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아침_2
여자는 진수를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진수에게 잠깐 식탁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는 정수기에서 찬물을 한 컵 따라 들고 진수 앞에 앉았다. “너 솔직히 이야기해 봐. 정말 내가 누군지 몰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응?” 여자의 말을 들은 진수가 대답했다. “네. 정말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왜 여기에 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저는 그냥 어제 제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렇게 된 것이거든요. 이름도, 얼굴도 전부 바뀐 채 말이죠. 정말 무슨 일인지 오히려 제가 궁금하네요. 당신이 누구신데 제 아내라고 하는 거죠?”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진수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진수의 말에, 여자는 말없이 진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진수의 손을 잡았다. “주혁아, 정말 기억 안 나? 이주혁, 전현아 우리 부부잖아. 가만히 생각해 봐.” “글쎄 저는 모르겠다니까요? 그리고 제 이름은 이주혁이 아니라 김진수라고요. 김진수. 그리고 우리라니요. 왜 우리가 되죠? 저는 당신을 처음 봅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좀 쉬자.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좀 쉬어. 아예 씻고 나서 방에 들어가 좀 눕든지. 그리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여자는 일어나서 진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진수는 거실로 나와 집안을 돌아보았다. 집안에는 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거실 한쪽에는 긴 소파가 있었고, 건너편 벽에는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결혼사진 같았는데, 사진 속에는 이주혁이라는 남자와 그 여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진수는 점점 머리가 어질 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사진을 가까이에서 보니, 지금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여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어 보였다. 자기가 아침에 엉뚱한 곳에서 깨어났고, 주변이 낯선 곳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당연히 여자도 자기가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크게 확대한 사진 속 얼굴을 보니 어디에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진수가 스쳐 지나갔던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사진만 쳐다보고 있는 진수를 보고 여자가 말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얼른 좀 씻고 방에 가서 쉬어. 이번 주는 아무 데도 나갈 곳이 없다고 했으니 좀 자든지. 나도 아침부터 설쳤더니 피곤해. 같이 한숨 푹 자자.” 진수는 여자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벽에 걸린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같은 사람은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기는 잘 모르겠지만, 진수 자신이 정말 사진 속 이주혁이라면, 자기가 이 여자와 결혼한 것도 사실이고, 이 집에서 이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제까지의 삶이 진실인지, 아니면 지금의 삶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진수가 진실인지, 주혁이 진실인지조차 의심이 가는 순간이었다.
“저는 별로 피곤하지 않으니까, 이야기를 좀 더해도 될까요? 지금 정신이 혼란해서요. 괜찮으시다면 이주혁이라는 당신 남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진수의 말에 여자는 진수를 소파에 앉히고 자기도 옆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여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또 기억을 잃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네 이름이 이주혁이야. 우리는 대학 시절에 만나서 연애하다가 지난봄에 결혼했고, 지금은 이 집에 둘만 살고 있어.” “우리가 대학을 함께 다녔다고요? 그리고 결혼한 사이고요?” “그래. 우리는 친구이고 부부야. 저 사진만 봐도 알잖아?” “그럼, 참, 제가 또 기억을 잃었냐고 했죠? 그러면 이전에도 지금과 같은 적이 또 있었나요?” 진수의 물음에 여자가 말을 이었다.
“네가 기억이 정말 안 나는 모양이구나. 결혼 초에 한번 지금처럼 잠시 기억을 잃은 적이 있었어. 아니 몰라. 기억을 잃은 건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처럼 완전히 나를 몰라보고 남인 것처럼 행동한 적이 딱 한 번 있었어.” “그랬나요?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다시 당신을 알아보게 되었죠?” “몰라. 나도. 병원에도 가 보았는데, 의사도 원인을 잘 모르겠대. 정밀검사를 해 보자고 하더라. 그동안 너희 집과 우리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어. 걱정도 많이 했고. 그러다가 검사받는 날을 하루 앞두고 네가 어디엔가 가서 그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내가 아침에 일어났더니 너에게서 전화가 온 거야. 네가 잠에서 깨어났더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결혼 전에 살던 방에서 자고 있었더라는 거야. 그 집이 아까 너를 데리고 온 바로 그 집이야. 그래서 내가 가서 너를 데리고 왔지. 오면서 보니까 네 기억이 말짱해졌더라고. 다시 나를 알아본 거야.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다가 네가 또 어제 집을 나갔다가 들어오지 않아서 내가 아침에 전화해 보니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혹시나 하고 그 집에 갔는데 네가 지난번처럼 거기에 있었던 거지.”
