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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Sep 21. 2024

라이터 Lighter_18

그런 인연_2

“언니! 왜 그러는데? 왜 말이 없어? 마음에 안 들어?” 현아의 귀에는 현주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너, 재호가 이 사람 어떻게 아는 사람이라는 말 했어?” “나는 모르지. 재호가 아주 잘 아는 선배가 있는데, 그 사람이 성실하고 믿을만한 사람이라면서 재호에게 소개한 거래. 왜? 언니가 아는 사람이면 언니도 어떤 사람인지 잘 알 거 아니야? 정말 세상 좁네. 좁아.” 오히려 놀란 쪽은 현주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전에 이야기할 때 사진부터 보여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주의 말을 들은 현아는 잠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강이석 작가는 레테에서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좋은 사람인 것은 맞는 것 같았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선 보기에는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혁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 현아의 마음에 들었다. 출판사 대표도 칭찬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강이석 작가가 아무리 자기를 아는 사람이라 한다고 해도, 현아 자신이 알기로는 강 작가가 아직 결혼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자기처럼 결혼했다가 사별하고 딸을 키우며 혼자 살고 있는 여자에게 무슨 관심이 있기에 자기를 만나보겠다고 했냐는 거였다. 나중에라도 유정을 핑계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잠시 자기와 그저 데이트나 즐기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현주의 말을 들어보니, 강 작가는 현아가 딸이 있는 사별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만나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답답하네. 그래서 어쩔래? 아는 사람이면 잘된 거네. 정식으로 만나서 결혼 이야기를 해도 되잖아. 그쪽은 무조건 좋다는데. 언니는 아는 사람이라서 싫어?” 현주는 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히 언니가 아는 사람인데,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인지는 말도 안 하지를 않나, 만나보겠다든지 아니면 싫다든지 말도 없지를 않나, 그저 갑갑한 마음을 누르며 현아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행여 여기에서 닦달한다면, 언니가 짜증은 낸다든지, 뭐 아무튼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현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았어. 일단 너랑 재호 봐서 만나는 볼게. 그렇지만 기대는 하지 마. 내가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이미 내 사진을 보았고, 오늘 조금 전에 출판사에서 잠깐 얼굴을 보았는데 나에게 아무런 말이 없었으면서도, 왜 나를 그렇게 만나게 해 달라고 했는지 한번 직접 물어보고 싶어서 나가는 거야. 알았지?” 현아는 슬쩍 거절의 핑계를 미리 깔면서 현주에게 강 작가를 만나겠다고 승낙했다. 현주는 얼굴에 희색이 만연해서 물었다. “그러면 언제, 어디에서 보자고 할까? 다 큰 어른들이고 서로 얼굴을 아니까 그냥 둘이 만나. 그러면 되지?” “알았어. 그렇게 할 테니까, 그냥 재호에게 물어봐서 연락처를 줘. 내가 직접 연락할게.” “연락처야 내가 미리 알아 뒀지. 잠깐 기다려 봐. 문자로 넘겨줄게” 현주가 그 자리에서 현아에게 강 작가의 전화번호를 보냈다. 현주의 문자를 확인한 현아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그 남자 이름이 맞아? 이상하네? 내가 알고 있던 이름이랑 다르네” “왜 뭐가 잘못됐어? 맞을 텐데? 나는 그렇게 받았어. 왜? 언니가 알던 이름이랑 달라?” 