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인 기억_1
진수는 진수대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금 자기가 오 년이나 미래로 와서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닌가?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야 원래 진수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고사하고라도, 당장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이 몰려왔다. 그냥 여자의 말에 따라서 여자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것도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특별한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긴 진수를 보고 여자가 말했다.
“주혁아. 지금 나도 잠시 혼란스러운데, 음.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잠시 기억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며칠 지내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일단 여기서 함께 지내면서 며칠만 지켜보자. 어때?”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 어디에선가 휴대전화가 울렸다. 안방에 들어가서 전화를 받고 나온 여자가 말했다. “주혁아, 너 잠깐만 밖에 나갔다가 올래? 집으로 갑자기 엄마가 오신다네. 안 와도 된다고 하는데, 굳이 오시겠다는 거야. 전해줄 게 있어서 오는 길이라고.” “아, 그래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하죠?”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에게 네가 지난번처럼 그렇게 되었다고 일일이 설명하기도 그러니까, 그냥 네가 길 건너에 있는 카페에 잠시 나가 있을래? 나중에 엄마 가시는 거 보고 나도 나갈게.” “길 건너에 카페요?” “응, 길 건너에 우리가 가끔 가던 카페 있잖아. 아, 참. 네가 기억 못 하지? 아무튼 길 건너에 가면 건물 이 층에 ‘레테’라는 작은 카페가 있어. ‘레테의 강’ 할 때의 ‘레테’ 알지? 거기에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금방 갈게. 너는 거기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잘 마셨어.” “네.” “참. 너 그 옷 입고 나갈 수 없을 테니 이리 와 봐. 다른 옷으로 갈아입자.” 여자는 진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외출복을 꺼내주었고, 그 옷으로 갈아입은 진수는 집을 나와 여자가 말한 카페로 향했다.
집이 대로변에서 조금 들어가서 있었기 때문에 길가의 카페에 가기 위해서는 조금 걸어 나와야 했다. 진수는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물론 카페에 들어가는 대신 주위를 좀 더 둘러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만일 그러다가 우연히도 주혁의 장모님이라는 또 다른 낯선 여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냥 카페로 가기로 했다. 이층에 올라가서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인 듯한 여자가 웃으면서 진수를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혼자 오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잠깐 혼자 있게 되었네요.” 진수는 최대한 안면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인에게 인사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편하신 자리에 앉아 계세요.” 진수는 아무도 없는 카페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밖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불과 반나절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지금 자기는 이렇게 낯선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생활하는 도중에 어떤 일이 있든지 최후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도 지금의 생활에 적응하면서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영영 돌아갈 수 없다면, 그때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단순히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인 여자가 커피를 들고 진수 자리에 와서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커피 있어요. 드시면서 편하게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진수도 가볍게 말했다. 여자가 돌아서자, 진수는 커피잔을 들어서 입에 대고 한 모금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진한 커피 향이 입안에 퍼지며 머릿속까지 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진수는 차분히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 보았다. 진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어차피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금이라도 그 집을 나와서 부모님께서 알아보시든 말든 예전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나머지 하나는 일단 지금 이 여자의 집에서 상황이 확인되어 정리될 때까지 머물며 신세를 지는 길이었다.
