위에서 밀어줄 때 못 이기는 척하고 가는 것이 좋을 거다. 나중이라도 마음 정해지면 말해. 내가 다 남자 알아보고 이런 말 하는 거야. 괜찮은 남자니까 소개해 주려는 거지. 그리고 지금 언니가 재혼하면 아직 뭘 모르는 유정이에게는 아빠를 만들어 주는 것이지만, 나중에 유정이가 다 큰 다음에라도 언니가 재혼하려 하면 그건 유정이 입장에서는 엄마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거라고. 뭘 알기나 해? 그러니까 일단 사람을 만나보기나 해. 그 남자, 언니 사정 다 알아. 유정이 있는 것도 다 말했고, 그래도 좋다고 한 사람이야.” 현아는 멍하니 현주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기는 주혁을 생각하면 솔직히 벌써 재혼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문득 현주가 말하는 남자가 궁금해지기는 했다. 도대체 어떤 남자이길래 딸이 있는 여자도 상관없다고 하는지, 그 점이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주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 재혼하면 유정에게 아빠를 만들어 주는 것이지만, 나중에 재혼하면 유정으로부터 엄마마저 빼앗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유정이가 나이가 들고 청소년기가 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주는 현주대로 언니와 이야기하다가 화가 나서 그냥 방을 나와 버렸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언니의 심정도 이해할 것 같았다. 아무리 주위에서 재혼을 권한다고 해도 형부가 떠난 지 이 년도 채 넘지 않았는데, 재혼 이야기를 꺼내니 발끈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도 주혁이라면 언니 못지않게 따르고 좋아했지 않은가? 자기도 언니가 형부를 일찍 잊어버리는 것을 원해서 재혼을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재혼하게 되면 새로 들어오는 형부 생각만 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때가 있는 법이다. 다행스럽게 아는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형부 감을 찾았는데, 언니가 말도 못 꺼내게 하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말도 못 하고 현주 자신에게 넌지시 미는 눈치인데, 자기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아무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현주가 거실로 나오자, 상철과 희숙이 현주에게 물었다.
“어때? 네 언니가 뭐래? 재혼하겠대?” “아니. 딱 잘라서 안 한다지 뭐. 그냥 잘 생각해 보라고 했어. 강제로 시킬 수는 없잖아.” 현주의 대답에 희숙이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언제까지 혼자 살려고 하는지 원. 사돈께서도 재혼을 권하셨다고 했잖아. 유정이는 일단 잠시 키워주신다고 말이야.” “그러게. 유정이가 뭘 모를 때 재혼해야지, 나중이 다 커서 사춘기나 뭐 그럴 때 언니가 재혼한다고 해 봐. 유정이가 뭐라고 할지 모르잖아. 엄마가 무슨 남자 없이 못 살겠다고 새로 시집가냐고 막 그럴지도 모르고. 여자애들, 모녀 같이 자매 같이 엄마랑 둘이 지내다가 엄마가 결혼한다고 하면, 엄마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한다잖아. 물론 유정이가 그럴 거라는 건 아니지만.” “그러게나 말이다. 아무튼 나중에 다시 말해 보자.” “참, 네가 알아봤다는 남자는 어떤 남자래? 괜찮은 남자인가? 유정이 있어도 상관없대?” “아, 내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재호가 알아본 거야. 아는 선배 주위에 있는 남자라는데, 사람은 착실하고 성실하대.” “그래? 뭐 하는 사람인데?” “아. 그게. 형부처럼 글 쓰는 사람이래. 그래서 내가 더 마음이 끌리는 거지. 재호가 그 선배에게 언니 사진을 보여줬다고 하더라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언니 사진을 보고는 좋다고, 만나게 해 달라고 했대. 하긴 언니가 사진으로 보면 좀 사람들 시선을 끌기는 하잖아. 그래서 언니만 좋다고 하면 본격적으로 추진해 보려는데, 저렇게 싫다고 잘라 버리잖아. 그 남자는 언니랑 만나게 해 달라고 그랬다는데. 나만 실없는 사람 될 판이야.” “너 혹시 그 남자 사진 가진 것 있어? 엄마도 좀 보자.” 현주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었다. 희숙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사람은 좋아 보이는구나. 느낌이 꼭 주혁이랑 비슷한 것 같아. 네 언니가 좋다고 하면 좋겠다.” “누가 아니래? 내가 봐도 딱 마음에 드는구먼. 그리고 나이도 언니랑 동갑이라잖아. 언니 동갑 좋아하는데.” 현주의 말에 희숙은 차마 현아에게 말은 못 하고, 그냥 상철의 얼굴만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냥 얼굴이라도 보고 나서 생각해도 되잖아.” 아내의 말에 상철은 그저 아무 말도 없었다.
