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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Sep 10. 2024

라이터 Lighter_10

소설가 소설_2

“계속 들어 봐. 아무튼 두 사람은 서로 진실한 사랑을 이루어 가게 되고, 사랑의 결실로 아주 예쁜 딸까지 낳아. 더할 수 없이 행복한 날을 보내게 되지. 그러다가 주인공이 평소에는 안 하던 짓을 해. 항상 집에 두고 다니던 그 라이터를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라이터를 들고 나왔어. 그리고 주인공이 이곳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생긴 거야. 길에서 누군가가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했고, 주인공은 아무 생각 없이 라이터를 그 남자에게 건넨 순간 주인공이 원래의 인생으로 되돌아가 버렸어. 여자와 딸은 그대로 두고. 그렇게 오 년 전의 주인공으로 돌아가 버렸어. 남자가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지. 여자는 청천벽력이었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현아가 진수의 말을 끊었다. “아, 이거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냐? 아무리 소설이지만 말이야. 너 진짜, 진수인가 뭔가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소설로 쓴 거야? 그래? 아, 진짜 이거 생각이 깊어지네.” “일단 들어 봐.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갈 방법이 없어서 그냥 여자와 딸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었어. 물론 그 시간대라면 아직 여자가 그 남편과 결혼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친정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어. 당연히 주소를 아니까 여자에게도 갈 수 있겠지. 그렇지만 이미 주인공은 처음의 세계로 돌아오는 순간 얼굴도 원래의 얼굴로 돌아갔기 때문에 여자는 주인공을 알아볼 수 없어. 슬픈 상황이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원래 주인공이 여자와의 사이에 딸을 낳았던 그 시간대가 되었지. 여자의 남편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서 여자는 딸을 키우는 한부모 가정의 엄마가 되어 있었어.” “아, 정말 설정 우울하다.” 현아는 점점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이제 마무리 단계야.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혼자 사는 언니를 생각해서 여자의 동생이 주위의 연줄을 동원해서 언니에게 소개팅을 주선해. 거기가 반전이지. 주인공이 소개팅 상대자로 나간 거야. 여기에서 여자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해. 당연히 다른 얼굴이니까. 하지만 주인공은 여자의 얼굴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그렇게 둘은 다시 결혼해서 딸과 함께 세 식구가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결론적으로 해피 엔딩이지. 어때?”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현아가 잠시 말없이 진수를 바라보았다. “왜? 이상해? 이거 아직 줄거리뿐이잖아. 디테일이 들어가면 소설이 좀 더 매끈해질 거야. 그건 내가 확신한다. 이제 시간 들이는 일만 남은 거야.” 아무래도 말이 없는 현아가 불안해서, 현아의 눈치를 보며 진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현아는 말이 없었다. 도무지 무엇이 불만스러운지 진수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현아가 입을 열었다. “야,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좋아.” 현아의 말에 한시름 놓은 것처럼 진수가 물었다. “그런데 왜 말이 없었어? 나는 또 네가 안 좋다고 할지 몰라서 가슴 졸이고 있었는데. 정말 괜찮아?” “응, 아주 좋다니까. 계속 완성해 보자.” 현아는 진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사실 현아는 주혁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많았다. 소설을 구상하는 것을 보면, 진수가 아닌 주혁이 분명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주혁이 자꾸 자기는 진수라고 말하곤 했을 때, 은근히 정말 진수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소설을 쓰는 것만 보아도 앞으로는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단,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주혁이 쓴 소설의 줄거리대로 자기들의 앞길이 이어진다면, 그리고 주혁이 공연히 그런 줄거리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항상 갖고 있었다면, 그러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혁에게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은 이 정도에서 소설 이야기를 정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가자. 나가서 한잔 어때? 소설 초고도 머지않아서 완성될 텐데 말이야. 안 그래?” 현아의 말에 진수가 대답했다. “나야 좋은데, 그런데 너는 어떻게 된 여자가 그저 건수만 있으면 술이냐?” “왜 싫어? 나 술에 취하면 귀엽지 않아? 다른 남편들은 마누라에게 술을 먹이지 못해서 안달이라는데.” 그 말에 진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술에 취한 여자 얼굴이 귀엽기는 하지. 그런데, 네가 술에 취해? 에이, 내가 먼저 취해서 그런지 몰라도 너 취한 모습 본 지가 거의 백만 년만이다.” “오, 그러고 보니 내가 취한 모습이 보고 싶기는 하구먼. 어때, 오늘 보여줘?” 현아가 계속 불을 질렀다. 진수도 오늘만큼은 지난번처럼 혼자 취하지 않고 술을 즐겨보겠다고 다짐하면서 현아와 같이 서재를 나왔다. 사실 둘만 사는 집이라서 이럴 때는 좋긴 했다. 술을 마시든 어쩌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둘은 주방으로 가서 술 마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주혁아, 소설 완성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아무리 그래도 몇 달은 걸리겠지?” 술잔을 손에 쥔 현아가 물었다. “뭘 몇 달씩이나 걸려? 구상하면서 동시에 쓰고 있었으니까 그냥 정리할 시간만 있으면 될 거야. 그런데 왜?” “아니, 그냥. 빨리 완성되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렇지.” “알았어. 부지런히 써볼게. 대신 퇴고할 때 너도 원고 검토해 줘야 한다. 알았지?” “그거야 물론이지. 자, 건배.” 현아는 술잔을 진수의 잔에 대었다가 혼자서 먼저 마셨다. 현아는 왠지 자꾸만 소설의 마지막이 마음에 걸렸다. 하필이면 왜 한부모 가정의 모습을 그렸는지.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메시지를 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젊은 사람들이 아이 낳는 것을 싫어하는 바람에 인구 증가율은 낮아지는 현실에서, 그래도 한부모 가정일지언정 아이를 낳아 훌륭하게 키우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로맨스 소설이 문학적으로 거창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사회적으로 아주 작은 메시지나마 전할 수 있다면 그 나름대로 가치 있는 작품이 될 것도 같았다. 물론 추리 소설 작가 주혁이 그런 부분까지 고려해서 로맨스 소설을 구상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현아도 솔직히 완성될 소설이 궁금했다.    

