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심기_2
“뭘 하느라 여태 안 나오고 있어? 씻기는 씻고 그렇게 앉아 있는 거야?” 진수가 한참을 나오지 않자, 궁금한 현아가 물었다. “아냐. 로맨스 소설 구상에 대해서 생각 좀 하다 보니 그랬어. 금방 나갈 테니 너는 잠시 나갔다가 나중에 들어와서 씻어.” 진수는 엉겁결에 그렇게 둘러댔다. 욕실에 앉아서까지 돌아갈 생각에만 골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현아도 마음이 편할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뭘 좀 괜찮은 소재가 떠오른 거야? 와, 역시 화장실이 사색의 창고라더니 틀린 말 하나도 없네. 이야기 좀 해 봐. 어떤 소설이야?” 현아는 벗은 채로 아예 진수의 턱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진수를 보며 말했다. “아, 나가서 말해줄게. 일단 나가 있어. 넌 내가 욕실에만 들어오면 그렇게 따라 들어오고 그러냐?” 진수는 아무리 현아와 부부 사이라고 해도 욕실에서 벌거벗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는 거북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현아가 욕실에 따라 들어올 때마다 내보내려 하곤 했다. “뭐 어때? 궁금하니까 그렇지. 그냥 같이 씻으면서 말해줘도 되잖아. 어떤 이야긴데?” 현아는 진수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진수를 다그쳤다. “아, 진짜. 나가서 이야기해 준다니까. 얼른 나가.” 진수는 계속 현아를 내보내려 했지만, 현아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진수는 일단 상황을 모면하려고 둘러댄 말이었는데 씻고 나가서는 무슨 말이라도 생각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먼저 씻고 나온 진수는, 현아를 욕실에 남겨둔 채 서재로 발을 옮겼다. 서재로 들어온 진수는 의자를 창가로 옮기고, 거기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방에 온 지도 한참 되는데, 그동안 자기는 무엇을 했는지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주혁인 채로 적응해서 지내는 중이지만, 명색에 작가인 주혁의 대역을 하면서도 글 한 자 써본 적이 없이 말뿐인 작가로 살아왔다. 지금까지야 그래도 현아가 이해하니 그렇지, 만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주혁으로서의 진수의 삶도 정말 의미 없는 삶이 되어버릴 것이다. 누가 라이터 장난을 생각해 냈는지는 몰라도 실제 당하는 사람에게는 가혹했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끌려가는 게임처럼 벗어날 길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구조로 기획된 고도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라이터의 장난까지 현실이라고 했을 때, 그 장난의 희생자들에게는 어떻게 보상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라이터의 장난이라면, 그래서 자신을 이런 곳으로 보냈다면, 글 쓰는 재주도 함께 주었어야 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얼굴도, 육체도 다르게 만들면서 자기의 능력은 그대로 두었다면, 그것은 대체 무슨 속셈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수는 지금까지 자기가 놓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단지 자기의 얼굴과 신분이 바뀌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원래의 자기 집이나, 혹은 자기가 살아가던 환경 근처에 가 볼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꼭 그럴 것만도 아니었다. 막말로 자기가 집에 찾아가서 부모님의 얼굴을 본다고 해도 무슨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아들 친구든 누구든 아무튼 아는 사람이 찾아온 것으로 알고 만나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어도 먼발치에서라도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진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 번은 확인해 볼 가치가 있는 상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현아에게는 뭐라고 말하고 다녀올지만 고민하면 될 것이다. 진수는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도 생각하게 된 것은 다행인 것 같았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현아가 들어와 있었다. 자기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주혁의 모습을 본 현아는 다시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주혁이 다시 진수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현아가 주혁 옆에 서서 주혁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로맨스 소설, 그래. 아까 욕실에서, 무슨 소재가 떠오른 거야?” 갑자기 현아의 물음에 현실로 돌아온 진수가 말했다. “응. 간단하게 구성을 짜 보고 이야기해 줄게. 줄거리가 아직은 조금 엉성할 것 같아.” “뭐 어때? 그냥 간단히 이야기해 봐. 혹시 무슨 막장이나 자극적인 소재는 아니지?” “에이, 아냐. 넌 내가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거 알면서 그러냐? 너무 흔한 소재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자극적인 소재도 안 된다. 너무 허황한 판타지도 안 된다. 뭐 계속 그런 것 때문에 아예 시작조차 못 하는 거잖아.” “그래도, 그냥 한 줄로 말해 봐. 무슨 이야긴데 그래?” 현아는 모처럼 주혁이 소설 소재가 떠올랐다고 하니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몇 번 뒤로 빼던 진수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둘러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이야기가 좋겠어. 주인공이, 예를 들어서 철수라고 하면, 철수였다가 뭐 다른 사람 영수였다가 하는 이야기 안에 적절한 사랑 이야기도 넣고 말이지. 소설이 다 그렇잖아. 지금 우리의 상황과 비슷한 이야기라면,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고 말이야. 그리고 그 안에 이 라이터 이야기도 좀 적당히 꾸며서 삽입하고 말이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주 약간은 판타지적 요소도 들어가게 되는 거잖아. 어때?” 진수가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라이터를 현아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주혁의 이야기를 들은 현아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아니, 주혁의 이야기보다는 주혁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보고 깜짝 놀라 말없이 우두커니 서서, 주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말이 없는 현아를 보고 진수가 물었다. “왜?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무리 소설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이야기라니까 잠시 당황했지. 그런데 하긴 뭐 다른 소설가들도 처음에는 다 그러지 않나?” 자기의 반응에 풀이 죽어 보이는 주혁을 보고 현아는 금방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러면 한번 정식으로 구상해 볼까?” “일단 나와, 혼자 방에 있지 말고 나가서 이야기하자. 이건 여기 놓아두고.” 그렇게 말하며 주혁의 손에서 라이터를 건네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주혁의 손을 잡아끌고 서재를 나왔다. 현아의 손에 이끌려 서재를 나오던 진수는 갑자기 그런 현아를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소설 이야기를 하자고 하더니 갑자기 다시 나가자고 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는 라이터에 대해서 현아가 직접 언급한 적도 없는데 심지어는 라이터를 손에 쥔 적도 없었는데, 자기 손에 있는 라이터에 손을 대는 현아를 보며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라이터를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알 수 없었다.
