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_2
처음부터 이 사건(진수는 사건이라고 부르고 싶었다.)의 발단은 바로 저 라이터였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길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에게 불을 좀 빌려달라고 했고, 그 남자가 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것이 사건 발생의 전모였다. 진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불을 빌린 것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런데 왜 진수는 자기에게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수는 이내 고개를 흔들더니 라이터에서 시선을 돌렸다. 생각 같아서는 발단이 된 저 라이터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아니, 어디 멀리 던져버리거나, 깊은 물속에라도 빠트려서 영영 진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고 싶었다. 지금의 생활에 깊이 빠져들수록 라이터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서로 교차했다. 라이터로 인해 이곳에 왔고, 지난 생을 잃어버렸다. 반면에 현아를 알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고 있었다. 도대체 라이터에 서운함을 표해야 하는지, 아니면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지 진심으로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답답함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긴 라이터가 손에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 정확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단 라이터는 잘 보관하기로 했다.
현아는 날이 갈수록 주혁이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더군다나 처음 주혁을 그 집에서 데리고 왔던 날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주혁이 주장했던 진수라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주혁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 이제는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주혁이 잠시 기억을 잃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물론 가장 가까운 가족과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주혁의 말과 행동에서 조금은 이상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주혁아, 너 이제 새로운 소설 안 써?” 현아가 서재로 들어서며 말했다. “새로운 소설? 무슨 소설 말인데?” 진수는 갑자기 현아의 입에서 소설이라는 말이 나오자 잠시 멈칫했다. 현아는 진수를 완벽하게 주혁으로 알고 있으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겠지만, 진수 입장에서는 주혁의 흉내나 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자기의 처지에서 생전 써보지도 않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왜 그랬잖아? 너도 추리 소설 같은 것 말고, 달짝지근한 로맨스 소설도 언젠가는 꼭 쓰겠다고 말이야. 기억 안 나?” “응, 내가 그랬나? 근데 현아야. 내가 주혁이 되려고 노력 중이라는 사실과 나에게 글 쓰는 재능도 있다는 사실은 전혀 관계없는 문제라는 점은 생각해 본 거야?” “주혁이 된다니 무슨 말이야. 네가 주혁인데. 그리고 내가 이야기해 주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기억을 되찾아 가고 있잖아. 그게 무슨 주혁이 흉내를 내는 거야? 너 설마 아직도 네가 진수니 누구니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는 거야? 그래?” “아니 그게 아니잖아. 내가 진짜 주혁이라면, 네가 상기해 주기 전에라도 주혁에 대한 무의식 속의 기억이라도 있어야 하잖아? 그렇지 않아?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도 잘 모르겠어. 내가 진수인지, 주혁인지, 과연 글 쓰는 재주가 있는지, 아닌지를 모르겠다고.” 현아는 진수의 말에 갑자기 마음속 깊이 잠재운 줄 알았던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네가 주혁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인데?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넌 누가 뭐라고 해도 주혁이가 맞아. 오직 나 혼자만 알 수 있는 주혁의 모습과 습성을 네가 알고 있잖아. 나도 그런 너의 모습을 보고 주혁이라고 확신했고. 그것만으로도 네가 주혁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진실이야.” 진수는 가끔 이럴 때 답답함을 느꼈다. 진수가 그렇다고 해서 현아의 집을 나가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바에는 어차피 현아의 확신을 충족시켜 주어야 하지만, 지금처럼 진수에게 글을 쓰라고 한다면 그것은 약간 선을 넘는 요구인 것처럼 들렸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이처럼 진행되는 것도 원하지는 않았기에 불안해하는 현아를 끌어안아 달래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줘. 내가 노력해 볼게. 알았지?” 진수의 말에 다시 환한 얼굴이 된 현아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일단 구상이 끝나면 예전처럼 둘이 함께 의논해 보자. 그러고 나서 무조건 써보는 거야. 로맨스라고 뭐 추리 소설과 다를 게 있겠니? 너는 잘 쓸 수 있을 거야. 나는 믿어.”
이제 진수에게는 돌아갈 길이 없었다. 어차피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어쨌든 진수에게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흔한 문학청년이었던 시절은 있었다. 그러니 글을 쓰라면 쓰고, 그 글이 서투르다면 다시 또 쓰고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있었다. 일단 현아도 문창과 출신이라고 했으므로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해서 소설인지 뭔지를 써볼 각오를 했다. 만일 그 글이 수준 이하로 판명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현아를 위해서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수는 그것이 현아에게 베푸는 최선의 호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마음을 먹는 것과 실제로 소설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틈틈이 소설의 소재에 대하여 현아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지만, 현아조차도 진수의 소재에서 별다른 매력을 찾지 못했다. 몇 번이고 진수가 호감이 가는 소재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본 현아는 공연히 자기가 로맨스 소설을 써보라고 한 것은 아닌가 해서 조금은 미안한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진수는 계속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쉽게 소설에 접근하지 못한 채, 시간만 지나가고 있었다.
