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소설_1
그렇게 친정엄마의 생일 외식도 그렇고, 새로운 소설의 소재 발굴도 그렇고, 어제는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하루였다. 지금까지 현아는 주혁에게 기억을 되살려 주기 위해서 주혁 주위의 사람들에 대한 나름의 정보를 들려주었지만, 실제 대면한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페 사장이라든지, 마트 종업원이라든지, 가끔 잠깐 스쳐 지나가는 동네 주민이라든지 하는 사람들은 예외로 두고 말이다. 그랬던 것이 어제 부모님과 동생의 눈에도 주혁이 아무 이상 없는 상태로 보였다는 사실에서, 현아는 한층 더 기분이 좋았다. 특히 여동생은 워낙 어려서부터 주혁을 잘 따랐기 때문에 주혁의 세세한 면까지 잘 알고 있었음에도, 어제는 주혁에게서 아무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지금 이 남자가 주혁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친구들까지 만나보면 주혁의 기억이(물론 자신이 알려준 사전정보이기는 하지만 현아는 그것을 주혁의 기억이라고 믿고 싶었다.) 더욱 확실히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잠시나마 라이터로 인해서 주혁의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던 일이 주혁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진수는 오후나 되어서 어제 마신 술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사실 현아의 친정 식구를 만나는 일도 진수에게 있어서 모험이자 새로운 시도였다. 아무리 자기가 자연스럽게 주혁을 연기한다고 해도 아주 사소한 일에서 그들이 자기를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망설였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현아 어머니 생신을 기념하는 외식인지라 발을 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가장 경계 대상이었던 현주까지도 자기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이제 다른 어떤 사람과 만나더라도 주혁으로 만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로써 자기에게 주혁의 기억을 되살려 주겠다던 현아의 노력에 최소한의 보답은 한 셈이었다. 나중에 현아와 함께 동창 모임에 나가 보면, 점점 주혁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주혁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점점 진수를 잃어가는 것만 같아서 안타깝기도 했다. 사실 이전의 생활에서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큰 미련은 없었다. 다람쥐 쳇바퀴와도 같은 직장생활과 몇몇 교우 관계가 진수 인생의 전부였다. 특별한 사회활동이나 취미활동도 없었고, 비교적 조용하고 건전한 생활이 진수 일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곳에서 현아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유혹을 점점 더 깊이 받고 있었다. 아니, 현아의 말처럼 자기는 원래 주혁이고, 어떤 이유로 인해서 잠시 진수의 인생을 살다가 다시 돌아온 것으로 믿고 싶기도 했다. 어차피 진수의 이십육 년 인생도 이곳에서 보면 아주 찰나에 해당하는 주혁의 인생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그만큼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시간이 진수의 머릿속에 혼란을 심어주다 못해 완전히 진수를 세뇌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떨 때는 그런 세뇌 공작을 강하게 부인하다가도, 어떨 때는 차라리 그냥 순순하게 자발적으로 세뇌당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는 것이 지금 진수의 솔직한 심정일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서 이렇게 혼란을 주는지 정말 라이터가 원망스럽고, 라이터를 전해준 사람도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가끔은 라이터의 신비를 믿어보고픈 생각도 들었다. 라이터가 무슨 이유든 이곳에 진수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라이터의 의도가 자기의 삶을 망가트리려는 것만 아니라면, 결국 언젠가는 본래 자기의 삶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싶었다.
진수는 곧장 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연말이 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워낙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진수인지라 걱정도 많이 했지만, 진수는 라이터의 능력을 믿기로 했다. 결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자기를 이런 소설가의 서재 한가운데에 던져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그다지 실패한 결과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 집필이 성공적이든, 아니면 기대에 못 미치든, 지금 현아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이 방법 외에는 없었다. 자기와 주혁이 동일인이라면, 자기도 모르는 필력이 자기 안에 내재해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그 필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기에 글을 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런 기대는 해 볼 수 있지 않겠나?라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원망만 가득했던 라이터에 대한 심경이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대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라이터에 대해서 조금은 호의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변화가 진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싹이 돋고 있었다. 거기에는 주혁에 대한 현아의 변함없는 믿음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말 물심양면으로 주혁이 집필에만 전념하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 기저에는 진수가 분명한 주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고, 혹시라도 주혁과 진수 사이에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어떤 작용의 힘이 존재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진수를 주혁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신념 비슷한 의식이 깔려 있었다. 아니 적어도 진수의 눈에는 현아의 속마음이 그렇게 보였다.
