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_2
진수를 만나고 온 후로 자기도 모르게 진수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현아는 가끔 놀랐다. 처음에는 솔직히 진수를 밀어내기 위해서 유정을 데리고 나갔던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현아로 하여 진수에게 알게 모르게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현주의 말처럼 자신이 아무리 남자 없이는 살기 힘든 스타일의 여자라고 해도,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는 남자라고는 하지만 거의 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진수에게 그런 기대를 품게 될 줄 몰랐다. 굳이 변명하자면, 진수는 유정이 잘 따르는 남자이고, 어디인지 꼭 짚을 수는 없어도 주혁의 모습이 어린 남자라는 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진수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기에 뜬 발신자 번호를 보던 현아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작가님, 혹시 내일 시간 되세요?” “아. 작가님 안녕하세요? 내일 말인가요?” “네. 너무 급하게 전화를 드렸나요?” 현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니에요. 좋아요. 내일 뵙죠.” “유정이도 데리고 나오셔야 해요. 제가 열한 시까지 댁으로 갈게요. 이번에는 제가 운전하고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아, 알겠어요. 그럼 죄송하지만 그렇게 알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그러면, 도착해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전화를 끊고 난 현아는 공연히 첫 데이트를 앞둔 소녀 시절처럼 설레는 가슴을 누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상철과 희숙이 유정을 데리고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 내일 유정이 데리고 좀 나갔다 올게요. 그렇게 알고 계세요.” 순간 희숙의 촉이 발동했다. “왜? 그 남자 만나러 가니?” “아이, 엄마가 뭘 신경을 써? 그냥 나갔다 온다니까.” “아니 얘가, 말 못 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면 그렇다고 하면 되지.” 현아는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맞아. 내일 집 앞으로 온다니까, 나갔다가 올게.” “그래. 가서 그냥 확 결혼하자고 해라. 알았어?” “아니 엄마는 뭐 내가 결혼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여자처럼 말하네?” “아니 어차피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소개받은 건데 뭘 어떠니? 아예 결혼하기로 하고 서로 놀러 다니면 되잖아. 유정이도 좋아한다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가 먼저 그런 말을 하냐?” “그러니까, 그 남자가 혹시라도 그런 말을 하면 공연히 재지 말고 알았다고 하라는 말이지.” “아, 몰라. 몰라.” 현아는 유정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진수는 현아에게 만나자고 말을 해 놓고는 내일의 일정을 대충 챙겨 보았다. 하긴 뭐 사실은 특별한 일정이 없어도 되는 하루이긴 했다. 유정이가 좋아하는 동물원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기회를 봐서 아예 현아에게 청혼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결혼할 것이 아니면, 그런 데이트도 할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처음부터 아예 못을 박고 시작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따르는 유정을 보니, 혹시라도 현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그 남자가 유정의 아빠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진수가 주혁이었을 때 태어난 딸이지만, 그래도 진수 자기의 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유정이 처음 보는데도 자기를 그렇게 잘 따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진수에게 망설이지 말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일 만나면 현아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계획을 세워두었다.
집 앞에 도착한 진수가 전화하자, 현아가 유정을 데리고 나왔다. 진수가 차에서 내려 맞이하는데, 유정이 진수에게 쪼르르 달려가더니 안아달라는 몸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현아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번이야 뭐 어쩌다가 그랬다고는 해도, 이번까지도 저렇게 진수를 따르는 것을 보고 진수에게 조금은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유정을 때어 놓으면서 말했다. “유정아, 유정이는 엄마랑 같이 타야지. 아저씨가 운전하셔야 하거든.” 현아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는 유정을 진수가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 “작가님 먼저 차에 타세요. 유정이는 제가 안고 있다가 태워줄게요.” 현아가 뒷자리에 오르자, 진수가 유정을 현아 옆에 태우고 운전석으로 올랐다. 이윽고 차는 서서히 출발해서 현아의 집 앞에서 멀어져 갔다. 차는 남태령을 넘어 과천으로 접어들었다. 현아는 진수에게 어디로 가는 중이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일정은 진수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수는 서울대공원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은 야외 데이트입니다. 괜찮으시죠?” 차를 주차장에 세운 진수가 현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좋아요.” 현아가 웃으며 말했다. 셋은 차에서 내려 코끼리 열차 매표소로 갔다. 유정은 처음부터 진수에게 안아달라고 했다가, 코끼리 열차를 보고 신이 나서 진수 팔에서 내려왔다. 셋은 코끼리 열차를 타고 호수 주위를 돌아 동물원 입구에서 내렸다.