현주가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현아의 눈치를 살폈다. “응 내가 아는 이름은 이 이름이 아닌데? 이상하네. 그리고 이 이름도 좀 그래.” “아, 답답해. 아무튼 나는 몰라. 이제 내 손은 떠났으니까, 재호에게 말해서 언니가 그 사람에게 연락할 거라고 해 둘게. 알았지?” 현주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거실로 나갔다. 현아는 말없이 현주가 준 문자를 들여다보았다. “김진수 010-2020-0520” 현주가 준 문자에는 강이석 작가의 이름이 분명히 김진수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출판사에서 현아를 만나고 온 다음 날, 진수는 모처럼 레테에 들렀다. 효숙은 여전히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진수를 반겨주었다. 진수는 그래도 그런 효숙이 싫지는 않았다. 진수는 한가한 실내를 돌아보다가 현아와 앉았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효숙이 커피잔을 들고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들리셨네요?” “네, 요즘은 아주 바빴습니다. 출간을 앞두기도 했고요.” “아, 그러세요? 책이 또 나오는 모양이죠?” “네. 쓰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되었는데, 이제야 책이 나오네요. 보잘것없는 소설이지만, 그래도 나중에 한 권 드릴게요. 하하하.” “아니에요. 책은 자고로 돈을 주고 사서 읽어야 하는 거래요. 그냥 받는 책은 잘 읽지 않게 된다고 하잖아요.” “그래요? 누가 그러던가요? 하하하.” 효숙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생각하다 보니 돌아가신 이 작가님 생각이 나네요. 작가님과 사모님께서 이야기를 나누실 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을 언뜻 들었거든요. 증정 책은 그저 예쁜 재활용 종이일 뿐이라고 말이죠.” 효숙의 말을 들은 진수는 주혁을 떠올려 보았다. 자기가 주혁으로 깨어나기 전까지는 현아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그 생활을 자기가 끊은 것만 같았다. 물론 진수의 의지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라이터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자기와 주혁은 각각 어떻게 살고 있을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제 주혁은 떠났고, 진수 자신은 그런 상황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안스러움을 표하기에는 이미 끝나버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웠죠. 이 작가님 소식 말입니다. 저와 나이도 같은데, 너무 일찍 떠나셨잖아요.” 진수도 주혁이 떠올라서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아내 되시는 분은 이제 오시지 않겠네요?” “아, 아니에요. 아직 저기, 저 집에 사시는지 아주 가끔 들르긴 해요. 오시면 이전 생각이 나는지 항상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가시곤 하셨어요.” 진수가 말이 없자, 효숙은 진수에게 편히 쉬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효숙의 말을 들은 진수는 생각에 빠졌다.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는 것이, 주혁이었던 진수 자신을 그리워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주혁으로 깨어나기 전의 주혁을 그리워한 것인지, 아무튼 어느 쪽이든 혼자 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현아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지금의 얼굴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현아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않은가? 그래도 재호와 주희 덕분에 잘하면 현아와의 인연의 끈을 이을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아직 현아로부터 자기와의 만남을 승낙했다는 연락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기준에게 전화가 왔다.     

