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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Sep 12. 2024

라이터 Lighter_12

갈등의 끝_2

“야, 너희 닭살 돋게 붙어 앉지 말고 떨어져 앉아라. 지금은 부부 동반이 아니고 그냥 동창 모임이잖아.” 태준이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싫다. 이런 꼴 보기 아니꼬우면 너도 동창이랑 결혼하든지 했어야지. 하하하.” 진수가 웃어넘겼고, 친구들도 함께 장단을 맞췄다. “나야 뭐 이제 어차피 틀린 일이잖아. 장가를 다시 갈 수도 없고 말이야. 아무튼 오랜만이다. 둘 다.” “그래, 자주 시간을 못 내서 미안하다.”    

 

그렇게 너스레를 떨다가 이윽고 두 사람 앞으로 술잔이 돌아왔다. 민호는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고, 형욱이는 술잔들을 챙겼다. 원래 그랬던 모양이었다. 친구들이 만나면 으레 하나씩은 각자 역할이 있지 않은가? 나머지 친구들은 그저 구워주는 고기 먹고, 따라주는 술 마시고, 그러는 것이 역할이었다. 물론 주혁은 그런 역할 중에서 현아를 챙기는 역할만 하면 그만이었다. 원래 주혁이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것은 친구들도 다 아는 사실이라서, 주혁 대신에 현아가 술을 많이 받아마셨다. 현아는 워낙 학창 시절에도 술을 많이 마셨고, 그러다가 아무리 자세가 흐트러져도 친구들이 모두 챙겨주곤 했다. 술자리의 홍일점이라서 더욱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주혁과 결혼한 후에는 주혁이 현아의 전담이었다.  

    