진수는 오늘 유정을 위해서 동물원 나들이를 계획했다. 진수가 유정을 떠날 때, 유정은 너무 어려서 바깥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았기에, 오늘은 동물 구경도 시켜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동물 보는 재미가 있었는지 유정이 진수에게 조금 덜 매달렸다. 그렇게 혼자 뒤뚱거리며 바쁘게 걷는 유정의 모습을 보며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오랜만의 나들이라 그런지 현아도 가슴속까지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님 덕분에 오늘 생각지도 않게 동물원 구경을 다 하네요? 고마워요. 유정이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매일 글만 쓰다가 유정이 덕분에 바람을 쐬네요. 하하하.” 진수는 현아가 즐거운 모습을 보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문득 현아와 결혼하면 이렇게 가족 나들이를 자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들은 누가 보아도 행복한 가족처럼 보일 것이다. 자기가 그때 현아 곁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모습처럼 살았을 것이다. 단지 얼굴만 주혁의 얼굴인 채 말이다. 그런 것을 보면 원래부터 지금의 셋이 한 가족이었던 것만 같았다. 조용히 생각에 빠져 걷는 진수를 보며 현아가 물었다. “무얼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 그냥 좋아서 그럽니다. 옛날 기억도 떠오르고요. 저도 어릴 때, 가끔 이곳에 왔거든요. 유정이 보니 어렸을 적이 생각나네요.”
그렇게 걷다가 잠시 벤치에 앉았다. 유정은 여전히 진수 무릎 위에 올라앉았고, 그런 유정을 진수가 꼭 안아주었다. “작가님, 그런데 말이죠.” 현아가 입을 열었다. “네, 작가님” “기왕 이렇게 만났는데, 우리 이야기는 정하고 만나는 것이 어때요?” “무슨 말씀인가요?” 진수가 잠시 현아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 이런 문제는 남자인 작가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거잖아요?” 그제야 진수는 현아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아. 네. 그렇죠. 죄송합니다. 유정이를 쳐다보느라, 작가님 생각을 잠시 놓았습니다. 작가님은 제가 정말 어떤 생각에서 이렇게 작가님과 유정이를 만나는 것인지 궁금하셨죠?” “네, 그래요. 우리가 서로 완전히 모르는 사이라면 모르겠는데, 작가님은 유정이 아빠도 아시잖아요? 알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의 아내였던 저와 이렇게 만난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지 않나요? 그냥 단순한 데이트 상대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실 텐데요. 더군다나 중간에 계시는 친구분을 통해서 저를 소개받을 때는 결혼 상대자로 만나려 한 것 아닌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저 장난으로 만나는 것은 아니고, 저는 진심으로 작가님과 결혼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우습잖아요? 작가님이 저를 잘 아시는 것도 아니고, 제가 결혼 상대로 그렇게 매력이 있는 여자도 아닌데, 게다가 애까지 있잖아요? 작가님 부모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신다면, 그래도 좋아하실까요? 결혼이 작가님만의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요.” 현아는 아예 말이 나온 김에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혹시 결혼도 못 할 상황이라면, 공연히 유정과 자기까지 진수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진수가 입을 열었다.
“우선 확실히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제가 작가님과의 결혼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저의 부모님께서 반대하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작가님을 모르시는 분들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님께서 저를 믿어주지 않으신 적이 없었거든요. 이번의 결혼 문제도 결국에는 제 결정을 지지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부모님 문제는 제가 확실하게 승낙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작가님 차례군요. 작가님은 어떤 마음으로 저와의 만남을 허락하신 거죠? 작가님도 미리 사진을 보았을 때, 저인 줄 알고 나오신 거잖아요?” “네, 그래요. 작가님인 줄 알고 나왔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요. 처음에는 작가님을 밀어내려고 유정이도 데리고 나와 봤고, 그런데 저도 생각이 정리가 잘 안 되네요. 작가님과의 결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잖아요. 작가님을 뵈면, 유정 아빠 주혁이도 생각나고 말이에요.” 현아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진수가 말했다.