진수는 여자의 말을 들을수록 점점 혼란스러웠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는 여기에서 진수도 아니고 주혁이라는 사람이며, 현아라는 이 여자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좋든 싫든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에 소리도 없이 사라진 자기 방에서 얼마나 놀라셨을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의 일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다시는 부모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도 같았다. 어떻게 하든지 돌아가야 하는데,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진수는 라이터가 생각났다.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이 꼭 라이터 탓인 것만 같았다.
진수가 손을 주머니에 넣어 라이터를 꺼내는 것을 본 여자가 물었다. “웬 라이터야? 너 담배 안 피우잖아?” 여자의 말을 듣고, 진수는 그제야 아침에 담뱃불을 붙였다가 갑자기 역한 구역질이 올라와서 불을 껐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의 육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주혁의 육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진수가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래서 아침에 담배를 피우려다가 구역질이 올라온 거군요. 주혁이라는 사람이 원래 담배를 못 피우던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그래, 너 원래 담배 못 피웠어. 담배도 못 피우는 것을 보니 주혁이가 맞기는 맞는데, 그 라이터는 뭐야?” “아, 이 라이터요? 글쎄 저도 잘 모르는 라이터입니다. 어제 우연히 제 손에 들어온 것인데, 사실 이 라이터 때문에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라이터가 제 손에 들어온 다음 날, 제가 이곳에서 깨어났잖아요.” “그래? 이상한 일도 다 있네.” 현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매우 혼란스럽거든요. 지금 상황을 보니 제가 아무리 이주혁이라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해도, 그쪽은 안 믿으실 것 같고요.” 진수의 말에 여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중에 또 이야기해 주겠지만 네가 자꾸 주혁이가 아니라고 헛소리하니까 이야기하는데, 일단 잘 들어. 우리 서로 같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알게 된 사이야. 같은 학과 동기로 입학했어. 연서대학교 문예창작과야. 그리고 졸업은 내가 먼저 했지. 너는 군대에 다녀오느라 나보다 이 년 늦게 졸업했고, 출판사 기획팀에서 잠시 일한 적도 있어. 그러니 우리가 알고 지낸 지는 올해가 십일 년째야. 결혼은 작년 봄에 했고, 지금 원지동, 이 집에서는 너랑 나랑 둘만 살고 있어. 아직 아이는 없지. 아니, 사실 나는 계속 아이를 원했는데, 네가 싫다고 했어. 아무튼 그랬고, 지금은 네가 출판사에서 나와 전업 작가를 하겠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다행스럽게 작년에 출간한 소설 반응이 좋았어. 그래서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된 거고. 그러니까 내가 너를 못 알아볼 리가 있겠어? 더군다나 너도 인정하는 것처럼 네 얼굴을 봐. 그 얼굴이 내가 십일 년을 보았고, 그중에 일 년이나 넘게 매일 끌어안고 잠자리에 든 얼굴인데, 네가 자기는 주혁이 아니라고 하니까 내가 얼마나 황당하겠어? 그나마 덜 놀란 것은, 그래도 작년에 네가 잠시 기억을 잃었던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며칠 지나면 기억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덜 놀란 거야. 알겠어?” 답답한 듯, 현아가 쉴 틈 없이 말했다.
“그런데 혹시 그 주혁이라는 분, 얼굴만 제 모습인 것이 아니라 말투나 분위기 뭐 그런 것도 지금 저와 똑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보고 자꾸 주혁이라고 하는 거죠?” “몰라, 분위기는 맞아. 그런데 네가 그렇게 깍듯이 존댓말을 해대는데, 말투가 어떤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러면 일단 너도 반말로 해 봐. 어떤지 한 번 볼게. 자꾸 적응 안 되게 존댓말 하지 말고 말이야. 나도 헷갈리잖아.” 현아는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분명히 생긴 모습은 주혁이 맞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들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도 들어보세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와 같은 나이군요. 당신이나 주혁이라는 분 말입니다. 하지만 사는 곳도, 졸업한 대학도 달라요. 저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반도체 회사 연구원입니다. 어제는 저녁에 친구들과 오랜만에 술을 한잔 마시고 집에 들어왔거든요.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깨어보니 지금 이렇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요. 모르니까 답답한 거죠. 그런데, 저는 당신을 본 적도 없는데, 당신은 지금 제 얼굴의 남자와 십일 년을 알고 지냈고,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났다고 하시니 제가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지만, 이 얼굴로는 집에 가 봐야 부모님께서 저인 줄 모르실 게 분명해서 가지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러니 제가 생전 처음 보는 당신께 그렇게 편하게 말을 척척 놓을 수 있겠어요? 당연히 불편하겠죠.” 진수의 말에 여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여간 그렇다는 이야기야. 너는 분명히 내 남편 주혁이 맞아. 잠시 기억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이 얼굴은 분명히 주혁이라고.”