현아는 모처럼 집에서 나와 차를 몰았다. 어느새 밖의 날씨는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유정은 엄마가 봐준다고 했으니, 일단 출판사에 들려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재택근무 형식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어도, 김 대표 얼굴은 한번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주혁이 가고 나서 출간한 책도 서로 얼굴을 보기 뭐해서 택배로 받았기 때문에 김 대표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대표님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김 대표가 현아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전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유정이도 잘 지내죠?” “네, 잘 크고 있어요. 그리고 저, 아직 작가는 아니에요. 주혁이만 글을 썼고, 저는 아직 작품을 써보지도 않았잖아요.” “아니죠. 그래도 저희에게는 작가님입니다. 하하하.” 현아는 인사말을 나누고 나니, 그저 일을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 밖에는 특별히 할 말도 없었다. “일단 처음이니까 열심히 해 볼게요.” “네, 작가님이 해주신다니까 우리야 좋죠.” 현아는 간단히 김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일어나 대표실을 나왔다. 김 대표가 따라 나와 현아를 배웅하며 앞으로 잘해보자고 말했다. 그때 현아는 사무실로 들어오는 한 남자를 보고 잠시 멈칫하며 놀랐다. 그 남자도 역시 대표실에서 나오던 현아를 보고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김 대표가 현아에게 물었다.
“왜, 저분 혹시 작가님이 아시는 분인가요?” 깜짝 놀라서 잠시 멈칫거렸던 현아가 김 대표의 말에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여기에서 출간하시는 작가님인가요?” “네, 그래요. 저희와 일한 지 조금 되시는 분이에요. 강이석 작가님이라고 소설을 쓰시는 분인데, 아, 맞다. 저 작가님도 이주혁 작가님 추리 소설 출간할 때쯤 오셨던 것 같은데, 혹시 작가님이 아세요?” 현아는 자기가 잘못 본 줄 알았는데, 김 대표의 말을 듣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레테에서 가끔 만났던 사람을 출판사에서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줄은 몰랐다. 김 대표와 현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진수가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전 작가님을 이곳에서 뵙네요? 오랜만입니다.” 진수가 현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현아도 엉겁결에 진수의 인사를 받았다. “두 분께서 서로 아시는 사이인 줄 몰랐습니다. 세상 좁은 모양이에요.” “그렇네요. 대표님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두 분 말씀 나누시고요.” 현아는 자리를 피하고 싶은 것처럼 김 대표를 보며 말했다. “강 작가님도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뵐게요. 오늘 반가웠습니다.” “네, 다음에 뵐게요.” 김 대표와 진수가 동시에 현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현아는 진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작가님, 잠시 들어가시죠. 모처럼 오셨는데, 아직 식사 때는 아니고 차라도 한 잔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그러면 잠깐 앉았다 갈까요?” 진수는 김 대표를 따라서 대표실로 들어갔다. 진수에게 자리를 권한 김 대표가 물었다. “그런데 아까 두 분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가요?” “아, 어떻게 하다 보니 알게 되었어요. 제가 시간이 날 때, 자주 들렸던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서 뵈었죠. 이주혁 작가님과 함께 뵈었습니다. 참. 이 작가님 일은 안되었더라고요. 아까는 내색도 못 했습니다.” “그래요. 아까운 분이 너무 일찍 가셨어요.” “그런데 혹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었나요? 전 작가님은 글을 아직 쓰지 않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궁금했던 진수가 넌지시 물었다. “아, 그게. 얼마 전에 연락이 왔어요. 일을 좀 할 수 있냐고 말이죠. 이 작가가 그렇게 가고 나서 아마 딸을 데리고 혼자 사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러니 아무래도 일을 하긴 해야 하겠죠? 그래서 제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해서 아이도 있으니, 출근은 좀 힘들 것이고 재택근무 형식으로 일이 있을 때마다 교정, 교열, 윤문 작업을 해줄 수 있냐고 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오늘 인사차 오신 모양이에요.” “아, 그러셨군요. 원래는 글을 쓰셔야 하는 분인데.” 진수가 말끝을 흐리자 김 대표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전 작가님 교정 실력은 꽤 좋습니다. 이주혁 작가님 원고도 일차적으로 전 작가님이 다 확인하신 후에 우리 출판사로 넘어왔어요. 그래서 이주혁 작가님 원고는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거든요. 그런 경험이 있기에 제가 일을 드리겠다고 한 것이고요.” 김 대표의 말을 들은 진수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 주혁이 떠난 후, 유정과 둘이 살아가려면 현아도 어차피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은 출판사 일도 접근하기 좋은 일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 하긴 그런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면, 충분히 일을 맡을 수 있겠네요.” 진수는 김 대표의 말에 그냥 형식적인 말로 맞장구를 쳤다.