“작가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부모님 승낙을 받을 때까지만이라도 계속 만나주실 수 있으신지요? 작가님 마음은 그 후에 결정하셔도 됩니다.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친구처럼 만나도 되잖아요? 이주혁 작가님과 작가님도 우리 모두 같은 나이잖아요. 그냥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나요? 저는 결혼을 하든, 친구가 되든, 작가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의 진심입니다.” 진수의 말에 현아는 점점 혼란스러워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갈수록 자신의 마음이 진수에게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굳이 그런 마음을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왜 그런지 아주 오래전부터 진수를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그렇다고나 해야 할까? 아무튼 김진수라는 사람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편하게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좋아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처음에는 작가님께 거리감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더 가까워 보고 싶네요. 저도 제가 이런 말을 드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음. 그러면 일단 우리 친구로 시작해요. 그러는 것이 저도 덜 부담스러울 것 같네요. 유정이도 있고 그러니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진수는 딸이 있는 여자가 적극적으로 결혼하자고 달려들면 남자가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현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네. 저도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제가 아무 때나 연락해도 이제는 되는 거죠? 친구니까.” “네. 그렇게 하세요. 저도 시간이 날 때면 연락드릴게요. 가끔 이렇게 나들이도 하고 말이죠.” 둘은 말을 맞추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진수는 진수대로, 현아는 현아대로 서로에게 일단 마음의 문은 열었다. 이제 편하게 그 문을 왕래하면 되는 단계까지는 넘겼다.
진수와 현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지루했던 유정은 또 진수의 무릎 위에서 졸고 있었다. 둘은 유정을 일으켜서 다시 동물을 보러 발을 옮겼다. 이제 둘의 마음과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유정도 신이 나서 진수의 손을 잡고 진수를 이리저리 끌었다. 그런 유정을 보고 현아가 말했다. “유정아. 이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유정은 현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유정이가 아저씨를 언제 봤다고 그렇게 좋아하는 건데? 아저씨를 잘 모르잖아?” “아저씨를 내가 왜 몰라? 다 아는데.” 순간 진수와 현아는 잠깐 그 자리에 발이 얼어붙었다. 유정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유정이가 진수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정아 네가 이 아저씨를 어떻게 알아?” 현아의 말에 유정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왜 몰라? 아저씨가 나 어릴 때, 막 씻겨 주고 그랬잖아.” “유정아, 아냐. 아빠가 그랬지.” 유정이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아닌데? 이상하네. 아저씨가 나 씻겨 줄 때, 막 이렇게 했어. 손으로 머리 받치고, 나 뒤로. 이렇게 머리도 감겨 주고 그랬잖아. 내가 다 기억하는데, 왜 아니라고 해?” 순간 현아와 진수는 동시에 깜짝 놀랐다. 현아는 미안한 표정으로 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미안해요. 아이가 뭘 모르고 작가님과 아빠를 혼동했나 보네요. 미안해요.” 진수도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이가 그럴 수도 있죠. 뭐.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정아, 유정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유정이가 아저씨는 지난번에 처음 봤잖아. 유정이가 돌아가신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아저씨를 보고 아빠가 생각났나 보다. 그렇지?” 그러자 유정이 갑자기 짜증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엄마랑 아저씨는 내 말을 안 믿는데?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아저씨가 이렇게, 이렇게 안아서 나를 재워 줬잖아. 나도 다 기억하는데.”
현아는 갑자기 주혁이 기억을 잃고 이상한 이야기를 했던 일이 생각났다. 설마 유정도 아빠 주혁을 닮아서 가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가슴이 덜컹했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 유정이 자기도 모르는 진수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이름까지도 하필이면 진수인데,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만일 유정의 기억이나 정신 상태가 주혁의 경우와 같은 것이라면, 아무리 부녀간이라 해도 그런 것까지 닮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악몽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 기억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데 지금 딸 유정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현아가 걱정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만 같았다. 왜 자기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잊혀가던 라이터의 망령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유정의 말에 잠시 어두워지는 현아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진수가 물었다. “작가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요.” 현아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는 진수의 눈길에서 말할 수 없는 자상함을 느꼈다. 진수라는 남자, 생각보다는 편하고 포근한 남자로 보였다.
