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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Sep 02. 2024

라이터 Lighter_05

새로운 시작_1

갑자기 진수의 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어? 내 전화인가? 전화를 어디에 두었더라?” “기다려 봐. 일단 내가 받아 볼게.” 현아가 재빠르게 식탁에 놓아둔 전화기를 가지러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래. 네가 받는 게 낫겠다.” 진수는 그대로 소파에 누워서 말했다.      


“태준이? 응, 웬일이야?” “주혁이? 주혁이 지금 욕실에서 씻고 있는데 왜? 무슨 일이 있어?” “아, 그래? 알았어. 나중에 주혁이 나오면 내가 전해줄게. 그냥 말만 전해주면 되는 거지? 주혁이가 다시 너에게 전화해서 네가 직접 주혁이랑 통화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래. 그래. 알았어. 참! 너희 집도 다들 잘 지내지? 언제 한번 같이 만나자. 알았어. 그럼, 그만 끊고 쉬어. 나중에 또 통화하기로 하고. 알았지?” 현아가 마치 자기 전화인 듯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통화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확실히 주혁의 주위 사람들을 현아가 모두 알고 있으니, 편한 일이 한둘이 아닐 것 같았다. “왜 누구야? 내가 지금 꼭 알아야 하는 일은 아니지?” 진수가 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태준인데, 참! 너 지금은 태준이도 기억 못 하지? 우리 동기인데. 아무튼 별일은 아니야. 나중에 내가 주위 사람들 이야기해 줄 때, 한꺼번에 알려줄게. 전화 용건은 별로 급하거나 중요한, 무슨 그런 것은 아니니까 지금 알 필요는 없어. 괜히 네 머리만 복잡해질라.” 현아 생각에는,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 주혁인데 이런저런 정보를 한꺼번에 담아 봐야, 주혁이 기억을 회복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단지 자기와의 사이의 기억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런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함께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현아의 말에 진수도 그 전화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현아 입장에서는 주혁의 기억 회복이자, 진수 입장에서는 진수가 주혁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주도권을 현아가 쥐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하루가 깊어 가고 있었다. 정말 길고도 긴 하루였다. 

    

그래도 한번 사용해 봐서 익숙하답시고 진수는 현아에게 먼저 씻고 나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현아야! 내 칫솔이 어느 거지?” 욕실 안에서 문만 살짝 열고 거실에 있는 현아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진수가 물었다. “뭐라고? 그 안에서 소리치면 잘 안 들린단 말이야.” 현아가 안방으로 들어오더니 욕실 문을 열고 안까지 들어와서 알려줬다. “이거, 이 파란색으로 양치하면 돼.” “알았어. 얼른 나가. 나가서 문 닫고.” 현아가 욕실 문까지 열고 들어올 줄 몰랐던 진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현아가 박장대소를 하면서 말했다. “야, 돌아서기는 뭘 돌아서냐? 내가 네 벗은 몸, 그거 볼 거, 못 볼 거 다 봤는데. 하하하.” “아, 진짜. 그냥 나가 있으라니까. 얼른 나가.” 진수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현아가 욕실 문을 닫고 나갔다. 거실로 나온 현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주혁이 지금 기억을 잃어서 정신이 조금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담배를 피우지 못하거나, 커피 맛을 기억하거나, 와인 맛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주혁은 맞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을 보면 혹시 주혁의 몸이 기억하고 있을 만한 행동들을 자극하면, 머릿속의 기억이 빨리 되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주혁을 데리고 온 그 장소, 주혁이 매번 잠에서 깨어났다는 그 방과도 주혁의 기억 실종이 무슨 관계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현아의 능력으로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 같아서, 나중에 확인해 보기로 하고 일단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야,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욕실 문을 열고 불쑥 들어오냐?” 진수가 욕실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뭐 어때? 부끄러워? 하하. 자기는 아까 내가 나오는 것도 다 봤으면서 뭘 그래?” 현아가 놀리며 말했다. “아니 부끄럽기는 뭐가 부끄럽다고, 그냥 갑작스러우니까 그랬지. 내가 뭐 부끄러워서 그런 줄 알아?” “아이고, 그러셨어요? 하하하. 알겠네요. 부끄러워했던 건지 아닌지는 나중에 보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흐흐흐.” “아니 얘가 왜 이렇게 음흉하게 웃고 그러냐? 나중에 뭔 짓을 하려고 말이야.” 당황한 진수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내가 설마 남편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두려우신가? 그래?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 흐흐흐.” 여전히 현아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제 나도 자기 전에 씻고 나올 테니 너는 책을 읽든지, 글을 쓰든지 알아서 하고 있어. 아까 내가 네 책 꺼내 줬잖아. 책 읽다 보면, 생각보다 빨리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네가 쓴 책이니까. 안 그래?” “알았어. 그럼 나는 서재에 있을게.” 그렇게 말을 남기고 진수는 안방을 나와서 서재로 향했다. 역시 책을 읽기는 읽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기왕에 읽어야 할 책이라면, 얼른 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의자에 앉아 밀어 두었던 책을 당겨 다시 첫 장을 넘겼다. 

