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인 기억_2
“일단 들어와. 같이 한숨 자자. 매일 같이 자다가, 혼자 누우려니까 허전해서 안 되겠어.”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현아가 말했다. 물론 함께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주혁의 기억이 돌아올 것으로 믿고 있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어색한 분위기를 잠재우려면 같이 누워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침대 위에서의 습관이나 뭐 그런 것들도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을까?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육체는 분명히 주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실제로 피곤해서 눕더라도 옆에 주혁이 없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주혁을 침대로 이끈 것이다. 진수도 스스럼없이 침대 위로 올라와서 현아 옆에 누웠다. 생각보다는 그저 담담한 기분이었고, 이런 현아와의 신체 접촉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연스러워 보이게 행동할 수 있었다.
현아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 진수의 팔을 베고 진수에게 기대어 진수의 배 위로 발을 올렸다. 아마도 항상 이런 자세로 잠이 들었나 보다 하는 생각에 진수는 그냥 현아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사실 진수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오래지 않아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자세로 잠이 들었던 진수는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놀라서 눈을 떴다. 현아는 여전히 진수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는데, 이상한 기분이라고 느꼈던 것은 현아의 손이 진수의 옷 속으로 들어와 맨살을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현아는 깊이 잠들지도 못한 것 같았다. 진수는 살그머니 현아의 손을 붙잡아서 뺄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손을 넣어 자신을 쥔 채 잠자고 있는 현아가 혹시 무안해할지도 몰라서 모른 척 다시 눈을 감았다. 그냥 현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두기로 했다.
얼마나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수가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많이 어두워진 후였고, 옆에서 잠을 자던 현아는 이미 잠에서 깨어 방 밖으로 나간 후였다. 진수는 눈을 뜬 채로 그냥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벽지의 천정에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부모님 얼굴도 그렇고, 어제까지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들의 얼굴도 차례로 지나갔다. 조금은 우스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회사 일이 걱정된다는 것은 진수가 생각해도 공연한 오지랖인 것 같았다. 사정이 생겨서 진수가 출근하지 못하면, 회사에서는 알아서 다른 인원이 진수의 일을 대신 처리할 것이다. 진수 한 명 없다고 해서 회사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런 상황이 잘못된 상황일 테니 말이다. 그렇겠지. 지금은 당장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이다 보니 잠시 당황했던 것뿐, 분명히 진수 없이도 그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단지 염려되는 일이라고는 사라진 진수를 걱정하실 부모님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의 진수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더니 현아가 들어와서 진수 옆에 걸터앉았다. “잘 잤어? 어제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정신없이 자더라? 그래서 그냥 깨우지 않고 놔뒀어.” “그랬어? 지금 몇 시나 됐지?” “벌써 저녁 여덟 시야. 잠깐 일어났다가 나중에 다시 잘래?” 현아가 진수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얼굴을 가까이 한 채 살짝 입술을 맞추면서 말했다. “그래, 나중에 다시 잠을 자더라도 이제 일어나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진수는 몸을 일으켜서 침대 밖으로 나왔다. 현아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은 진수가 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 주혁이는 직업이 글 쓰는 작가라고 했나?” “아, 맞다. 그렇네. 너는 작가야. 글 쓰는 일이 직업이지. 그래서 주로 집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바깥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아. 그건 다행이지? 당분간은 네가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잖아. 그 사이에 네 기억이 돌아오면 좋겠다.” “아, 그래서 서재에 책이 그렇게 많았구나. 그러면 주혁이가 쓴 책도 많이 있겠네?” 그러자 현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냐. 많은 것은 아니고, 그저 몇 권 정도야. 이따가 내가 보여줄게. 그 책들 읽다 보면 기억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진수는 자기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혁이 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원래부터 없던 주혁에 대한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현아가 실망하지 않도록 그렇게 대답했다.
안방에서 나온 진수가 서재로 향하자 따라 나온 현아가 말했다. “왜? 책 보려고?” “응.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냥 거실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도 뭐 하고 그래서.” “그래? 그러면 내가 네 책 보여줄게.” 서재에 들어간 현아가 책장 중간쯤에 있는 책을 한 권 꺼내서 진수에게 주었다. 표지를 보니 ‘이주혁의 장편 추리 소설’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주혁이 아마도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였던 모양이었다. 요즘은 참 흔치 않은 장르의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아서 책 표지를 펼쳐보니 책날개에 어제 휴대전화 거울 앱으로 본 주혁의 얼굴이 있었는데, 정말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럼, 책 보고 있어. 나는 잠깐 밖에 있을게.” 그렇게 말하고 현아는 방을 나갔다.