물론 두 가지 방법 모두 문제는 있었다. 첫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신분을 도용당한 것처럼 진수 자신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부모님뿐 아니라 친구들과도 그렇고, 무엇보다 직장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는 단 하루도 살아갈 길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여자의 말을 믿고 여자의 집에서 일단 지내기로 한다면, 지금의 몸으로 진수 아닌 주혁이 되어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진수는 주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주혁의 행세를 한다고 해도 당장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므로, 꼼짝없이 집에만 갇혀 있어야 할 것이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나 사회생활에 필요해서 알게 된 사람들 모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도 없는 상태이므로, 여자 이외에는 사람을 만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저 다른 사람들 눈에는 투명 인간처럼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욱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는 고민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잠시 후에 여자가 내려오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수는 고민이 되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래. 일단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가 하자는 대로 해 보자. 내가 스스로 생각해 낼 방법이 없는 이상, 언제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므로, 일단 당분간을 진지하게 현아라는 그 여자의 남편 주혁으로 지내보는 거야. 그러다 보면 뭐가 되어도 되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진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주혁으로 당분간 지내기로 한 진수는 휴대전화를 열어보았다. 그렇지만 연락처를 보아도 그렇고, 지난 통화록을 보아도 온통 알지 못할 사람으로부터 온 전화들뿐이었으며, 메시지를 열어봐도 알지 못할 내용들뿐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그저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보낸 사람이 친구나 집안사람일 것이라든지, 아니면 일 관계로 아는 사람일 것이라든지 대략적인 추측은 가능할 것 같았다. 특히 통화나 메시지 전송 횟수가 빈번한 사람일수록 주혁과 어떤 의미로든 관계가 깊은 사람일 것이므로, 가장 먼저 머릿속에 넣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 주혁의 휴대전화 연락처에는 그룹이 많지 않았고, 특별히 그룹으로 분류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일단 그룹으로 분류된 사람만이라도 정리해서 나중에 현아라는 그 여자에게 확인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현아가 주혁이자 진수의 아내이지 않은가.
일단 마음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지면서 마음속으로도 많이 안정되었다. 진수는 그제야 커피 맛을 즐길 여유가 생겼다. 생각보다 커피는 맛이 좋았다. 커피를 마시면서 진수는 현아라는 여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물론 현아는 자기를 잠시 기억 잃은 주혁이라고 알고 있으며, 며칠 지나면 다시 기억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진수가 일부러 자꾸 자기가 주혁이 아니라 진수라고 의도적으로 현아를 자극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현아도 이런 사태의 피해자일 수 있는데, 자꾸만 자기가 진수라고 상기시키다 보면, 현아가 간직한 주혁의 기억에 혼란만 더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주혁이 되어 현아에게 협조하기로 결심했다.
커피잔을 비울 때쯤 “안녕하세요? 저기 창가 자리에 앉아 계세요. 어떻게 함께 들어오시네요?”라는 주인의 말에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돌아보니, 현아가 웃으면서 주인에게 인사하고 진수가 앉은 테이블로 오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놀랍게도 또 다른 진수가, 지금 주혁의 얼굴을 하기 이전인 원래 진수 얼굴을 한 남자가 여자와 함께 오고 있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진수 자신은 지금 주혁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저 남자는 과연 누구인가? 혹시 저 남자도 얼굴만 진수인 다른 사람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싫은 이상한 상상이 잠시 진수의 머릿속을 스쳤다. 주혁의 얼굴을 한 진수가 가볍게 손을 들자, 현아가 와서 진수 건너편에 앉았고, 진수 얼굴을 한 그 남자는 테이블 옆에 서서 “이 작가님 오랜만입니다.”하며 인사를 했다. 깜짝 놀란 진수는 그저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요즘 저희도 자주 들리지 않아서 뵙지 못했나 봅니다.” “뭘요, 저도 실은 자주 들리지 못했어요. 그러면 나중에 또 이야기하기로 하고, 두 분 말씀 나누세요.” 남자는 선 채로 인사하고 나서, 진수가 앉은 자리를 지나 안쪽 자리에 앉았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던, 원래의 자기 얼굴을 한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현아는 무슨 일인지 내막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옆자리로 가자, 현아가 진수에게만 들리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입구에서 만나서 같이 올라왔어. 저분, 강이석 작가님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그건 그렇고, 어때? 커피 맛 좋지?” “응, 아주 맛있는데?” 예상치 못한 진수의 대답에 현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기억이 돌아온 거야?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 현아의 목소리가 기쁨으로 조금은 떨리는 듯했다. “아냐, 아직은. 그래도 네 말대로 이제 주혁이에 적응해 보기로 했어.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해 보니, 계속 어리둥절한 상태로 여기에 적응하지도 못한 채 지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네가 나보고 너한테 반말로 말하라고 했잖아?”
