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는 현아와 함께 소파에 앉아, 무릎에 엎드려 잠이 든 유정을 내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현아를 떠난 지 어느덧 구 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현아와 유정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렇지만 현아는 진수가 이전의 주혁이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다. 진수가 말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말한다고 해도 현아가 믿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진수와 현아는 결혼하고 얼마 후, 딸 유정의 성을 주혁의 성인 ‘이’에서 진수의 성인 ‘김’으로 성본 변경을 신청한 후 진수의 딸로 입양하였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유정은 진수와 현아의 딸이 되었다.
현아는 비록 주혁을 보냈지만, 자기를 잘 이해해 주고 딸 유정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났다. 이 남자의 이름은 ‘김진수’이다. 어디에서인가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죽은 주혁이 가끔 자기 이름이 진수라고 하는 말을 들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물론 이 남자가 그 남자일 수는 없다. 현주에게 전화번호를 받을 때,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김진수? 왜 이 남자 이름이 하필이면 김진수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혁의 얼굴을 한 상태로 자기와 함께 삼 년도 넘게 살다가 사라진 그 남자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남자 전화번호는 또 왜 그런지, 언뜻 읽으면 자꾸만 2020년 05월 20일로 읽힌다. 그날은 기억 잃은 주혁을 이전 자취방에 가서 데리고 온 날이다. 에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우연일 것이다. 아무튼 아무려면 어쩌랴? 이제 이 남자와 새로 부부가 되었고, 딸 유정에게도 아빠가 생겼다. 앞으로 이렇게 셋이 언제까지라도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현주는 형부 주혁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재혼하지 않겠다고 했던 언니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재혼하겠다고 한 속마음이 궁금했다. 그래서 언니에게 왜 마음을 바꾸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언니는 조카 유정 때문이라고 했다. 진수도 유정을 끔찍하게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유정이 진수를 마치 세상을 떠난 주혁을 따르듯 그렇게 따르는 모습을 보고 재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하긴 현주가 봐도 진수는 조금 이상한 남자였다. 무슨 남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키워보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아이를 잘 보는지 모르겠다. 마치 어디 숨겨 놓은 자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자기에게는 주혁도 좋은 형부였지만, 왜 그런지 진수도 주혁 못지않은 좋은 형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정은 엄마 현아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분명히 아저씨가 아빠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아니라고 한다. 나는 어렸을 적에 아저씨가 나를 재우던 기억을 아직도 생생하게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저씨 팔에 안겨서 아저씨 가슴에 엎드리면, 옛날 아빠의 가슴에서 듣던 소리와 똑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만 들으면 나는 잠을 잘 잤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가 아빠라고 확신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가 아저씨가 아빠라고 하면, 꼭 아니라고 한다. 엄마는 정말 그것도 모르는 바보다. 그러더니 이제야 엄마도 아저씨가 아빠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다.
진수는 지금까지도 간혹 라이터를 떠올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내버리려고 해도 자신을 떠나지 않던 라이터가 스스로 떠날 때가 되니까 알아서 떠났다. 그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라이터가 자기에게 왔던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면, 그 이유는 진수 자신에게 호의적인 이유였으리라 생각했다. 라이터 덕분에 현아를 만났고 행복하게 살다가 돌아왔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났다. 그렇다면 아마 라이터가 진수의 삶이 운명대로 흘러갈 수 있도록 잠시 진수의 곁에 왔다가 떠난 것만 같았다. 라이터가 결코 그 어떤 해를 끼치기 위한 목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님이 확실했다. 앞으로 남은 생을 라이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주혁이 갑자기 진수가 되면서 현아는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발생한 후, 주혁과의 사이에 유정을 낳았다. 물론 그 당시 자기가 진수라고 했던 주혁의 말이 사실이었어도, 진수의 육체는 주혁이었기 때문에 생물학적 아버지는 당연히 주혁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또 다른 진수라는 남자를 만났다. 물론 같은 사람일 리는 없어도 왠지 느낌으로는 그 남자인 것만 같았다. 나이도 같고, 단지 얼굴만 적응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금의 진수에게 꼭 물어보고 싶기는 하다. 혹시라도 자기를 만나기 전에 어디에선가 전현아라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느냐고 말이다. 물론 들은 적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래도 현아는 이 남자가 유정의 아버지인 그 김진수로 밝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수는 곤히 잠든 유정을 안아서 침대에 누이고, 현아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진수는 아직도 현아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현아의 얼굴을 쓰다듬자, 현아가 그런 진수를 보고 배시시 웃으며 진수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다리를 진수의 아랫배 위에 올리고 옷 안으로 손을 넣었을 때, 그녀의 머리 위에서 헉! 하는 낯익은 낮은 숨소리와 그녀의 손 안에서 일어서는 낯익은 진수의 몸짓을 느꼈다. 그런 몸짓에서 자기가 진수라고 했던, 그 주혁도 그랬던 기억이 떠올랐다. 현아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진수의 품 안에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결혼한 지 정확하게 일 년째 되는 날, 그들 사이에 유정만큼이나 예쁜 유정의 동생이 태어났다.
같은 시각 <여주로 63길 46>에 있는 건물의 허름한 방 안에서 한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