현아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라이터의 존재가 껄끄럽기는 하지만, 당장 주혁과 자기에게 눈에 띄는 문제점을 안겨주지는 않고 있었다. 물론 내버린 라이터가 돌아온 것은 정말 불가사의하고 찝찝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 특별히 자기의 일상에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진수라고 우기는 저 남자는 주혁에 비하여 아직 글 쓰는 능력만 확인되지 않았을 뿐, 현아 자신에게 특별히 부족한 부분은 없는 남자였다. 진수와 주혁이 동일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자기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면 진수를 주혁으로 만들어서 함께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정말로 만일 라이터가 진수와 주혁의 인생을 뒤집어 놓으려는 의도만 없다면, 라이터가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현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건 당연한 논리이다. 진수는 주혁만큼 현아를 사랑하고 있다. 아니 적어도 사랑하고 있다고 믿을 만큼 자기에게 잘하고 있다. 간혹 주혁의 존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때도 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그렇다 보니 엉뚱한 생각이지만, 주혁이 기억을 잃고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솔직히 현아가 주혁을 새롭게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의 주혁은 엄밀히 말해서 완벽한 진수도 주혁도 아니다. 현아 자신이 새롭게 만든 자기만의 남편 주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현아는 불만이 없었다. 이제 라이터가 무슨 조화를 부리든, 진수와 자기, 혹은 주혁과 자기의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시는 라이터를 내버리려는 그런 시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올 테니까. 진수는 진수대로, 현아는 현아대로 서로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각자의 생각을 다듬어 가고 있었다.
생각지 않던 소설 집필이라는 문제 앞에서도 진수는 망설임이 없었다. 소설 작법이나 뭐 그런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워낙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수는 순수하게 자기의 상상을 글로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으로만 글을 써 내려갔다. 현아도 웬만해서 주혁이 글을 쓸 때는 서재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주혁의 소설이 궁금하긴 했지만, 공연한 관심 표현으로 주혁의 글 쓰기 흐름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아는 궁금해도 주혁이 먼저 소설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기다렸다. 그렇게 두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주혁의 표정을 보면 이제 소설도 어느 정도 줄거리가 완성되어 가는 것 같았다. 물론 초고를 완성하고도 수없는 탈고의 과정을 거쳐야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주혁의 새로운 소설을 현아도 빨리 읽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주혁이 드디어 현아를 데리고 서재로 들어가 의자에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소설 쓴다니까 궁금했지? 무슨 글을 어떻게 쓸 것인지 궁금하지 않았어?” “당연히 궁금했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번에는 내가 오래 참아준 거야. 알기나 해?” “오, 그러셔? 그러면 주혁이가 글 쓰고 있으면 네가 자주 들락거렸나 보네?” 진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현아도 웃으며 받아쳤다. “들락거리다니, 내가 그나마 글을 읽어 보면서 이것저것 지적도 해주고 그러니까 네가 그 정도 글을 쓴 줄이나 알아라. 장기나 바둑도 훈수꾼이 수를 더 잘 본다잖아. 자기 글은 자기가 백 번 읽어 봐야 오탈자 하나 제대로 못 찾는 것이, 여기 글쟁이 바닥 생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냐? 나에게 고마운 줄이나 아셔.” “오, 그러셨나? 하하하 그동안 고마웠네요. 하하.” “야, 빈정거리지 말고 이야기나 해. 그래 어떤 줄거리야? 궁금해 죽겠네.” 현아가 다그치듯 몰아세우자, 진수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로맨스는 말이야. 무조건 달짝지근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해. 살벌한 로맨스도 있고, 뭐. 여러 가지가 있잖아. 내가 생각한 것은 그냥 평범한 로맨스야. 그런 구조를 설정한 이유는 누구든지 책을 펼치면 자신과 주인공을 동일시하도록 몰입감을 주기 위해서거든. 이거 맞니? ‘몰입감’이라는 용어 말이야. 자신도 모르게 소설 속으로 빠져드는 그런 상태를 그리는 용어가 맞아?” “야, 이주혁! 모르는 척, 진수인 척하지 말고 계속 이야기해.” 도중에 말을 끊는 주혁이 얄미워서 현아가 소리쳤다. “아무튼 그래서 누구나 나도 주인공처럼 저런 로맨스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너무 판타지 소설처럼 황당한 전개가 계속되면 그건 그냥 소설이잖아.” “그게 뭔 소리야? 