주혁이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본 현아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자기 손으로 버리고 온 라이터가 어떻게 주혁의 손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혹시 주혁이 지금까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현아의 머리는 혼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주혁의 모습을 하고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저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김진수라는 남자가 실제로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은 끝없이 솟아올랐다. 주혁의 몸에 다른 사람 영혼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고 단지 주혁이 잠시 기억을 잃었을 뿐이라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 모두가 자신의 착각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되돌릴 수 있을까? 이제 진수보다는 오히려 현아의 정신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주혁의 표정을 보니 라이터가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서재에 있던 라이터를 보면서, 구상 중이었던 소설의 내용에 라이터 이야기도 넣어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서재에서 나와서도 말이 없는 현아를 보고 진수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번에도 소설 소재가 마음에 안 들어?” 주혁이 묻는 말을 들은 현아는 순간 정신이 번쩍 뜨였다. 진수니 주혁이니 하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도 아니고, 당장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단순해 보였던 로맨스 소설 소재에 지금 주혁이 실제로 겪고 있는 라이터 이야기까지 넣고 줄거리를 구상해 본다면 의외의 소설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아는 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해 보니 소설 소재로도 좋을 것 같네. 정식으로 줄거리를 구성해 볼래? 나는 찬성이야.” 표정만으로는 별로라는 인상을 주던 현아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진수는 깜짝 놀랐다. “그래? 괜찮겠어? 우리 이야기인데.” “그럼, 생각해 보니 좋을 것 같아. 대신 그 라이터 이야기인지 뭔지도 이야기를 제대로 만들어 삽입하고 말이지. 그런 요소가 들어가면 의외로 좋아할 사람들이 있을 거야. 약간 판타지 같은 요소가 될 수도 있잖아.” “오케이, 알았어. 내가 구상해 볼게. 나중에 너도 좀 봐주라.”
진수는 의외로 현아가 공감한다는 사실에 의욕이 생겼다. 생각해 보면 지금 자기조차 헷갈리는 이런 상황을 그리면서 로맨스 요소를 적절하게 삽입했을 때, 나름대로 추리 소설 작가 주혁 특유의 로맨스 소설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남의 이름으로 쓰는 작품이지만, 자기만의 글을 쓴다는 사실도 진수를 흥분시켰다. “오늘 같은 날은 한 잔 마셔 줘야지?” 현아도 옆에서 거들었다. 요즘 주혁이 소설 때문에 의기소침한 몇 달을 보냈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잘만 하면 로맨스 소설을 아주 멋지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수든 주혁이든 오늘 같은 날은 자축해야 하는 날이 맞다. “안주는 뭘 해서 마실까?” “오늘은 와인 말고 조금 센 술로 마시자. 집에 양주 있었나?” “그럼 있지. 우리 집에 술이 떨어지면 큰일 나는 거야. 술 떨어지면 내가 불안하거든. 흐흐흐.” “아, 이 여자가 왜 또 ‘흐흐흐’ 거리면서 웃고 그래? 음흉하게.” “음흉하긴 뭐가 음흉해? 그냥 술 마시자고 하니까 좋아서 그렇지. 흐흐흐. 아예 지금부터 일찌감치 마실까?” “야. 뭔 술을 대낮부터 마시냐? 조금 있다가 마시지 않고. 그리고 나는 네가 ‘흐흐흐’하고 웃을 때면 왠지 몸에 소름 돋아.” “아이고 정신 차리세요. 대낮은 무슨 대낮? 이 정도면 이제 술(酒)시는 지난 거야. 그리고 소름은 무슨 소름이냐? 내가 무슨 벌레야? 아니면, 널 잡아먹기라도 한 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주방으로 와.”