진수는 동물원 데이트를 끝내고 늦지 않게 일찍 현아와 유정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종일 뛰놀던 유정은 이미 차 안에서 깊은 잠이 들었고, 진수와 현아는 낮은 목소리로 좀 더 가까운 친구가 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현아가 말했다. “작가님 오늘 너무 고생하셨어요. 피곤하시죠?” 운전석의 진수가 돌아보며 씩 웃었다. “아닙니다. 저도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들어가서 푹 쉬세요. 또 연락할게요.” “네, 작가님도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세요.” 현아는 곤히 잠든 유정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진수는 현아가 눈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차를 돌렸다. 현아가 집으로 들어서자, 이번에도 가족들이 현아 주위로 몰려들었지만, 현아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냥 유정을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유정의 눕히고 욕실에 들어간 현아는 샤워기 아래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 씻고 나온 현아는 유정 옆에 누워서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그날 이후, 진수는 시간만 나면 현아와 유정을 불러냈다. 레테에도 가끔 들렀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현아가 불쑥 물었다. “어때? 커피 맛 좋지?” “응, 아주 맛있는데?” 둘의 입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반말이 나왔다. 현아는 이 상황이 마치 무슨 데자뷔처럼 매우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바람에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말을 시작으로 둘은 서로 자연스럽게 반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아는 그럴수록 주혁 생각이 났다. 주혁과도 항상 반말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앞에 앉은 이 남자, 진수가 갈수록 주혁처럼 느껴졌다. 말투 하나, 몸짓 하나 모두가 주혁이었다. 진수도 날이 갈수록 현아와 옛날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만 보아도 흡사 주혁으로 깨어났던 그 시절의 진수와 현아의 모습, 바로 그 모습이었다. 진수에게 무슨 마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현아는 진수의 품에 안기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이제 진수는 유정에게도 더할 수 없는 아빠가 되어 있었다. 현아는 날이 갈수록 현주가 말했던,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가 자기였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있었다. 주혁이 떠난 지 이 년만의 일이다. 현아에게는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익숙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 남자가 진수였다.
현아가 드디어 진수와의 결혼을 결심한 날 이후로, 진수는 그날부터 부모님께 말씀드릴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생일이 되어 가족 네 명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현아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물론 유정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하나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말했다. 진수의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기다리고 있던 진수는 뜻밖의 말을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래 알았으니 언제 한 번 데리고 오너라.” 아버지는 그저 무덤덤하게 말했고, 어머니도 “그 처자가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고 그냥 너를 믿는다는 뜻이니 그리 알아라.”라고 말했다. 며칠 후 진수는 현아와 유정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다. 부모님은 현아보다는 오히려 자기들에게 착착 안기는 유정의 재롱에 어쩔 줄을 몰라하더니, 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긴말하지 않으마. 진수랑 잘 살거라.” 이번에도 단 한 마디였다. 진수는 이번에도 라이터가 도와주었음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현아는 진수를 데리고 주혁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원래부터 현아의 재혼을 원하고 있던 시부모님인지라 진수의 등장을 진심으로 반겨주셨다. 진수도 주혁의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며,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결혼 준비가 끝났다. 진수는 초혼이지만, 현아는 재혼인 관계로 결혼식은 가족끼리 모여서 간단하게 치렀다. 양쪽 사돈어른과 가족, 그리고 둘을 이어준 일등 공신 기준과 주희, 현주의 남자친구 재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판사 김 대표와 카페 레테 사장 효숙이 하객의 전부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진수는 현아와 유정을 데리고 주혁을 찾았다. 이제 현아와 유정은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라고 마음속으로 주혁의 명복을 빌었다. 진수와 현아는 현아가 살던 집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현아가 사용하던 살림은 그대로 있었으므로, 진수는 입던 옷가지 몇 개와 책들, 그리고 글 쓸 때 사용하던 노트북만 들고 현아의 집으로 들어왔다. 원래 현아는 주혁과의 추억이 서린 집에서 진수와 결혼생활을 하는 것은 진수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집을 처분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 했지만, 진수가 강하게 반대해서 그냥 그 집에서 살기로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수는 집을 절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 주혁이 사용하던 서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는 주혁이 글을 쓸 때 사용했던 노트북까지도 그대로 두었다. 현아는 혹시 진수가 주혁과 자기의 추억을 고스란히 지켜주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간간이 보이는 진수의 행동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김진수라는 이 남자는 알다가도 모를 남자였다. 진수가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 거실에 걸었던 사진을 같은 자세로 주혁과 진수의 얼굴만 바뀐 상태로 촬영해서 바꿔 걸고 싶다는 것이었다. 현아는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진수는 사진을 바꿔 걸던 날, 거실 소파에 앉아서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현아는 모를 것이다. 이 집은 현아와 주혁의 추억만 서린 집이 아니라, 현아와 진수의 추억도 간직하고 있는 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옆에 와서 앉은 현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진수야.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데?” 진수가 고개를 돌려 현아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현아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정말 얼마 만인지, 진수의 눈에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살짝 맺혔다. 진수는 무릎에서 졸고 있는 유정을 안고 현아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주혁의 모습을 한 진수가 교통사고로 떠나기 바로 전의 그 모습으로 유정을 가운데 눕히고 양쪽으로 현아와 진수가 누웠다. 그 집에서의 첫날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