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흔 Sep 22. 2024

라이터 Lighter_19

재회_1

현아는 뛰는 가슴을 누르며 유정의 손을 잡고 레테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저 안에 강이석 작가가 있다. 아니, 김진수가 있다. 어차피 강이석이라는 이름은 필명이므로 이제 잊고, 김진수로 대하기로 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니 효숙이 반겼다. 효숙은 유정에게도 어서 오라고 눈을 낮추며 반겨주었다. 창가 자리를 보니 진수가 앉아 있다가 현아를 보고 얼른 일어섰다. 현아는 유정이 마실만 한 음료가 혹시 있는가 싶어서 효숙에게 부탁하고 진수의 자리로 향했다. 현아의 손을 잡고 따라오던 유정이 현아와 진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서 오세요. 따님도 함께 나왔군요. 아주 예쁜 따님이네요.” 진수가 무릎을 굽히고 유정의 눈높이에 눈을 맞추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예쁜 꼬마 아가씨 어서 오세요.” 순간 현아는 그런 진수의 모습에서 뭔가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따님 이름이 뭐죠?” 유정과 같은 높이로 구부려 앉은 진수가 현아를 올려 보며 물었다. “유정이예요. 이유정.” 현아는 간단하게 대답하면서 유정을 안아서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자, 유정아. 자리에 앉아야지?” 그러자 뜻밖에 유정이 진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엄마, 나 아저씨 옆에 앉으면 안 돼?” 현아는 깜짝 놀라 다시 말했다. “유정아 그러면 못 써. 이리 와서 엄마 옆에 앉아야지. 아저씨도 앉으시지.” 현아가 다시 유정을 잡아끄니까 그제야 마지못해 유정이 현아의 자리 옆에 앉았다. 유정을 자리에 앉히고 진수를 바라보았다. 진수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현아보다는 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님, 아까 뵙고 또 뵙네요?” “네, 그렇군요.” 그렇게 서먹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남자가 자기와의 만남도, 그것도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도 마지않았다는 사실이 거짓인 것만 같았다. “그냥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얼마 전부터 동생이 저에게 남자를 만나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저는 사실 유정이 아빠가 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재혼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몇 번이고 그러는 거예요. 중간에 말을 건넨 자기 입장도 있으니 만나보기나 하라고 말이죠. 오늘까지도 그 상대가 작가님인 줄 몰랐는데, 아까 사진을 받고 보니 작가님이시더라고요. 물론 이름은 달랐지만 말이에요. 작가님은 제 사진을 보고 저인 줄 아셨죠? 그리고 아시면서도 저를 만나겠다고 하신 거고.” 현아는 따지는 말투가 아닌, 그냥 평상시의 말투로 조곤조곤 물었다. “네. 친구로부터 사진을 받고 솔직히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작가님과 저 사이에 이런 인연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죠. 불과 두 사람을 거쳤을 뿐이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작가님께는 좋은 인상이 있었고, 글 쓰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성격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고요. 그래서 정식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작가님도 저와 남편 사이를 어느 정도 아시잖아요? 유정 아빠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저를 만나고 싶으셨어요?” 현아가 약간의 경계를 치며 말했다. “가장 먼저 이주혁 작가의 소식에 유감을 표해 드렸어야 했는데,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말씀처럼 두 분 작가님의 사이를 저도 잘 알고 있죠. 유별나신 사랑도 익히 알고 있고요. 하지만, 지금은 이 작가님이 계시지 않잖아요? 이 작가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 작가님도 작가님께서 계속 혼자 지내시는 것을 원하지는 않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로부터 작가님 이야기를 듣자마자 즉석에서 작가님을 뵙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진수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대답했다. 사실 이런 대답들이 현아의 마음에 어느 정도 가 닿을지는 진수도 자신이 없었다.   

   

