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아침_1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던 진수는 그날따라 취기가 올라옴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소주 서너 병쯤은 가볍게 마시던 주량이었는데, 아무래도 술을 줄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다. 골목 입구 편의점에서 차가운 사이다를 한 캔 사서 마시고, 정신을 차려 집으로 향했다. 진수의 집이 역세권이라고는 하지만, 역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그 길은 버스가 다니거나 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편의점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온 진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집 안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지금 그냥 들어가면 내일 출근할 때까지는 담배를 피울 수 없을 것이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던 진수는 그제야 주머니에 라이터가 없음을 알아챘다. 어디에서 꺼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술집에서 집에 오는 사이에 흘린 것 같았다. 그냥 편의점에서 흔하게 살 수 있는 라이터라서 아까울 일은 없지만, 당장 담배를 못 피우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요즘은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없어 담뱃불을 빌리기도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던 진수의 눈에, 저만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진수는 아마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이라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저, 죄송하지만 불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진수의 말에 남자는 진수를 한 번 쳐다보았다. 먼 곳에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나이는 진수 또래로 보였고, 옷차림은 어딘가 모르게 칙칙한 느낌을 발산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트리고 눈은 아주 큰 얼굴에 옷차림까지 그러니까, 마치 몸에 맞지 않게 큰 남자 옷을 걸친 여자처럼 보였다. 진수는 일단 담뱃불을 빌려야 했기 때문에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행동을 기다렸다. 그러자 남자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진수에게 건넸다.
그러고 보니 더욱 이상한 것은 그 남자의 표정이었다. 진수가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진수에게 라이터를 건네는 표정에서 아주 미묘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술에 적당히 취한 진수가 보기에도 그 표정에서 무엇인가 기대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의 얼굴에서는 가벼운 미소까지 볼 수 있었다. 진수가 받아 보니 아주 오래된 라이터 같았다. 지금은 사람들이 흔히 갖고 다니지 않는 ZIPPO 라이터인데, 외장만 보아도 한참 전에 생산된 라이터처럼 보였다. 진수는 그 남자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고개를 숙여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감사합니다. 잘 썼습니다.” 담배에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한 진수가 라이터를 돌려주려 고개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분명히 조금 전에 진수 앞에서 라이터를 빌려준 남자가 온데간데없었다. 진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남자를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아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진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라이터를 던져버리려다가 다시 한번 라이터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바닥에 ZIPPO라는 글자와 제조 회사명, 그리고 뜻 모를 몇 개의 숫자만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는 라이터였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진수는 라이터를 그냥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온 진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요즘 세상에 귀신이 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왜 자기에게 라이터를 켜서 담뱃불을 붙여준 것이 아니라 아예 라이터를 건네준 것일까? 마치 자기에게 라이터를 주기 위해 그 장소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진수는 다시 한번 라이터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노트북을 열고 ZIPPO 라이터를 검색했다. 검색된 내용을 보니 ZIPPO 라이터는 1932년부터 생산되었다고 하는데, 조금 더 검색해 보니 지금 자기 앞에 놓인 모델은 1935년에 생산된 ZIPPO 라이터의 Replica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빈티지 모델로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제품이었다. 그럴수록 진수의 궁금증은 더욱 켜져만 갔다. 이렇게 귀한 라이터를 자기에게 주고 사라진 아까 그 남자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 전 생각에 빠져있던 진수는 일단 라이터를 책상 위에 놔둔 채,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오랜만에 과음해서 그런지 아직 머릿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오늘 마신 술은 다 깨어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라이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진수는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가 잠에서 깨어난 진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제 분명히 자신의 방에서 잠들었는데, 진수가 깨어난 곳은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마치 낡은 고시원의 방처럼 겨우 몸을 누일만한 좁은 침대와 책상만 하나 있을 뿐, 가구라고는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그런 공간에 있는 것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문밖은 어른 두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좁은 복도였는데, 양쪽에는 그가 방금 연 문과 똑같은 방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으며,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은 진수는 일단 책상 앞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옷을 집어서 주머니를 살폈다. 주머니에는 다행히도 휴대전화와 약간의 현금이 담긴 지갑, 그리고 담배와 어제저녁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라이터가 들어있었다.