“주혁아, 내가 공연히 로맨스 소설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 보다 못한 현아가 약간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냐. 마음 쓰지 마. 네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시간을 두고 계속 생각해 보면 언젠가는 될 거야. 내가 조금 더 노력해 볼게.” 진수는 진수대로 현아를 달래주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소설을 쓰려면 글 쓰기에 자질이 있는 작가가 충분한 독서와 다양한 경험을 동원해서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해야 그나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진수는 그런 경험, 즉 그럴듯한 로맨스 경험이라든지 하는 것부터 부족했기 때문에 소설을 구상하는 단계부터 벽에 맞닥트린 것이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자, 이제 거리는 서늘한 늦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돌아보니 진수가 현아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해서, 벌써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진수는 이제 자신조차 자기가 진수인지 주혁인지 헷갈리게 되었다. 낮에 가끔 서재에 있을 때는 눈앞에 보이는 라이터 때문에 진수였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밤에 현아와 함께 잠이 들 때는 영락없는 주혁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으로 진수와 주혁 사이를 오가던 진수는 아무래도 중대 결심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아와 함께 이곳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소설가인 주혁의 인생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글 쓰는 인생을 포기하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무슨 수를 쓰든지 글을 쓰는 주혁이 되든지, 아니면 반대로 라이터의 비밀을 파헤쳐서 이전의 진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라이터의 비밀을 알아내기만 하면, 현아에게는 차마 못 할 짓이지만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고민의 시간은 점점 길어져만 갔다. 혹시 신간 계획이 있냐면서 간혹 연락해 오는 출판사 대표의 전화까지도 진수에게는 온통 부담이었다.
현아는 현아 대로 주혁이 고민하는 내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소설 집필에 대한 부담이 주혁을 심하게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만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아에게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날들이 안타깝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도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홀로 소설 집필을 구상하고 있던 주혁이 기운이 빠진 표정으로 안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현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주혁을 이불속으로 잡아끌었다. “이제 오늘은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 사람이 좀 쉬어야지 두뇌도 회전하지. 그렇지 않아?” 진수는 말없이 현아가 이끄는 대로 침대 위로 올라와서 이불속으로 들어가며 현아 옆에 누웠다. 현아는 늘 하던 자세로 진수의 가슴을 배고 다리를 진수 몸 위로 올렸다. “이제는 고민 그만하고 자자.” “그래, 알았어.” 진수도 품 안에 파고드는 현아를 꼭 끌어안았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이었을까? 진수는 생전 잘 꾸지도 않던 꿈을 꾸었는데, 뜻밖에 꿈속에서 진수에게 라이터를 주었던 그 남자를 보았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옷차림은 꽤 단정하게 바뀌어 있었고, 길던 머리도 아주 짧게 자른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 큰 눈만 아니라면, 진수도 잘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진수는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세요, 혹시 전에 저를 보신 적이 있으시죠? 저에게 라이터를 주신 분이 아니신가요?” “네, 맞습니다.” “제가 그 라이터를 받고 난 후부터 이렇게 제 생활이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당신이 그렇게 하신 건가요?”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고요. 라이터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도 당신처럼 생각지도 못한 시간을 보냈던 경험이 있거든요.” 진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까짓 라이터가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황당한 상황에 빠지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저는 제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라이터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요? 저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인가요? 설혹 제가 집을 찾아간다고 해도 이 얼굴로는 다시 전처럼 살 수 없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뜻이죠? 저는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얼굴이 이래서 못 가고 있는 겁니다만.”
“맞습니다. 선생님께서 이전으로 돌아가시려면, 라이터가 스스로 선생님의 손을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러는 것 이외에는 선생님은 지금 이곳을 떠나실 수 없습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라이터가 선생님의 손을 떠남과 동시에 선생님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겁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그전에는 선생님께서 고의로 라이터를 없애려고 노력해도 결코 라이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순리에 따르시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실 날이 옵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해 드릴 수밖에 없네요.” 진수는 라이터가 스스로 진수의 손을 떠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 남자의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의 말에 의하면, 진수가 라이터를 어디에 버린다든지 해서 라이터와 멀어져 봤자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직 라이터가 스스로 진수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 상황이 가능하기나 한가? 무슨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도 아니고, 지금의 시대에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라이터가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무슨 자유 의지를 지닌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남자는 그렇게 알 듯 모를듯한 말을 남기고는 진수의 꿈속에서 사라져 갔다. 진수는 다급하게 흐려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를 붙잡으려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진수 자신의 선택으로 이곳에 남든, 아니면 돌아가든 여부를 떠나서 일단 라이터가 알아서 진수를 떠난다는 의미라도 알아 두어야 했다. 그래야만 상황을 변화시킬 선택권이 진수에게 넘어올 확률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진수의 손은 허공을 가르기만 하고 남자의 환영은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그렇게 허둥대고 있는데 누군가 진수를 흔들었다. 눈을 떠 보니 현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진수를 올려 보고 있었다. “주혁아, 왜 그래? 무슨 악몽이라도 꾼 거야?” 진수가 말이 없자, 현아가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꿈이길래 그렇게 허우적거리는데? 사람 무섭게 말이야.” 그제야 현아를 보며 진수가 말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나 때문에 너까지 깬 거야? 그냥 다시 자자.”
그렇게 말하며 진수는 눈을 다시 감고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도대체 그 남자가 어떻게 자기의 꿈속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인지, 그것까지도 라이터의 조화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그 남자를 볼 수 있을 것인지, 궁금증은 끝 모르게 솟아올랐다. 만일 혹시라도 그 남자를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확실하게 라이터가 스스로 진수 손을 떠나게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진수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고, 현아는 도중에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이 들어서 그런지, 그때까지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주혁은 하는 수 없이 현아가 깨지 않도록 그냥 그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러자 천정에서는 다시 그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이제 상상 속 주혁의 환상에 더해서 그 남자의 환상까지 진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