김 대표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준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기준과 주희를 만난 자리에서 주희가 느닷없이 현아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혹시 만나볼 의향이 있으면 자기가 주선하겠노라 말했다. 진수는 평소에도 여자를 소개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해 왔던 터라,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도대체 주희가 현아를 어떻게 알고 자기에게 소개하겠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갑작스러워하는 진수에게 주희는 잘 아는 후배가 있는데, 지금 보여준 여자는 그 후배와 결혼할 여자의 언니라고 했다. 결국 그 후배의 손윗동서 될 사람을 자기가 직접 물색하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진수는 모르는 척 어떤 여자냐고 물었다. 주희가 그 후배와 어떤 사이인지는 몰라도, 그 후배는 현아를 아주 좋은 여자라고 추켜세우며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단, 얼마 전에 남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세 살짜리 딸을 하나 키우는 중이라고 했다. 처음 사진을 볼 때는 현아와 너무 닮아 보이길래 혹시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아가 맞았다. 아마 현주의 남자친구인 재호가 바로 주희가 말하는 후배인 것 같았다. 세상은 참 좁았다. 주혁이 출간했던 출판사를 진수가 선택한 것은 사실 어느 정도 의도적인 부분이 있었다. 주혁으로 깨어난 후 책을 출간할 때 만났던 김 대표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음에도 오늘처럼 출판사에서 현아를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이제는 주희와 재호, 그리고 현주를 통해서 현아까지 연결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세상이 정말 좁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라이터의 농간이라고는 하지만, 재호는 몰라도 현아를 모르는 주희가 어떻게 결혼한 적도 없는 진수에게 딸이 있는 현아를 소개할 생각까지 했는지, 너무 소설 같은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보통의 남자라면 애가 딸린 사별녀를 소개받고 좋다고 승낙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진수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진수는 그날 주희에게는 그렇게까지 권하니 여자 쪽에서만 좋다고 하면 만나보겠다고 일단 승낙은 해 두었던 일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돌아온 날부터 다시 현아의 일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출판사 일을 하는 것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주희가 자기에게 현아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만남을 타진했듯이, 아마 재호도 현아에게 진수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의사를 타진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현아는 진수의 얼굴을 금방 알아보았을 것이다. 레테에서 가끔 만났던 사이인 만큼 진수를 몰라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현아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했다. 만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주희를 통해서 연락이 왔을 것인데, 오늘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별로 반응이 좋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해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진수는 자신이 직접 현아에게 어떤 시도를 한다는 것은 보편적 정서를 가진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별한 지 채 이 년도 안 지났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에 진수는 그저 전전긍긍만 할 뿐이었다. 당장은 주희의 회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언니. 이야기 좀 해.” 집에 들어오는 현아를 보고 현주가 말했다. “너랑 무슨 이야기를 또 해? 남자 이야기라면 됐다. 관심 없다고 했잖아.” 여전히 현아는 현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자기를 내보내지 못해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아. 알았고, 일단 그냥 얼굴만이라도 봐. 나도, 재호도 그쪽에 이야기를 다 해서 우선은 언니 한번 보겠다는 승낙을 받았잖아. 그런데 언니가 싫다고 하니까 우리만 실없는 사람이 된 거고. 그러니 그냥 얼굴이라도 보고, 그래도 싫으면 더 이상 이야기 안 할게. 자. 이 사람이야.” 현주는 휴대전화로 받은 진수의 사진을 현아의 눈앞에 내밀었다. 사진을 본 현아가 갑자기 깜짝 놀랐다. 어떻게 현주가 강이석 작가의 사진을 갖고 있는 것일까? 재호가 소개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재호가 강이석 작가와 아는 사이인가? 순간적으로 현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생각지 못하게 사진을 보고 놀라는 현아를 보면서 현주 또한 놀랐다. “언니, 혹시 아는 사람이야? 왜 그렇게 놀라?” 현아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좀 전에 출판사에서도 만나고 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강 작가는 자기와 마주치기 전에 재호를 통해서 이미 자기의 사진도 받았고, 자기를 소개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기에게 인사할 수 있을까? 현아는 도무지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