여자의 이야기를 들은 진수는 말이 없었다.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만이 아니라 기회가 된다고 해도 다시 어제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좀 알겠어?” 생각에 잠긴 진수를 보며 여자가 말했고, 여자의 물음에 정신이 돌아온 진수가 대답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제가 기억을 잠시 잃었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저대로 하룻밤 사이에 제가 이상한 곳에 와서 있는 셈이니까요.”
진수의 말에 여자도 더 이상 진수에게 혼란을 주지 않으려는 듯 말했다. “주혁아, 네가 자꾸만 다른 사람이라고 하니까, 나도 일단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을게. 그냥 천천히 며칠 지내다 보면, 지난번처럼 기억이 되돌아올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우선은 네가 주혁이다, 아니다 따지지는 말고, 며칠 쉬면서 지내보자. 알았지?” 진수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지금의 상황을 보니 점점 어제까지가 진실인지,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진실인지조차 어느 한쪽이 옳다고 장담할 수만은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진수 자기에게 닥친 것도 무슨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가 있더라도 진수는 자신이 주혁이라는 남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에 놓이기는 했어도, 나중에 또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쉽게 눈에 보이는 지금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진수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도 생각을 정리해 볼게요. 일단 제가 이주혁이라는 당신의 남편이라는 말씀인 거죠? 그리고 지금은 작년처럼 잠시 기억이 이상해진 것뿐이고요. 그래서 며칠 지나면 예전처럼 다시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거잖아요? 알겠습니다. 저도 헷갈리기는 하지만, 일단 얼굴부터가 당신이 말하는 대로 이주혁이라는 사람의 얼굴이므로, 저도 사태의 본질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당신만 괜찮다면 이곳에서 잠시 폐를 끼치고 있겠습니다.” 진수의 말에 여자도 일단 한숨은 쉰 듯 말했다. “그래, 일단 좀 쉬자. 그리고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내가 알아서 잘 이야기해 줄게. 그냥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될 거야. 기억은 천천히 찾아가면 되니까.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당신 말대로 기억을 찾든, 아니면 저는 어제의 저로 돌아가고 당신 남편도 어제의 이전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진수도 우선은 자기가 진수라는 사실을 포기한다기보다, 지금 이 여자가 말하는 진짜 남편 주혁의 행방을 확인하는 과정이 우선인 듯해서 잠시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자기가 무슨 이유에서든 주혁의 육체 안에 들어와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므로 그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여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주혁아, 우선 그 말투부터 고치면 안 될까? 네가 그렇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니까 적응도 안 되고 어색해 죽겠다. 우리 원래 서로 반말로 이야기했거든. 워낙 오래 연애하다가 결혼해서 그 버릇을 아직은 고치지 못했다고. 그러니 네가 그것 하나만 도와주라. 얼굴은 분명히 네가 맞는데, 하는 말을 들으면 정말 좀 그래. 갑자기 정이 떨어진다니까? 그러니까 너도 그냥 반말로 할 수 없어? 그래야 나도 너에게 편하게 대하면서 기억을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잖아.” “아, 그런가요? 그래도 그것은 제가 불편한데요. 처음 보는 분께 말이 금방 낮춰지지 않네요. 그리고 내일 당장이라도 제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당신의 남편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만 된다면 그때부터는 제 얼굴에서 반말을 들으실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저에게 너무 큰 기대는 안 하시는 편이 저에게도 덜 부담될 것 같습니다.” 진수는 끝까지 현아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현아도 지금 주혁의 기억이 이상한 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 주혁을 몰아세우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 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나중에 편해지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결국 그렇게 되었다. 