그렇게 특별한 사고 없이 모임은 끝났다. 주혁의 출간 축하를 겸해서 만난 모임이므로 계산은 진수가 했다. 친구들은 이차로 다른 술집에 가겠다고 했고, 진수는 현아가 술에 많이 취했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막상 술집에서 밖을 나와 바람을 쐬더니 현아는 조금 술이 깨는 모양이었다. 잠시 술집 앞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뒷문을 열고 현아를 먼저 태운 진수는 기사에게 집 주소를 말하고는 현아를 돌아보았다. 차가 출발하니 현아는 속이 약간 울렁거리는 모양이었다. 진수는 현아의 어깨를 당겨서 현아를 자기 무릎 위에 엎드리게 했다. 그대로 잠시 눈 감고 잠을 자다 보면, 조금은 괜찮아질 것이다. 현아는 진수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잠들었다. 진수는 잠든 현아를 내려보다가, 아까 태준의 이야기를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야, 그런데 너희는 아이 안 낳냐?” 갑자기 태준이 안 하던 소리를 했다. “아이? 아, 우리는 원래 아이 안 낳기로 했어. 요즘 아이 낳아서 키우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잖아. 나는 자신이 없다.” “그래도,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잖아. 나는 아예 일찍 낳아서 일찍 육아 졸업하는 편을 택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현아가 한마디 했다. “야, 박태준, 나는 아냐. 주혁이가 낳지 말자고 한 거야. 오해 마라. 나는 아이 낳고 싶거든?” “그럼 낳으면 되지. 뭘 고민해?” “얘 봐라. 뭐 아이를 나 혼자 만드냐? 내가 뭐 자웅동체야? 주혁이도 낳겠다고 해야 낳는 거지.” 현아가 은근히 진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진수는 주혁이 평소 현아에게 아이를 낳는 문제에 대해서 그런 말을 했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으므로 임기응변으로 한마디는 했는데, 그다음에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묵묵히 있었다. “거봐라. 태준이도 그러잖아. 왜 아이 안 낳냐고.” 현아가 예쁜 눈으로 진수를 흘겨보며, 한마디 더 했다. 진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거기까지의 기억을 떠올리던 진수는 나중에 현아가 술에서 깨어나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라이터도 버렸고, 이전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데, 주혁이 아이를 안 낳겠다고 했건 어쩌건, 지금은 자기와 현아의 생각만 맞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말에 눈을 뜬 진수는 창밖을 둘러보았다. 집 앞이었다. 택시요금을 계산하고 나서 현아를 부축해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가 떠나고 나서 진수는 현아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아 친정 가족과 만난 일에 더해서, 힘들고 신경이 쓰이는 행사 하나를 더 치른 것이다. 그렇게 진수는 한 걸음 더 주혁에게 다가갔다. 일단 현아를 씻기고 잠을 재워야 할 것 같아서 현아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찬찬히 옷을 벗기고 욕조에 앉힌 다음에 샤워기를 틀었다. 현아도 잠에서 깨서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제 나는 나가 있어도 되지? 알아서 씻고 나와. 응?” 나가려는 진수를 현아가 잡았다. “나 씻는 동안 좀 붙잡고 있어. 넘어지면 어떻게 하라고 혼자 두고 나가냐?” 그제야 현아가 입을 열었다. “속은 괜찮아? 토하고 싶거나 그렇지는 않고?” “응, 속은 괜찮으니까, 그냥 너는 나만 잡고 있어. 금방 씻을게.” 하긴 혼자 씻으라고 하고 나가기는 조금 불안하긴 했다고 생각한 진수는 현아가 다 씻을 때까지 옆에서 잡아주었다. 현아가 다 씻고 나서 물기를 닦고 나가 침대에 누운 것을 보고, 그제야 진수도 씻기 시작했다. 이제 앞으로도 이런 자리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하나씩 치르고 나면, 자기는 더욱 주혁에 가까워질 것이다. 지난날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 씻고 나온 진수는 곧바로 침대에 올라 현아 옆에 누웠다. 잠이 들어가던 현아는 진수가 옆에 누운 것을 느끼고는 평소처럼 진수 쪽으로 몸을 돌려 진수의 배 위에 다리를 올렸다. 진수는 갑작스럽게 현아가 다리를 올릴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헉하고 낮은 숨을 뱉었다. 그렇게 현아를 안고 진수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은 아침에 진수가 먼저 눈을 떴다. 현아는 아직도 쌔근거리면서 잠자고 있었다. 곤히 자는 현아를 깨울 수가 없어서 진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진수는 이 시간과 이 자세를 가장 좋아했다. 무슨 노래 가사에도 있지 않던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같은 침대에서 아침에 눈을 뜨고 싶다느니 뭐니 하는 노래가 떠올랐다. 진수는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 이제는 현아와 단둘이었다.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이제는 이렇게 현아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어제 태준의 말이 떠오른 것도 아마 진수 자신이 새로운 가정을 원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주혁이 어쨌건, 지금의 주혁은 진수 자신이지 않은가? 다행스럽게 현아는 원래 아이를 원하는 쪽이었다고 하니까, 진수만 마음먹고 노력해서 현아가 임신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 같았다.  

    

진수는 아예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 진수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아는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아마 술에 많이 취했던 것 같았다. 원래 평소 주량으로는 취하지 않았을 텐데, 주혁의 흑기사를 자처하다 보니 친구들이 따라주는 술을 조금 지나치게 마신 듯했다. 진수도 그 자세로 꼼짝할 수 없어서 그냥 눈을 감고 조금 더 있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수가 현아의 손장난에 눈을 떠 보니, 그제야 현아가 깨어나서 진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수도 이제 잠을 잘 만큼 잤기에 현아의 손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는 이미 중천을 지나서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뭘 좀 먹어야지?” 배가 고픈 듯 손으로 배를 쓸면서 현아가 일어나서 주방으로 나갔다. 진수는 배가 그리 많이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때를 거르기 뭐해서 일어나, 현아의 뒤를 따라 안방에서 나왔다.   