    

책은 추리 소설 특유의 몰입감을 주면서, 손을 쉽게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읽다 보니 나이도 진수와 같은데, 아니다.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에는 어제의 진수보다 네 살 정도 많았을 것이지만, 정말 치밀한 구성으로 숨 가쁘게 이야기를 전개한 점만 보아도 상당한 필력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 정도 되니까 많지 않은 나이에도 전업 작가로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글이라면 진수도 약간의 관심은 있었기 때문에, 주혁이 쓴 소설이 그저 그런 소설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줄거리는 단순했다. 갑자기 사라진 동생을 찾는 누나의 이야기였는데, 이야기의 곳곳에 드러나는 심리 묘사와 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전문적 지식을 놀라울 만큼 현실적인 표현으로 그리고 있었다. 원래 며칠을 두고 차분하게 읽어 보려고 했는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수의 시선을 책이 붙잡아 버렸다. 마치 경험한 사건을 묘사하는 것 같은 치밀하고 현실적인 구성은, 그쪽으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 수 없는 부분까지도 세세히 그리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몰입감이라면, 누구라도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욕실에서 나온 현아가 서재로 들어와 진수의 등 뒤에서 진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때? 네 글인데도 다시 읽어 보니 재미있어? 내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읽고 있네?” “어, 이거 내가 쓴 책 맞아? 정말 재미있는데? 내가 대단한 소설가였군.” 진수는 고개를 돌려서 현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어떻게 할래? 계속 읽을래? 아니면 오늘은 이만 잘래?” “음, 자야지. 그런데 지금 읽던 부분만 마저 읽고 잘게. 피곤하면 너 먼저 가서 누워 있든지.” “그럴래? 그러면 먼저 누울 테니까, 읽다가 밤 꼬박 새우지 말고 적당히 읽고 들어와. 나머지는 내일 또 읽으면 되잖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먼저 자고 있어.” 현아를 내보낸 진수는 읽던 책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렇게 책 읽기에 몰두하던 진수는 열두 시를 넘겨 새벽 두 시나 되어서 잠시 책에서 눈을 뗐다. 그래도 책 사분의 일 정도밖에 읽지 못한 것 같았지만, 내일을 생각해서 그만 잠자리에 들기로 하고 서재를 나왔다. 서재 밖은 온통 어둠이었다. 진수는 이곳이 자기 집이었으면 아무리 어두운 실내라도 방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아직 이 집 구조에 익숙하지 않았던지라 더듬거리면서 안방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안방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가자, 아까 진수가 잠들었던 방향으로 침대 위에 잠옷이 놓여있었다. 진수는 현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잠옷을 갈아입은 후에 아까처럼 침대 위 자기 자리로 들어가서 누웠다. 현아는 깊이 잠이 들었는지 진수가 이불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쌔근거리면서 잠자고 있었다. 진수가 이불을 당겨 덮으면서 현아 쪽도 함께 이불을 올려주자, 현아가 잠결인지 모르겠지만, 진수 쪽으로 돌아서며 아까처럼 다리를 거의 진수 배 위까지 올려서 걸쳤다. 순간 진수는 자기도 모르게 헉하는 낮은 숨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내 둘의 자세는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고, 진수도 바로 잠을 청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게 미혼이었던 진수는 이상한 곳에 와서 불과 하루 만에 벌써 두 번씩이나 낯선 여자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경험을 하게 되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그런 잠자리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안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진수도 금방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현아는 주혁이 들어오기 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주혁이 방에 들어오기 바로 직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우 잠에 들었는데 주혁이 들어오면서 다시 깨운 셈이었지만, 주혁이 미안해할 것 같아서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주혁은 최대한 현아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잠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올라와서 누웠다. 그제야 현아는 잠결인 척하면서 주혁의 몸 위로 다리를 올렸다. 원래 그 자세가 항상 주혁과 잠자는 자세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잠을 자야 잠도 잘 왔다. 현아가 다리를 올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주혁이 낮게 코를 골면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현아도 버릇처럼 잠든 주혁의 옷 안에 손을 넣은 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어 늦게 눈을 뜬 현아는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주혁을 바라보았다. 주혁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기 때문에, 주혁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현아도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분명히 쌔근거리는 주혁의 숨소리가 현아의 정수리를 간지럽히고 있을 정도로 주혁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음에도, 현아가 손으로 쥔 주혁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문득 어제의 생각이 떠올랐다. 주혁이 기억을 잠시 잃었다고 하지만 주혁의 몸에 간직된 기억은 그대로일 것이라던 생각이 지금 현아의 손 안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었다. 몸이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현아는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현아는 그 자세 그대로 누워서 손끝으로 주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예전 그대로라면 잠시 후, 주혁이 눈을 뜰 것이다. 현아가 종종 그렇게 주혁을 깨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혁이 깨어나면, 아침부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곤 했다. 그래서 오늘도 현아는 가능하면 평소와 똑같은, 주혁의 몸이 기억하는 자세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은 주혁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워낙 늦게 잠든 탓에 진수는 현아가 먼저 잠에서 깨어난 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낮에 느꼈던 이상한 기분을 다시 또 느꼈다. 