  

진수는 소설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생각이 많아진 듯 보이는 현아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아무리 자기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지만, 너무 적나라하게 까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도 진수 본인이야 상관없다고 하지만, 현아의 입장은 또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나중에는 어쩌면 한부모 가정 부분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오늘은 현아가 의도적으로 술을 빨리 마셨기 때문에, 둘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취기가 올라왔다. 진수는 이전에 딱 한 번 현아와 술을 마셨지만, 그때는 진수가 먼저 취한 탓에 지금 같은 현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빤히 마주 보고 있자니, 혈색이 발그레하게 올라온 현아의 얼굴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현아는 점점 목소리까지 약간은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말끝마다 웃음을 놓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취하긴 취해가는 모양이었다. “오호, 전현아. 이제 너 좀 취해 보인다. 더 마셔도 괜찮아?” 진수가 놀리듯이 말하자, 현아가 배시시 웃는 얼굴로 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나 좀 취한 것 같아. 이제는 그만 마실래. 이건 네가 치워.” “알았어. 너 더 마시면 안 되긴 하겠다. 속은 괜찮아?” “속은 괜찮아. 나 소파에 가서 앉을래.” 진수는 얼른 일어나 현아를 부축해서 소파로 옮겼다. 현아는 진수에게 일부러 그러는 듯 바짝 매달려서 끌려오다시피 소파로 나왔다. 현아를 부축하는 진수의 손에 뭉클한 현아의 가슴이 들어왔다. 그래도 현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수에게 매달렸다. 진수는 그런 현아의 모습이 마냥 귀엽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이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로 무너지는 여자라니, 이전 같으면 조금은 당황했겠지만 이미 자기는 현아의 남편이므로 당황할 필요도 없었다. 현아를 소파에 앉히자, 현아가 진수에게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진수도 그냥 그렇게 말없이 앉아서, 한참 동안 현아의 등을 쓰다듬었다.   

  