라이터 때문에 그렇게 되었든 어쨌든 간에 진수가 이상한 상황에 빠진 것은 지금의 상황을 보면 사실인 것 같았고, 지금부터는 진수가 알아서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하려니 마음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주혁이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야 할 것이고, 집을 나간다면 단 몇 발짝조차 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지금 주혁이 되어 있듯이 진짜 주혁도 어디인가 다른 곳에 있을 텐데, 과연 그는 어디로 간 것인지는 정말 궁금했다. 아무튼 진수도 이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고, 여자에게도 협조적으로 대하기로 했다. 여자는 잠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말했다. “주혁아, 방에 옷을 꺼내 놨으니까, 우선 간단히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 그리고 그 옷은 세탁실에 갖다 놓고. 아니다. 참, 세탁기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 그냥 그 자리에 벗어두기만 해. 내가 치울게.” 진수는 여자가 나온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그냥 평범한 침대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 여자가 꺼내 둔 속옷과 실내복처럼 생긴 옷이 있었다. 진수는 일단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기 아래에 서서 물을 틀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방울이 정수리를 때리며 흘러내렸다. 진수는 한참을 그 자세로 서 있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왜 자기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앞으로는 이 여자와 이 집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그렇게 욕실에서 한참을 보낸 후에 진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옷은 정말 자기 옷처럼 진수에게 딱 맞는 크기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진수를 보고 여자가 말했다. “거 봐, 이제 좀 볼만하네. 씻으니 어때? 개운하지?” 진수도 엉겁결에 대답했다. “네, 그렇네요. 고맙습니다.” 진수는 그냥 편하게 소파에 앉았다. 여자가 다가오더니 진수 옆에 앉았다.
“배고프지 않아? 뭘 좀 먹을래? 아침도 안 먹었을 거 아냐?” 아무리 봐도 여자는 진수가 정말 주혁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뭐 아무러면 어쩌랴 싶었다. 이제 돌이킬 수도 없는데 말이다. “네, 조금 배가 고프네요. 하하하.” 진수는 처음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진수의 웃는 얼굴을 본 여자도 생긋 웃으며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여자는 냉장고에서 반찬을 몇 개 꺼내고 밥과 국을 그릇에 퍼 놓은 후, 진수를 불렀다. 진수가 주방으로 들어와서 식탁에 앉자, 여자도 진수를 마주 보며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숟갈을 든 진수는 가장 먼저 국을 떠서 한 모금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 전체에 퍼지는 소고기뭇국이 진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국뿐 아니라 다른 음식도 진수의 입맛에 꼭 맞았고, 엊저녁에 마신 술기운을 깨끗이 씻어 가는 것 같았다. 여자는 조용히 앉아서 식사하는 진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다 먹었으면 이제 거실에서 쉬고 있어. 이거 치우고 나도 나갈게.” 진수가 식사를 끝내자, 여자가 말했다.
거실로 나온 진수는 그제야 집안을 좀 더 자세히,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까는 벽에 걸린 사진만 눈에 들어왔는데, 지금 다시 보니 사진 아래에 옆으로 긴 거실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 작은 소품들이 몇 개 놓여있었다. 그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간단한 살림살이였다. 아마 주혁과 여자가 가구를 주렁주렁 늘어놓고 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런 점은 진수의 성격과도 어느 정도 비슷했다. 진수도 집안 여기저기에 자리를 차지하는 가구를 들여놓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집에도 가구보다는 공간이 더 많았는데, 이 집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렇게 집안을 둘러보며 생각해 보니 어차피 이 집에서 당분간 지내야 할 텐데 주혁이 진수와 어느 정도는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서 그 점은 다행인 것 같았다.