소설이 소설이지 뭐, 그러면 소설이 뭐 특별한 글인 줄 알아?” “그런 생각이 고정관념이야. 소설을 소설로 읽으면 소설로 끝나는 거야. 하지만 소설을 소설로 읽지 않고 현실로 읽으면 독자 각자의 이야기가 되는 거지. 나는 그렇게 내 글이 독자의 가슴속에 남게 되기를 바라거든. 그래야 글로서의 생명력이 길어진다고 믿어. 물론 내 소설도 라이터 이야기로 인해서 판타지적 요소가 깔리기는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고, 나머지 장면들은 순수하게 남녀가 사랑하는 이야기야. 그 안에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지.” 진수의 말에 현아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나름대로 소설에 대한 확실한 소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글을 썼다는 건데? 내가 한 번 읽어 볼까?” “아냐.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나서 읽어 봐. 무조건 읽고 나서 무슨 글이 이따위냐고 혹평하지 말고 말이야. 알았냐?” 현아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진수가 소설 줄거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게 소설이 말이지. 처음에 잠깐 판타지 요소가 깔려. 주인공 남자가 저녁 퇴근길에 술을 한잔 마시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데, 주머니에 라이터가 없는 거야. 어디에선가 빠트린 거지. 그런데 다행스럽게 저만치에서 어떤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어, 주인공은 그 남자에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고, 그 남자는 아예 라이터를 주인공에게 건넸어. 그런데 주인공이 담뱃불을 붙이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 남자는 온데간데없는 거야. 이상하게 생각한 주인공은 그냥 라이터를 갖고 집에 와서 잠이 들었어. 여기까지가 도입부야.” “야, 주혁아. 잠깐, 이 시작 부분이 네가 진수인가 하는 남자라고 하면서 어떻게 하다 보니 나를 만나게 되었다는 그 부분이야? 너 정말로 그렇게 해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현아의 물음에 진수는 손사래를 치면서 조금 더 들어보라고 했다. “그렇게 주인공이 집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까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간 거야. 이게 판타지지. 그런데 거기에서 주인공의 이름과 외모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어. 더군다나 시간도 오 년이나 미래로 가버린 거야. 황당하잖아? 그런 데다가 그 남자는 아내도 있어. 그리고 그 아내는 주인공을 외모만 보고 자기 남편이라고 믿게 된다고. 조금 어리둥절하지?” “야, 그 여자가 나네?” “일단 여기까지는 맞아.” 진수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지만,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그 여자의 남편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야. 물론 짧게 이야기해서 그렇지, 사실은 남녀 주인공의 심리적 묘사와 누구에게 끌려가듯이 빠져드는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그려질 거야. 뭐 우리의 이야기도 조금 각색해서 넣고 말이지. 소설이 그렇잖아? 사실이 아닌 것도 소설로 쓰면 사실인 것처럼 빠져들게 할 수 있잖아. 나는 글 쓰기를 잘 모르지만, 아무튼 독자의 입장에서 쓰다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과 몰입감이 있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 좋아. 그래서.” “결국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남편으로 살아가면서, 그 남자의 직업이었던 소설을 쓰는 작업을 시작해. 원래는 문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아마 라이터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주인공에게 육체를 제공한 남자의 재능을 주인공이 그대로 물려받기라도 했듯이 멋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결국 그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여자 주인공의 남편은 작가로서 이름을 더욱 날리게 되지. 물론 그런 과정에서 남녀 주인공은 혹시 자기들이 진짜 부부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새롭게 솟아오르는 사랑으로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거야. 이제 주인공이 여자의 진짜 남편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이미 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의무감이든, 사랑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두 사람을 꼭 붙들어 매는 것이 존재하게 되었거든.” 현아가 뭐라고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진수가 말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