   

현아는 주방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더니, 진수를 주방으로 불렀다. “술을 마셨으니 해장해야 할 텐데, 뭐 적당한 게 없네? 그냥 얼큰한 라면이나 끓일까?” “그래, 그러든지. 나는 아무래도 좋아. 술은 네가 많이 마셨잖아. 너 먹고 싶은 걸로 먹자.” 라면을 끓여서 다 먹고 나자, 현아가 말했다. “주혁아. 이건 네가 치워라. 난 취해서 설거지 못 하겠다. 흐흐흐.” “야, 치우는 건 치우겠는데, 그 웃음소리 좀 고치라니까? 넌 그냥 저리 가 있어.” “알았어. 고마워. 난 나간다. 흐흐흐.” 현아가 다시 흐흐흐. 거리며 주방을 나갔다. 진수가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자, 현아는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얼굴은 아직 술기운이 덜 빠진 건지는 몰라도 발그레한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자는 거야? 자려면 안방 침대에 가서 누워 자. 나는 서재에 있을게.” 그렇게 말하고 진수는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들어가 책장에서 시집을 한 권 꺼내어 의자에 앉았다. 이름 모를 시인의 시집이었다. 시집의 첫 장을 들췄다. 그리고 잠시 첫 페이지의 글을 읽으며 생각에 잠겼다.


“시는 그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내 마음속

 팔레트를 펼치고

 각양각색의 물감을 찍어

 그림을 그렸다.

 이곳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함이 있었다. 비록 글자로 종이 위에 적은 글이지만, 시인의 말처럼 그 글은 글이 아닌 그림으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진수는 시에 대해서는 소설보다 더 무지했다. 소설을 쓴 적도 없고, 그렇다고 돈을 주고 시집을 사서 읽은 적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 문장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처럼 느꼈다. 시집을 넘기며 시를 몇 편 읽었다. 물론 그렇게 난해하거나 깊은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시라서 그런지, 진수의 가슴에 쏙쏙 들어오는 글을 처음 보았다. 시를 다시 보게 된 진수는 책장에서 시집을 몇 권 더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시간도 많을 때, 시집을 몇 권 읽어 볼 심산이었다. 진수는 자기가 생각해도 불과 일 년 반이 조금 지난 시간 동안 이렇게 글과 친근한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지금은 주혁으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글과 친할 기회나 명분이 있지만, 이전 진수의 삶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글과 친해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진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실 연구원 처지에 문학적 글쓰기에 심취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겼던 진수는 서재를 나와 안방으로 갔다. 문을 열어보니, 현아는 침대에 없었다. 좀 누워서 쉬라고 했는데 아직 거실에 있나? 하면서 거실로 가 보니, 현아는 아직 소파에 누워서 쉬고 있었다. “현아야, 그렇게 누워 있을 거면 침대에 편히 누우라니까 왜 그러고 있어?” 진수의 목소리를 들은 현아가 몸을 일으키며 진수를 쳐다보았다. “왜? 잠이 안 와?” 진수가 옆으로 가서 앉자, 현아는 다시 진수의 다리를 베고 옆으로 누웠다. 진수는 생각난 김에 물었다. 

     

“현아야. 나 물어볼 것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어째서 아이를 안 갖게 된 거지?” 진수의 물음에 현아가 진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몰라서 물어? 내가 그렇게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는데, 네가 싫다고 했잖아.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진다고 말이야. 기억 안 나? 어제 태준이랑 있을 때도 내가 말했잖아.” “내가 그랬다고? 아니, 주혁이가 그랬다고?” “그래. 그랬어. 그런데 지금 갑자기 아이 이야기는 왜 하는데?” 현아는 아이 이야기를 하는 주혁이 의아스러웠다. 자기가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혁은 이럴 때면 영락없는 진수였다. 정말 기가 막혔다.   