진수를 빤히 쳐다보던 현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진수의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그래.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너만 불편하지 않다면 그냥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친구처럼 지내는 거야. 그러다 보면 너도 기억이 돌아오겠지. 그렇지?” 진수의 태도 전환에 현아는 그저 기분이 좋았다. 사실 지금의 주혁은 기억만 잃었을 뿐, 어디 아프거나, 아니면 행동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신체적인 이상이 생겼거나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함께 생활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현아는 자기가 진수라고 하는 자기 앞의 저 남자를 주혁이라고 믿고, 그 남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주혁의 삶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려주며 지내다 보면, 언젠가 예전의 주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이제 엄마도 가셨으므로 주혁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야 하겠다고 생각한 현아가 말했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자, 엄마도 갔으니까, 집에 가서 좀 누워서 쉬자. 나 신경을 써서 그런지 조금 피곤한 것 같아.” “그래, 그럴까?” 진수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진수와 현아는 뒷자리의 그 남자에게 인사하고 카페를 나왔다. 거리로 나온 현아가 진수 옆에 바짝 붙어서 팔을 꼭 끼는 바람에 진수의 팔에 현아의 가슴이 밀착되자 갑자기 뭉클하면서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주춤한 진수의 몸짓을 느꼈는지 현아가 진수를 올려 보면서 물었다. “왜? 기분이 이상해? 하하하.” “아니? 아냐. 그냥 네가 그렇게 꼭 달라붙으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러지. 하하하.” 진수는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현아를 안심시켰다. 현아는 진수의 태도 변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진수의 팔에 매달려서 얼굴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진수는 현아의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진수가 서재로 들어가자, 현아가 뒤따라오며 말했다. “쉬지 않고 뭐 하려고 그래?” “응, 대낮에 눕기도 그래서 앨범이나 좀 보고 있으려고 그러지. 너는 그냥 안방에 가서 좀 누워 있어. 피곤할 텐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진수는 앨범 중에서 졸업앨범만 꺼내서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너 혼자 봐서 뭐 알아? 몇 반이었는지 알아야 널 찾을 거 아냐? 이리 줘 봐. 내가 알려줄게.” “피곤하다면서 괜찮아?” 진수가 미안한 듯 말하자, 현아가 의자를 당겨서 진수 옆에 앉았다. “나 혼자 누워서 뭐 하게? 이리 줘 봐.” 진수가 앨범을 현아에게 넘겨주자, 현아가 능숙하게 주혁의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열어서 진수에게 보여줬다. “이거 봐. 네가 옛날에 이랬다. 하하하. 다시 보니 진짜 귀여웠네. 하하.” 진수가 보니 여전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운전면허증에 있는 사진의 얼굴과 조금 비슷해 보이기는 했다. 물론 주혁 이외의 다른 학생들 얼굴은 모두 모르는 얼굴이었다.
고등학교 앨범을 넘기던 진수는 앨범 속에서 희미하게 낯이 익어 보이는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학생들 몇몇이 그룹을 지어서 찍은 사진 중에 기억은 희미하지만, 앞자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학생을 어디에선가 꼭 본 것만 같았다. ‘진주희’, 이름을 보아도 기억나질 않았다. 진수는 앨범을 덮고 표지에 있는 학교 이름을 보았다. ‘우진고등학교’, 진수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학교 이름이었다. 그러니 그 학교 앨범에 진수가 아는 얼굴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그 여학생이 꼭 아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앨범의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앨범 속 한 군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수에게 현아가 물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데? 아는 얼굴이야? 어디 봐. 나도 한번 보게.” 순간 진수는 공연히 현아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니라고 하고 지금은 현아와 나가서 쉬었다가 혼자 있을 때 다시 봐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아냐. 내가 잘못 본 것 같아. 그냥 나가서 같이 쉬자.” 진수는 앨범을 덮고 일어섰다. 현아는 갸웃하면서도 진수가 일어나니 함께 일어나서 따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