진수의 집필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라이터의 조화인지는 몰라도 날이 갈수록 진수의 필력이 높아만 가는 것 같았고 현아도 항상 곁에서 원고를 봐주고 있었던 덕에, 정확히 삼 개월 후에 원고가 완성되었다. 진수가 주혁이 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서 원고를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퇴고까지 끝냈다. 진수는 믿기지 않았다. 글이라고는 평생 써본 적이 없던 자신이 무려 이십만 자에 육박하는 장편 소설을 썼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불과 육 개월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 낸 일이었다. 그리고 마무리는 원래의 구상대로 남녀 주인공을 다시 만나게 하는 선에서 끝냈다. 원래 그런 소설일수록 여운이 필요한 법이다. 독자도 각자 자기만의 결론을 상상할 자유, 혹은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너무 결론을 제한적으로 가두어 버린다면 그 작품은 아마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이런 진수의 생각에 현아도 적극적인 지원을 보냈다. 이제 심심하면 전화로 신작 발표 계획이 있냐고 하면서 주혁을 닦달하던 출판사 대표에게 보내는 일만 남았다. 그 이후에는 작가인 주혁이나 현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진수가 먼저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잘 지내시죠? 저 이주혁입니다.” 주혁의 전화를 받자, 대표가 반가운 말투로 물었다. “아, 작가님. 저는 잘 지냅니다. 작가님은 요즘 어떻습니까? 어떻게 작품 집필은 잘 되고 있죠? 완성되면 가장 먼저 저에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대표는 눈치가 빨랐다. “물론이죠. 그래서 지금 전화를 드리잖아요. 하하하.” “오, 그래요? 탈고 끝났나 보네요? 그러면 어떻게, 바로 보내주시겠어요? 이번에도 추리 소설이겠죠?” “그게, 그런데. 이번에는 이게 좀 그래요. 로맨스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판타지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무튼 대표님께서 좀 봐주시겠어요?” 주혁의 말에 대표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요? 의외인데요? 작가님 작품 성향에 로맨스를 구상하셨다고요? 아. 물론 추리 소설에도 로맨스 요소가 있기는 했었죠? 아무튼 일단 보내주세요. 바로 읽어 보고 연락드릴게요.” “아, 그럴게 아니라. 제가 바람도 쐴 겸 이따 들리겠습니다. 오랜만에 대표님도 뵙고요.” “그러실래요? 그러면 좋죠. 저는 계속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들러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네. 그러면 이따 뵐게요.” 그렇게 전화를 끊은 진수는 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같이 출발하자. 우리가 드라이브 삼아서 그리로 가지 뭐. 어때? 같이 갈 거지?” “알았어. 그러자고.” 

    

며칠 후, 김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작가님. 이거, 작품 다 읽었습니다. 직원들하고 이야기도 나누었고요. 모두가 좋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작가님 이전 추리 소설에 비해 너무 밋밋한 것 아니냐고 했는데, 의외로 젊은 직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특별히 주는 것 없이 잔잔하게 마음속에 남는다나요? 오히려 제가 그 친구들에게 설득당했어요. 일단 출간하자고 합니다. 원고는 큰 수정 없이 교정만 보기로 하고요.”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그렇게 느꼈다니, 제가 의도한 대로 되었네요. 뭐라고 콕 짚어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읽는 사람의 마음에 남아 있다가, 언제든지 아련한 기억처럼 떠오르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거든요. 그러니, 더구나 젊은 직원들이 그렇게 읽었다니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면 대표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좀 쉬세요. 집필하시느라 힘드셨을 테니 말입니다. 참, 그리고 이렇게 멋진 작품을 제가 출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 대표 말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네. 바로 출간하기로 했어.” 김 대표 전화를 끊고 나서 진수가 현아에게 말했다. “그래? 좋아. 거 봐라, 내가 작품 좋다고 했지? 내가 보는 눈이 있는 거야. 하하하.” “그래 모두 네 덕인 거 알아. 고마워. 현아야.” 진수는 고개를 돌려 현아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대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라이터를 만나기 전만 해도, 진수는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이런 행복한 날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는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이런 행복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가끔 부모님을 그려보는 것 이외에, 평상시에는 이제 부모님 생각도 거의 나지 않았다. 일부러 잊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라이터가 자신에게 새로운 생에 더욱 적응하도록 부모님에 관한 기억을 자기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긁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것에도 나름의 까닭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이제 추리 소설 작가에서 멋지게 로맨스 작가로 다시 태어나신 이주혁 작가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현아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진수의 목을 끌어안았다. 진수는 현아가 자기에게 그럴 때마다 항상 편안함과 설렘을 함께 느꼈다. 벌써 일 년도 넘게 한 침대에서 부부로 살아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항상 자기는 주혁이 아니라 진수라는 생각을 잊은 적은 없었다. 그렇다 보니 현아가 아주 편한 아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선 여자의 몸을 탐닉하는 것 같은 설렘을 느끼곤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시기에는 결코 꿈도 꿀 수 없었던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수는 현아가 좋았다. 침대 위에서 현아를 끌어안고 있을 때마다 매번 처음 보는 여자와 섹스하는 것 같은 설렘과 황홀함을 느꼈다. 그렇게 진수에게 현아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여자였다. 그런 데다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까지도 이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진수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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