현아는 앞서서 주방으로 들어가 치즈와 간단한 스낵 같은 안주를 챙겼다. 진수가 식탁에 앉자 ‘헤네시 XO’와 잔 두 개를 꺼내서 식탁 위에 놓았다. 진수가 술병 마개를 뽑고 향을 음미했다. 진한 양주 향이 훅하고 코를 찔렀다. 현아가 술을 잔에 따라서 진수 앞에 놓고 말했다. “자, 이주혁 작가님의 새로운 로맨스 소설 집필 시작을 축하합니다. 하하하.” 현아의 말에 진수도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 소설 소재 문제로 신경을 썼던 일이 아주 오래전의 일만 같았다. 비록 진수였던 시절에는 써본 적도 없는 소설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써봐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둘은 그렇게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진수는 주혁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려니 조금은 신경이 쓰였지만, 그저 기분에 따라서 현아가 따라주는 대로 무조건 받아 마셨다. 주혁의 몸이 진수보다는 술에 약한 것 같았다. 반대로 현아는 진수보다 더 마시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런 현아를 보면서 따라 마시다가 결국 진수가 먼저 취해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주혁이 현아보다는 술에 약하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야, 이주혁. 취했냐? 그러기에 누가 나 따라서 막 마시래?” “나도 내가 이렇게 술을 못 마시는 줄 몰랐다. 왜? 나라고 먼저 취하고 싶었겠냐? 그래. 남편보다 술 잘 마셔서 좋겠다.” 취한 진수가 현아에게 투덜거렸다. “취했으면 일어나 안방 가서 누워. 그러고 있으면 어지럽다. 술잔이랑은 내가 치울 테니까.” 현아가 진수를 부축해서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눕히고 다시 주방으로 나갔다. 진수는 자기의 의도와는 다르게 술에 약한 주혁의 몸으로 술을 마시려니 답답하기만 했지만, 이미 몸은 취할 대로 취한 상태였다. 천정이 빙빙 도는데, 하필 그때 꿈속에 나왔던 그 남자 얼굴이 떠올랐다. 진수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주혁을 침대에 눕히고 나온 현아는 주방 식탁의 술자리부터 치웠다. 물론 주혁보다 자기가 술이 센 것은 맞지만, 아까 라이터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기분이 좀 찜찜하긴 해서 오늘은 현아도 술을 많이 마셨다. 라이터가 어떻게 다시 서재로 돌아와 있을까? 주혁은 라이터가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가 갖고 나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알 수 없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귀신 같은 것도 아니고, 아무리 추측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주혁이 처음 했던 말들이 차곡차곡 떠올랐다. 자기는 주혁이 아니고 진수라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지금처럼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도 모두 라이터와 관련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 말이 진실이라면, 지금까지 자기와 한 침대에서 생활한 저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주혁인가? 진수인가.
그렇지만 현아 자신은 분명히 주혁과 한 몸이 될 때, 그 남자가 혹시라도 주혁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남자가 정말 주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뭐가 뭔지 누가 설명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현아가 조용히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주혁은 이미 취해서 자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히려 주혁을 이리저리 흔들어도 그냥 끙하는 소리만 낼 뿐, 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현아는 주혁의 옷을 다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리고 양치질을 한 후, 주혁의 옆에 누웠다. 라이터 일을 겪고 나니 옆에 누운 주혁이 오늘 아침까지의 주혁과는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누워 있으니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다 보니, 라이터는 라이터고 주혁은 주혁이라고 그렇게 별개로 생각하고 싶었다. 지금 잠든 저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주혁이 맞지 않은가? 현아는 그냥 일단 라이터 문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현아는 주혁을 바라보고 옆으로 누워서 평소처럼 주혁의 배에 다리를 올리고, 손은 잠옷 안에 넣은 채 눈을 감았다. 이 순간만큼은 주혁임을 의심하지 않고 싶었다. 술에 취해 잠들었음에도, 현아의 손이 닿으면 주혁은 언제나 그 손안에서 일어섰듯, 지금도 그러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이 남자는 분명 주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주혁은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현아는 주혁의 이런 모습을 오랜만에 보았다. 그런 주혁을 지켜보다 보니, 잠시나마 어쩌면 주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잠든 주혁이 더 사랑스러웠다. 현아는 평소처럼 주혁을 위에서 내려보았다. 그리고 주혁이 눈을 뜨고 현아를 올려 보는 것을 보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아침은 조금 늦게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해장이 될 만한 재료가 있는지 냉장고와 팬트리를 둘러보다가 황태포를 꺼냈다. 남들 다 먹는다는 북엇국을 끓여볼 생각이었다. 전에는 주혁이 해장국을 먹어야 할 만큼 술에 취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국을 끓여야 할 것 같았다. 어설픈 조리 실력으로 해장국을 끓인 현아는 주혁을 데리러 안방으로 들어갔더니, 주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 욕실 문을 열어보니 주혁은 욕조에 앉아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고 있었다. 현아는 샤워기 물을 잠그고 주혁을 일으켜서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은 후 욕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피곤해도 해장국을 먹고 다시 잠을 자도록 일단은 먹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