   

“아, 주혁이가 그랬구나.” 진수의 말에 현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진짜. ‘주혁이가 그랬구나.’가 뭐야? 네가 그런 건데. 너 또 진수인 척하는 거지? 얘가 왜 잠잠하다가 또 이러냐?” “아, 미안, 미안. 그래, 미안하다. 그건 그렇고 그러면 지금이라도 우리 아이를 낳자. 어때? 나는 아이 좋거든.” “갑자기 아이가 왜 좋아졌는데?” “음. 그건 말이지. 솔직히 어제 태준이도 말했지만, 나중에라도 어차피 아이를 낳을 계획이 있다면, 한 해라도 일찍 낳아서 기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그리고 내가 소설 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딸을 낳는 것으로 썼잖아? 그렇게 쓰고 나서 보니, 우리도 너 닮은 아주 예쁜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역시 남녀가 결혼하면 아이는 있는 것이 좋아 보여.” “네가 아이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들어서 싫다고 했잖아. 그건 어쩌고?” “뭘 어째? 돈이 많이 들면, 우리가 많이 벌어야지. 아니, 내가 많이 벌면 되는 거 아냐?” “너 기분파처럼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이 낳고 싶어?” 현아의 말에 진수가 고개를 숙여 현아의 얼굴 가까이 자기의 얼굴을 들이대면서 “응. 아이 갖고 싶어.”하고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진수에게도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라이터를 떠올리면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은 했었는데, 이제 소설도 출간하고 날이 갈수록 주혁으로 살아가는 일에 적응하다 보니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현아와 함께 여기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언젠가는 또 변덕스럽게 뒤바뀔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무튼 자기의 생각을 좀 더 확고하게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던 차에 소설 속 주인공처럼 차라리 둘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나마 아주 가끔 떠올리던 라이터의 기억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 것이다. 만일 현아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여기에 남고 싶었다.   

   