“저는 작가님께서 저와의 만남을 제안받고도 오전 같은 자리에서까지 아무 내색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약간은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어요.” 그때 옆에 앉은 유정이 지루한지 찡얼거리는 소리에 이야기가 잠시 끊겼다. 현아는 급히 유정을 달래며 진수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모습이 애 딸린 여자의 모습이다. 잘 보아라. 하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진수의 동작에 현아는 깜짝 놀랐다. 진수가 건너편에서 일어나 유정의 자리에 와서 유정을 안아서 일으켰다. 그러자 유정이 진수의 품에 매달려서 손으로 진수의 목을 감아 잡으며 꼭 안겨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황한 현아가 유정을 진수로부터 떼어내려고 일어섰다. 하지만 현아가 떼어내려고 할수록 유정은 더욱 진수에게 달라붙었다. “작가님, 저는 괜찮으니 그대로 안고 있을게요. 제가 아이를 기른 적은 없지만, 유정이는 아마도 제가 편한 모양입니다. 그냥 잠시 제가 안아줄게요.” 현아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주혁 이외의 사람에게는 저렇게 안긴 적이 없는 유정이었는데, 처음 보는 진수에게 안겨있는 모습을 보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수는 유정을 안고 서서 테이블 주위를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이며 걸었고, 현아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진수가 안아주자 어느새 유정은 진수의 목을 꼭 붙잡고 잠들어 버렸다. 이래저래 난처한 쪽은 현아였다. 진수는 유정이 깨지 않도록, 품에 안은 채로 카페 안을 서성거렸다. 현아는 진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원래 유정을 데리고 나온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깊은 이야기할 분위기는 아닌 것 같군요.” 진수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고 현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꼬마 아가씨가 집에 가서 쉴 수 있도록 오늘은 작가님도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공연히 자기의 처지만 생각해서 유정을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진수에게는 첫 만남부터 결례를 범한 것만 같았다. “네, 말씀대로 오늘은 더 이상 이야기가 힘들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우리끼리의 백 마디 말보다도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냥 들어가시고 나중에 다시 시간을 내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현아가 진수를 바라보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없네요. 솔직히 저는 오늘 작가님 뵙고, 아예 만남을 자르든 아니면 좀 더 만나든 결론을 내려고 의도적으로 유정이를 데리고 왔거든요. 그런데 유정이 덕분에 작가님을 다음에 한 번 더 만나야 할 명분이 생겼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차까지 유정이를 안고 갈게요.” “아니에요. 제가 안고 갈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현아가 유정을 진수에게서 떼어 놓으려 했다. 그러자 유정이 잠결에 몸을 흔들며 현아의 손을 뿌리쳤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더욱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차까지 안고 갈게요.” 진수는 유정을 안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서 현아의 차 앞으로 갔다. 현아가 따라 내려와서 차 문을 열고 유정을 카시트에 앉히려 하니까, 유정이 또 진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난감해하는 현아를 보고 진수가 말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차에 타서 집까지 안고 가도 되겠습니까? 이대로 좌석에 앉혀서 가기는 힘들 것 같네요.” 잠시 생각하던 현아가 다시 진수를 바라보고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상관없으니, 작가님께서만 괜찮으시면 좀 부탁드릴게요. 염치없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아기잖아요. 제가 잘 안고 있을게요.” 현아는 진수가 유정을 안고 차에 탄 후, 조심스럽게 운전해서 집으로 향했다.    

  

“작가님, 오늘 정말 미안했어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그래도 물어보고 싶네요. 솔직히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진수는 결국 그 예상 질문이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조바심을 느끼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말씀해 보세요. 솔직하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긴장해 보이는 진수에게 현아가 이제는 편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긴장하셨어요? 저에게 무슨 숨기는 것이 있으신 모양이죠? 설마 그런 것은 아니죠?” “아닙니다. 숨기기는요. 그나저나 궁금하다고 하신 것이 무엇이죠?” “음. 그게. 혹시 이런 것을 물어본다고 기분 상해하시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무슨 질문인데요?” “아까 유정이 달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자연스럽고 능숙하시더라고요. 혹시 아이를 키워보신 경험이 있나요? 저는 작가님을 미혼으로 알고 있었는데, 혹시 어디 숨겨둔 아이가 있다든지 말이죠. 아, 미안해요. 이런 질문은 실례죠? 그런데 하도 아이를 잘 안아서 재우시길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수는 염려했던 질문이 아니라서 일단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실례라니요. 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절대로 숨겨둔 아이는 없습니다. 걱정은 마세요. 그저 유정이에게 제 가슴이 편했나 보죠.” “아, 네. 그랬으면 다행이고요. 사실 제가 가장 걸리는 부분이, 총각인데 애가 있는 사별녀를 만나겠다고 하셨다는 부분이에요. 그런데 그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아이를 재우는 모습을 보고, 작가님께는 사람을 만나는 데에 있어서 아이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해서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솔직히 저도 작가님께서 그 부분을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그것이 가장 고민이었거든요. 그런데 다행스럽게 유정이가 대신 대답해 주었네요. 하하하.” 진수는 긴장했다가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진수가 웃자, 현아도 따라 웃었다. “네, 유정이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말하지 않고도 잘 전달되었나 봅니다. 아무튼 오늘 고마웠어요. 저는 항상 집에 있으니, 나중에 작가님 시간 되실 때 전화 주세요. 다음에는 유정이를 안 데리고 나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유정이도 데리고 나오세요. 저는 힘들지 않으니까요. 저도 유정이가 보고 싶고, 그리고 유정이도 좋아할 것 같고요.” 진수는 현아의 집 앞에서 현아와 유정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발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현아는 아직 잠이 덜 깬 유정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마치 무슨 수능 치른 수험생이라도 기다리듯, 온 가족이 모여 있다가 현아가 들어가니 질문이 쏟아졌다. “어때? 잘 만나고 왔어?” 가장 먼저 현주가 물었다. “아, 뭐가 그리 급해? 유정이나 받아.” 그러자 상철이 말없이 유정을 받아서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유정은 여전히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상철이 거실로 나오자, 가족들은 현아를 둘러싸고 계속 물었다. “아, 정신없어. 그냥 내가 천천히 말할 테니 함께 들어. 재방송 없다.” “총각이 애 딸린 사별녀를 만나겠다는 말이 걸려서 아예 유정이를 데라고 갔잖아. 말만 그렇게 하고 만일 실제로 애를 봤더니, 마음 내켜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그건 예의 없는 짓이지. 상대방을 생각해야 하잖아.” 현주가 뭐라고 툭 튀어나왔다. “아, 몰라. 네가 하도 나가보라고 했잖아. 기껏 자기 얼굴 봐서 나갔더니 뭐래?” “내 생각을 해준 것처럼 말하지 마라. 언니도 아는 사람이었다면서 그러냐?” 현주도 지지 않았다. “그래? 언니도 아는 사람이었대?” 희숙이 끼어들었다. “아, 몰라. 그렇다나 봐. 남자 싫다고 그렇게 뭐라고 하더니, 정작 사진 보여주니 아는 사람이라고 만나겠다는 거야. 그래 놓고 뭐 내 핑계를 대냐?” “그래, 맞아. 얼굴 보니 네 형부랑 몇 번 본 사람이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내 이야기를 듣고 만나겠다고 했는지 솔직히 궁금하지 않았겠니? 너 같으면 말이야. 그래서 나갔다. 왜?” “아, 왜 이야기하다 말고 그래? 현주도 말 끊지 마라.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듣다 못 한 희숙이 말을 끊었다. 현아가 다시 대충 이야기를 정리해서 말했다.    