순간 아마 이번에도 현아의 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뜬 진수의 얼굴 위 거의 얼굴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현아가 진수를 내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진수가 몸을 움찔하자, 현아가 웃으면서 자기의 입술로 가만히 진수의 입술을 덮었다. 지금까지의 신체 접촉이야 뭐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진수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았다. 현아에게는 지금 진수가 주혁이라는 확신이 있으므로 가능한 행위라고 해도, 진수는 그저 기껏 주혁의 역할에 적응해 보려는 타인이지 않은가? 그러니 현아의 이런 접근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현아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방법으로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현아는 현아 대로 확인하고 싶은 점이 있었으므로 쉽게 진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현아의 아래에서 우스꽝스럽게 버둥대던 진수는 어쩔 수 없이 결심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진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몸에서 힘을 빼고 무조건 현아에게 몸을 맡겼다. 현아는 자기 아래에서 버둥거리던 주혁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자 곧바로 늘 취하던 자세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진수는 결국 끝없이 깊고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현아의 몸속 가장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 가서, 자기의 몸 안에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던 진수의 흔적을 한 방울 남김없이 그 속에 뿌렸다. 그 순간 현아는 지금의 이 남자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진수라는 남자가 아닌, 남편 주혁이 확실하다는 더욱 굳은 믿음이 주혁을 받아들인 몸속 그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는 비록 잠시 기억은 잃었어도 주혁이 분명했고, 그 사실은 이전과 똑같은 자기의 몸짓에 대해 역시 이전과 똑같이 반응한 주혁의 몸이 증명하고 있음을 현아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다. 진수는 진수대로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현아가 흡족한 표정을 짓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물론 진수는 현아가 의도적으로 주혁의 육체적인 기억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행위를 유도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단지 평상시의 습관이어서 그랬으려니 했을 뿐이었지만, 현아는 이 행위로 인해서 더욱 주혁의 기억을 되살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굳게 할 수 있었고, 진수는 진수대로 자기는 주혁이 아닌 진수라는 사실이 어쩌면 잠시나마 자신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현아와의 섹스가 자연스러웠다. 그냥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온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에 그들은 함께 욕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거실로 나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진수는 이제 이곳에서의 생활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냥 주어지는 상황을 그때그때 넘기면서 당분간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수는 옆에 앉은 현아를 바라보며 씽긋 웃음을 지었고, 현아도 진수에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거실 창밖에서도 햇빛이 둘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의 두 번째 날이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현아는 진수에게 당장 진수가 주혁으로서 기억해야 하는 사항들을 일깨워 주기 시작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주혁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작업이라고 하지만, 진수의 입장에서는 거의 새롭게 주혁의 기억을 뇌리에 심어주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주혁이 알아야 하는 사항은 가족과 친지 관계였다. 물론 가끔 실수할 경우를 대비해서, 지난번의 기억 실종 사건을 소환하면서 핑계를 댈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언제까지 그렇게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주 어릴 적 기억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현아와 함께 한 시간 동안의 일들은 차근차근 알려주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현아의 집 가족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다음은 가까운 몇 명의 친구들과의 기억이었다. 물론 이 경우에는 현아와 공유하는 기억이므로 비교적 진수의 머릿속에 주입하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출판사 관계자들과의 기억도 되살려야 하고, 아무튼 현아는 주혁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아 일상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 주혁과 붙어 다니면서 주혁의 기억을 새롭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진수는 진수대로 지난번 카페 주인처럼, 현아와 다니며 마주치는 그저 그런 관계의 사람들에게는 적당히 눈치껏 대응하면서 주혁 행세를 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그렇게 불과 두 달 만에 진수는 제법 주혁으로 생활하면서 심각한 실수는 하지 않을 정도로 주혁 주변에 관한 정보를 머릿속에 심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진수가 심은 것은 아니고, 현아가 심어준 기억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게 그거 아닌가? 현아는 예전처럼 주혁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진수는 진수대로 이 생활에 적응해 갈수록 점점 진수 자신을 잃어가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지만, 현아와의 생활에서 오는 즐거움으로 그런 안타까움은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진수가 주혁이 되어가고 있는 동안, 어느새 창밖에는 8월의 뜨거운 햇빛이 온통 거리를 달구고 있었다. 주로 집안에서 생활하고, 나가 봐야 기껏 집 앞 카페나, 혹은 장 보러 가는 마트 정도였으므로, 진수는 시간이 그렇게 흐른 것을 거의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서재에 앉아서 창밖을 보니 뭔지 모를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 진수의 눈에 테이블 위의 라이터가 보였다. 그때까지 잠시 잊고 있던 라이터에 얽힌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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