현아는 주혁의 마음이 바뀐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결혼 초부터 자기는 책임질 수 없는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늘 이야기했다. 현아는 불만이 있어도 주혁과 연애할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라서 뭐라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기도 좀 그랬다. 단지 그저 일단 결혼하고 나서 다른 집에 아이들이 생기는 것을 보다 보면, 주혁이 나중에라도 아이를 원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혁이, 아무리 기억이 이상해졌다가 돌아오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현아는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생각해 보니 주혁에게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주혁이 기억을 잃기 전에는 현아와 관계할 때마다 항상 알아서 피임했다. 그래서 현아가 가끔은 주혁 몰래 임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자기가 진수라고 하면서 집에 돌아온 이후부터는 주혁이 전혀 피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현아도 주혁에게 피임을 일깨워 준다든지, 아니면 스스로 피임한다든지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남자가 다시 주혁이 아니라 진수였던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주혁은 아이를 갖자고 하지 않는가? 현아는 한동안 잊었던 라이터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제는 피임하지 않아도 아이가 생기는 것까지 라이터에 의존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아무튼 지금 주혁, 아니 진수의 말에 뭐라고 하든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잠시 생각하던 현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주혁아, 정말 너 아이를 낳고 싶은 거 맞아?” “그렇다니까? 이전에는 내가 싫다고 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정말 낳고 싶다고.” 진수는 한 번 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알았어. 그러면 우리, 아이를 낳자. 말했듯이 나는 원래부터 아이를 낳고 싶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낳을 수 있어. 임신만 되면 말이지.” “좋아. 그렇게 하자.” 진수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현아는 저 남자가 정말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했던 예전의 그 남자가 맞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다 잊고 아이를 갖는 일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진수의 말이 끝나자, 현아가 진수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자, 이제 아이를 가지러 들어가자고. 흐흐흐.” 현아가 웃는 소리를 듣고는 진수가 또 한마디 했다. “야, 전현아. 너 그 웃음소리 좀 고쳐라. 무섭다.” “무섭긴 뭐가 무서워. 흐흐흐. 잔말 말고 이리 들어오기나 해.” 현아는 진수의 손을 꼭 쥐고 안방으로 향했고, 현아에게 손이 잡힌 진수는 그저 말없이 그 뒤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모처럼 피곤했던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아침, 잠시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던 진수가 일어나니 현아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조금 더 자자. 넌 피곤하지도 않아? 난 힘들다.” “아냐. 너는 조금 더 자. 나는 뭘 좀 볼 게 있어서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진수는 침대에서 나와서 안방을 나섰다. 현아와 아이를 갖기로 하고 나자 갑자기 라이터가 생각났다. 분명히 버린 것이 확실한지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이대로 이곳에서 살기로 했는데, 혹시라도 자기가 착각해서 라이터를 버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재에 들어선 진수는 항상 책을 읽던 의자에 앉아 라이터를 놓아두었던 왼손 근처를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분명히 쓰레기봉투 속에 깊이 넣어서 버린 라이터가 그곳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진수는 자기가 무슨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눈을 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때 자기가 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현아가 쓰레기봉투에서 라이터를 발견하고는 꺼내서 갖다 놓은 것은 아닐까? 심지어는 꿈속의 그 남자가 무슨 재간을 피워서 라이터를 자기 곁에 다시 갖다 놓았을까? 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라이터가 끝까지 자기의 인생에 관여하려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진수는 꿈속의 남자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전에는 선생님께서 고의로 라이터를 없애려고 노력해도 결코 라이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순리에 따르시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실 날이 옵니다.”라고 했던 말의 뜻을 이제 알 수 있었다. 결국 어떤 상황에 대한 선택권은 진수가 아닌 라이터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때가 과연 언제일까? 진수는 아침부터 끝 모를 혼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현아에게 물어보아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가도, 라이터 문제만큼은 현아까지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라이터만 아니면, 현아도 자기가 진수가 아닌 주혁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다시 혼란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현아는 진수 자신과의 아이를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를 해서 현아보고 뭘 어쩌라는 것인지, 아무튼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진수는 일단 현아에게 라이터 이야기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현아가 주혁을 찾다가 서재로 들어왔다. “아침부터 여기에서 뭐 해?” 순간 현아는 주혁의 손에 들려있는 라이터로 눈이 갔다. 저 라이터, 자기가 내버렸는데도 돌아온 라이터, 그런데 주혁이 갑자기 왜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라이터를 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라이터를 버렸던 사실을 혹시 알고 있지는 않은지도 궁금했다. 물론 모를 것이지만, 라이터가 왠지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뭘 좀 생각하느라고.” “그런데 왜 라이터는 만지작거리는데?” 현아의 얼굴은 혹시 주혁이 라이터의 비밀을 알게 되어 떠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 현아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초조한 기색을 발견한 진수가 무심코 말했다. “아냐, 그냥 정말 별일 아냐. 이제 우리 아이도 가질 텐데, 라이터는 필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어. 라이터의 능력으로 내가 다시 돌아가겠다든지 하는 생각을 아예 할 필요조차 없잖아. 그래서 어디에든 버릴까? 하고 생각하던 중이야.” 물론 현아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버려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단 현아의 얼굴에서 초조한 기색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진수의 말을 들은 현아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환해지면서 웃었다. 그런 것을 보니 라이터 문제는 진수 자신에게뿐 아니라 현아에게도 고민거리였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아예 라이터를 말 나온 김에 내다 버릴까?” 속으로는 버려 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현아도 알면서, 그래도 주혁에게 한번 말을 건넸다. 자기가 한 번 버렸었는데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진수 역시 라이터를 버려 봐야 조만간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현아가 하자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밖에 나갈 때 아예 멀리 내다 버리자.” 현아는 주혁 입에서 그렇게 말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이제 둘 사이에 라이터가 끼어들 공간은 없어 보이게 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밖에 나갈 때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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