“저, 이제 저는 어느 방에서 지내면 되죠?” 식탁을 치우고 거실로 나오던 여자에게 진수가 물었다. “아, 그렇지? 이리 와 봐. 일단 집안부터 돌아보자.” 진수에게 집안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던 여자는 서재처럼 꾸며놓은 방의 방문을 열고 말했다. “당분간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을 때는 이 방에서 지내면 될 거야. 네가 가장 좋아하는 방이거든. 그리고 침실은 하나뿐이니까, 나중에 잠잘 때는 그 방에서 나랑 같이 자면 되고. 알았지?” 여자의 말을 듣고 진수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책상 같은 넓은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방안을 돌아보니 한쪽 벽면은 책장으로 되어 있었고, 책장에는 많은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주혁이 책을 읽는 것을 즐겼던 것 같았다. 진수에게 좀 쉬고 있으라고 말하며 여자가 방을 나가자, 진수는 책장에 꽂힌 책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전공 서적이었을 법한 각종 문학 관련 책들과 시집이나 소설책, 간혹 자기 계발서 종류의 책도 눈에 띄었고, 맨 아래쪽에는 학교 졸업앨범을 포함한 여러 권의 앨범이 꽂혀있었다. 많은 문학 관련 책을 보고 있자니, 한때 진수에게도 학창 시절에는 멋진 문학청년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진수는 앨범 가운데 한 권을 뽑아 들고 의자에 앉아서 펼쳐보았다. 여행 중에 찍은 사진 같았는데, 대부분이 주혁과 여자의 사진이었고 가끔 일행인 듯 보이는 다른 남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사진 한쪽에 찍힌 촬영 일자를 보니 한참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진수는 자기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진 속의 남녀는 파릇파릇하게 나이 어린 얼굴이었다. 사진마다 촬영 일자를 들여다보던 진수는, 갑자기 생각난 듯 방을 나서서 안방으로 갔다. 아까 옷을 갈아입으며 지갑과 휴대전화를 꺼내 놓는다는 것을, 그냥 주머니 안에 둔 채 옷을 욕실 입구에 치워둔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지갑과 휴대전화를 가지러 안방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진수가 욕실 앞에 벗어 놓았던 옷을 집어 드는 순간, 눈앞에서 욕실 문이 열리며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지만 몸을 가리려 하기는커녕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러운 얼굴로 진수를 보고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왔고, 반대로 진수는 갑작스러운 광경에 고개를 돌리고 쑥스러운 듯 죄송하다는 말만 남긴 채 옷을 들고 안방을 나왔다. 본의 아니게 여자의 벗은 몸을 본 셈이었다. 거실로 나온 진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켜고 바탕 화면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2020년 5월 20일. 진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주혁이 되어버린 것도 그런데, 왜 일자가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2020년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자기의 육체와 신분만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시간대도 오 년 후의 시간으로 바뀐 셈이었고, 그렇다면 주혁이 되었든, 진수가 되었든, 어느 쪽이라도 자기는 지금 스물여섯 살이 아닌 서른한 살이 되는 셈이었다. 물론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스물여섯의 시절로 돌아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진수는 뒷목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만일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래서 고스란히 다섯 살을 더 먹은 상태로 지금 이 여자의 남편이 되어 살아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진수는 자기 인생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옷을 입고 거실로 나오던 여자는 소파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진수를 보더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생각이 떠올랐어?”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진수가 말했다. “저, 방금은 죄송했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기는 뭐가 죄송해? 우리 부부잖아. 원래 욕실 드나들 때 항상 그랬는데 뭐가 죄송해? 샤워도 함께 하고 그러는데.”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하긴 생각해 보니 여자가 주혁의 아내라면 남편이 아내의 벗은 몸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일도 아니었을 것 같기는 했다. 여자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뭘 보고 있었어? 무슨 기억이라도 떠오른 거야?”
“저. 지금이 2020년이 맞나요?” “응? 2020년? 그렇지 2020년 맞지. 그런데 그게 왜?” “아니, 혹시 2015년이 아닌가 해서요. 어제까지 분명히 그랬는데, 저도 이제야 생각나서 일자를 확인해 보았더니 2020년으로 나오길래요.” 진수의 말에 여자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혁아, 너 어제 뭐 했는지는 기억나?” “네? 어제요? 어제야 뭐 회사에서 일하고 나서 저녁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는데. 그리고 집에 와서 곧장 잠들었거든요. 아침에 깨어나니까 아까 그 건물이었고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그러면 어제는 분명히 2015년이었고 너는 진수라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2020년이고 주혁이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네? 이게 말이 되니? 아무래도 너, 그냥 기억만 잃은 건 아닌가 보네. 뭔가 이상하잖아.” 여자도 이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저 막연하게 주혁이 하루아침에 기억을 잃고 이상한 말만 하는 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자기가 진수라는 남자라고 우기고 있는 주혁의 기억이 너무 또렷하지 않은가? 여자도 처음으로 주혁의 말에 의혹을 품기 시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