 

“예전에 주혁이랑 같이 만나던 카페에서 봤지. 유정이 앞세우고 올라갔는데, 나 정말 놀랐다. 처음 보는 유정이가 그 남자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거야. 그러더니 우리가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유정이가 칭얼거리니까, 그때부터 그 남자가 계속 안아서 재웠다는 거 아냐. 내가 안으려고 해도 유정이가 딱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집 앞까지 그 남자가 유정이 재우면서 온 거야. 정말 미안하더라. 나는 그 남자가 아무리 나에게 애가 있어도 좋다고 했다지만 정작 유정이를 보면 조금이라도 꺼릴 줄 알고 데리고 갔는데,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덕분에 그 남자랑은 몇 마디 말도 못 나누고 헤어진 것이 오늘 이야기 전부다. 이제 속들이 시원해?” “그럼 그걸로 끝인 거야” 다시 현주가 물었다. “아니 끝은 아니고, 미안해서 어떻게 끝내자고 하니? 그냥 다음에 유정이 없이 한 번 다시 나오겠다고, 그때 이야기나 나눠보자고 했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희숙이 끼어들었다. “그랬더니, 참나, 그 남자 하는 말이 그냥 유정이 데리고 나오래. 자기도 유정이가 보고 싶을 거고, 유정이도 재미있다고 할 것 같다는 거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거봐, 그 남자가 언니에게 아이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한 말이 맞네, 뭘.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잖아.” 현아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아냐,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오늘 유정이가 자기를 잘 따르는 걸 보고, 아마 다음에도 유정이가 자기를 잘 따르면, 내가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 잘 모르겠어.” “아무려면 어때? 유정이 덕분이든 뭐든, 그 남자가 너한테 관심을 두게 되면 계속 만나보면 되잖아. 누가 뭐 당장 한 번 만나보고 시집가라고 했냐?” 희숙은 이제라도 현아가 재혼할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들떴다. “몰라, 아무튼 오늘은 그랬으니까, 그렇게 알아.” 현아가 일어나서 유정이 잠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현아를 만나고 집으로 온 진수는 이제 정말로 현아에게 한 걸음을 더 가깝게 다가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유정이 자기에게 친근함을 느끼고 있으니, 현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유정과 함께 몇 번만 더 만나도 현아를 향한 자기의 진심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지도 않게 오늘 현아가 유정을 데리고 나온 덕분에 어색할 뻔했던 분위기도 자연스러워졌고, 다음 만남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지금은 거의 잊고 살았지만, 라이터가 끝까지 자기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사후 서비스는 톡톡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부모님께 미리 이야기를 드리는 일만 남았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진수의 일에 크게 반대하신 적은 없었지만, 회사를 그만두는 것 같은 일과 아이가 있는 재혼녀와 결혼하는 일은 결코 같을 수 없었다. 당연히 반대하실 것이므로 미리 이해를 구해 놓아야만 나중에 현아를 데리고 인사하러 왔을 때 난처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가끔 진수의 눈치를 보면서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아직은 작가로서 안정된 것도 아니므로 조금 있다가 하겠다고 하면서 계속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물론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 비혼이 증가하는 추세인지라, 부모님으로서는 자식들이 결혼하겠다고 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아하셨다. 하지만 진수는 초혼이고 현아는 재혼인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이혼이 아닌 사별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남의 아내였던 여자를 며느리로 맞는 것이지 않은가? 왜 반대가 없으시겠나? 그런 데다가 남의 씨를 손녀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은 아무리 설득력 있는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현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는 정말 미친놈 취급을 받기 십상일 것이다. 기왕이면 라이터가 사후 서비스를 하는 김에 이런 상황도 정리해 주면 좋겠다는 허황한 희망을 품어 보기도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