 

“진수야. 어디야?” “응, 나 잠깐 밖에 나와 있어. 무슨 일이야?” 진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야, 너 혹시 내 전화 기다린 거 아냐? 그렇지?” 기준이 살짝 놀리는 듯한 말투로 말하는 것을 보니, 아마 현아가 자기를 만나겠다고 한 것 같았지만, 그냥 모르는 척하면서 물었다. “내가? 내가 뭘 기다려?” “야, 아닌 척하지 마라. 너 그 여자, 주희가 소개하겠다고 한 그 여자 소식 기다리고 있었잖아. 내가 네 목소리 들으면 대번에 알 수 있다. 하하하.” “이런 녀석을 봤나. 그래. 기다렸다 어쩔래? 주희 씨가 뭐라고 해?” “거 봐라. 너 나중에 잘 되면 나랑 주희에게 한턱내야 한다. 알았냐? 그 여자가 너에게 직접 연락하겠단다. 그래서 네 전화번호 줬대. 그러니 그렇게 알고 전화 오면 잘해봐라. 알았냐?” 순간 진수는 기쁜 마음에 울컥했지만, 기준에게 표를 내지 않으려고 덤덤한 척 말했다. “잘하긴 뭐.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만나보는 거지. 아무튼 그래. 고맙다.” 기준의 전화를 받은 진수는 이제 현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는 진수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오늘까지 이미 팔 년도 넘는 시간을 기다려 오지 않았던가? 진수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낯익은 현아의 전화번호였다. 전화번호는 자기가 떠나올 때 그 번호 그대로였다. 진수는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김진수 씨 되시나요?” 전화기 너머에서 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김진수입니다.” 그러자 현아도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제가 누구인지 아시죠? 강이석 작가님. 그리고 왜 작가님께 전화를 드렸는지도 아시죠?” 감추려고는 했지만, 현아의 목소리는 약간 떨려 보였다. “네. 제가 김진수이고, 강이석입니다. 김진수가 본명이고, 강이석은 제 필명입니다. 그리고 전화 주신 용건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님께서 제게 전화 주실 거라는 이야기를 지금 막 친구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네. 저도 이야기를 듣고 설마 했는데, 제가 알고 있는 작가님이셨네요? 그러면 언제 시간이 되시나요? 일단 뵙죠. 저는 언제든 좋아요.” “저도 상관없습니다. 작가님 뵙는 일인데 언제든지 상관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괜찮나요?” “네, 지금 저는 레테에 나와 있습니다. 어디든 말씀하시면 제가 찾아뵐게요.” “그럴게 아니라, 제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그냥 거기에서 뵈어요.” 현아가 당장이라도 나올듯한 기세로 말했다. 아마 진수가 궁금하기도 했겠지만, 이런 이야기일수록 말이 나왔을 때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네. 그러면. 그냥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아를 기다리며 진수는 온갖 생각에 빠졌다. 물론 현아는 자기가 이전의 주혁인 줄은 당연히 모를 것이다. 설혹 의문이 든다 해도, 시간적, 물리적으로 말도 안 되고, 얼굴부터가 다른 라이터의 농간이었기에 절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수는 자신이 현아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진수 자신은 레테에서 현아와 주혁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작가로서 작품에 관한 대화를 나눈 것밖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마주친 일도 우연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총각이 애가 딸린 사별녀와 무슨 이유로 만날 결심을 했냐는 질문에 관한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설득력이 없는 답변을 준비한다면 아마 현아의 성격에 진수를 다시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적당한 답변을 찾을 수 없었다. 만일 진수가 현아를 아주 오랫동안 보아 온 사이이며 주혁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아마도 주혁의 아이를 기르겠다는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또한 아니다.   

  

진수와 통화한 현아는 외출을 준비하면서 계속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이 남자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왜 하필 이름이 주혁이 가끔 입에 올리던 진수인가? 단순한 동명이인인가? 하긴 그때의 진수라고 하기에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김진수라는 사람 그러니까 강이석은 같은 사람일 리가 절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정이를 받아주겠다는 부분이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먼저 세상을 뜬 아주 오랜 친구의 딸도 아니고, 현아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유정까지 키우겠다고 하기에는 진수가 자기와 유정을 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진수가 자기를 알게 된 시기에는 자기가 주혁과 함께 있던 시기이므로 특별히 진수가 자기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주혁의 아이까지도 기르겠다고 한 가정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현아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아예 진수를 만나는 자리에 유정을 데리고 나가는 방법이었다. 그냥 첫 만남부터 현아 자신에 대한 모든 모습을 보여주고, 진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실제로 애가 딸린 사별녀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확인한다면, 진수의 진심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유정에게 외출 준비를 시켰다. 그런 현아를 보고 희숙이 말했다. “얘는, 지금 남자를 만나러 가면서 애는 왜 데리고 가니? 그 사람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러니까 데리고 간다는 거야. 애 딸린 사별녀도 좋다고 했다잖아. 정말 그런지 나가 보면 알겠지.” “그래도 처음 보는데, 그건 좀 아니지 않니?” 첫 만남부터 일을 그르칠까 염려가 되어, 희숙이 재차 만류했다. 하지만 현아는 기어이 유정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 나갔다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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