책은 적당히 두꺼웠다. 출간은 2019년 작년에 출간한 책이었는데, 아마 틈틈이 읽어서 완독 하려면 이삼일은 걸릴 것 같았다. 진수는 잠시 목차 부분까지만 읽어 보고는 책을 덮어서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책을 끝까지 다 읽는다고 해서 주혁을 이해하고, 주혁의 행세를 하는 데에 별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현아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가장 기본적인 주혁의 신상과 가장 가까운, 혹시라도 마주칠 수도 있는 가족과 주변 사람, 마지막으로 글 쓰는 직업과 관련해서 알고 지내던 사람 정도에 대한 정보만 확인해도 어느 정도는 주혁이라는 인물로 지내는 데에 큰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 정도는 알아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서재에서 나온 진수가 현아를 불렀다. 현아는 주방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뭘 하고 있어?” 주방으로 다가가며 진수가 물었다. 진수가 다가가니 현아가 돌아보며 웃었다. “아냐, 이제 다 했어. 늦었기는 해도 저녁 대신 뭐라도 좀 먹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서 술안주 만들고 있었지. 잃어버렸던 너를 찾아온 기념으로, 술 한잔 마셔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내가 술 좋아했나 보네? 너도 좀 마시나?” “농담해? 야, 술이라면 내가 너보다 고수라는 사실도 기억 안 나?” 주혁이 술을 좋아했고, 현아도 술을 잘 마신다는 말에 진수는 조금은 안도했다. 물론 주혁이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고 하니 그것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문제겠지만, 혹시 이런 사태가 오히려 금연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흡연 욕구를 참아보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의 이 육신은 주혁이므로, 술이든 담배든 주혁의 습관대로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술로 마시려고? 집에 술이 많았나?” 현아가 주방 한쪽에 있는 와인셀러에서 와인을 한 병 꺼내 와서 식탁에 앉았다. “오랜만에 우리 이거 마시자. 너무 독한 술은 마시지 말고.” “그러자. 와인은 나도 처음인데.” 무의식 중에 진수가 와인을 처음 마셔본다고 하자, 현아가 말을 고쳐주었다. “아냐. 주혁아, 너도 와인은 종종 마셨어. 마시다 보면 입이 와인을 기억할 거야.” “그렇겠지? 그럼 마셔보자고.” 현아가 와인잔을 두 개 꺼내왔고, 잔마다 와인을 절반 정도 따라서 진수 앞에 잔을 하나 놓았다.
둘은 가볍게 건배하듯 와인잔을 부딪친 다음,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진수는 처음 마시는 와인을 잠시 한 모금만 입 안에 넣어서 맛을 보더니, 이내 한 모금을 더 마셨다. “내가 글을 쓰면서 술을 자주 마셨던가?” “그럼. 넌 솔직히 술을 좀 줄였어야 했지. 주량도 약해서 조금만 많이 마시면 취하는 처지에, 술은 또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라. 아주 연구 대상이에요. 하하.” “그랬어? 하하. 그랬군.” “왜? 지금 기억에 네가 술을 아주 잘 마셨던 것 같아서 그래?” “아냐. 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나저나 이 와인 맛 괜찮네?” “당연하지. 그 와인을 네가 제일 좋아했잖아. 그런 것을 보니, 네 입맛은 기억을 잃지 않았나 보네. 그래도 다행이다. 그렇지?” 현아는 주혁이 와인 맛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머릿속 기억은 잠깐 잃었다고 해도 육체적인 기억은 무의식 중에라도 살아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지금 주혁을 보니 진짜 주혁이 주장하는 진수라는 사람이 아닌, 원래의 주혁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난번처럼 빠르게 기억이 돌아올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와인을 두 병 마셨다. 함께 식탁을 정리한 후에 둘은 거실로 나왔다. 진수는 와인 한 병에 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종일 긴장했다가 풀어지는 통에 거의 던져지듯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어제 마신 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다시 와인을 마신 탓에 약간은 흐트러진 자세로 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주혁이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아? 나도 내가 궁금하거든. 그리고 이 집에서 지내려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도 있을 테니 말이야.” 현아가 장난스럽게 진수 위로 쓰러지듯 엎어지면서 말했다. “그냥 무슨 시험공부하듯이 할 거 없어. 어차피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는 집에서 우리 둘만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여차하면 네 전화 내가 다 받아도 상관없어. 평상시에도 네가 글 쓰고 있을 때는 항상 그랬잖아. 네가 아는 사람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고 말이야.” 진수가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현아가 주혁의 가족을 비롯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학교도 같은 과에서 함께 공부했던 까닭에 동창 친구들도 모두 잘 알고 있었고, 출판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도 함께 만났기 때문에 현아도 알고 있었다. 물론 현아와 주혁의 가족만큼은 진수가 실수하지 않도록 현아가 알아서 대처해야 하지만, 여차하면 현아가 그들에게 주혁이 작년처럼 그렇게 잠시 기억을 잃었다고 둘러대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주혁으로 살아가는 것도 크게 문제가 되거나 어려울 점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진수는 점점 자신이 얼굴이나 이름만이 아닌 진짜 주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