그제야 진수는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라이터를 열어보았다. 뚜껑을 몇 번 여닫다가 담배를 한 개비 꺼내서 물고 불을 붙였다. 순간 갑자기 역한 구역질이 나면서 진수는 무의식적으로 담뱃불을 책상 위 재떨이에 비벼 껐다. 마치 처음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계속된 낯선 상황에 의아해하던 진수는 일단 어머니께 전화하려 휴대전화 단축키 1번을 누르려다가 화면에 뜬 연락처에 ‘어머니’가 아닌, ‘나의 사랑’이라는 이상한 번호가 뜨는 것을 보고 황급히 전화 걸기 창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확인해 보니, 휴대전화 연락처에는 그가 알던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아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번호만 저장되어 있었다. 정말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진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나서 옷을 입고 방 밖으로 나왔다. 출입문을 찾아 복도를 걷다 보니, 옆 방문이 열리면서 진수 또래로 보이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오다가 진수에게 말을 건넸다. “아, 이형! 어디 가세요?” 남자는 아주 가까운 사이인 듯 웃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진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잠시 갸웃거리는 진수에게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 다시 말을 걸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진수는 그냥 무시하기에는 좀 아닌 것 같기에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저를 아세요?” 진수의 말에 그 남자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잠시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에이, 왜 그래요? 주혁 씨 오늘 조금 이상하네? 저를 모르겠어요?” 그 남자는 진수를 주혁이라고 부르며, 도무지 왜 자기를 못 알아보는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주혁이라고요? 제 이름이 주혁?” 진수는 정말 자기 정신이 이상해진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누구이고, 왜 자기 이름이 진수가 아닌 주혁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순간의 적막을 깨고 진수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 창에는 발신인이 ‘나의 사랑’이라고 떴다. “잠깐만요.” 진수는 그 남자에게 손으로 전화받는 자세를 취하면서 복도 끝으로 향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주혁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어제는 왜 집에도 안 들어오고 말이야.” 여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진수는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여자는 누구인데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진수가 대답하지 않자, 그 여자는 다시 말했다. “아니, 어디냐고? 말해 봐. 내가 데리러 갈게.” 여자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진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는 고사하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집에 안 들어오다니, 그렇다면 지금 휴대전화 너머의 여자와 진수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결혼은 고사하고 여동생이나 사귀는 여자도 없는 진수에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왜 말이 없어? 너 지금 거기에 있는 거지? 맞지? 거기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금방 갈 테니까.” 진수가 말이 없자 답답한지 여자는 자기가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진수가 어디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데리러 오겠다는 것을 보면, 아마 전에도 이곳에 와서 이주혁이라는 남자를 데리고 갔었던 모양이었다.
출입문 밖으로 나온 진수는, 고개를 돌려 자기가 나온 건물을 쳐다보았다. 그냥 평범한 건물인데, 가정집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무용 건물이나 무슨 숙박업소 건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출입문 옆에 <여주로 63길 46>이라는 주소가 붙어 있었다. 휴대전화 앱으로 확인해 보니 다행스럽게도 집에서 아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진수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곧장 집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잠시 주위를 돌아보던 진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옆방 남자와 휴대전화 속 여자가 자기를 주혁이라고 부른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내든 진수는 거기에 적힌 ‘이주혁’이라는 이름을 보고 소스라치듯 놀랐다. 나이만 진수와 동갑일 뿐, 사진은 진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제야 진수는 휴대전화의 거울 앱을 실행해서 자기 얼굴을 비춰 보았다. 거울 속에는 전혀 본 적 없는 남자가 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수는 하룻밤 사이에 이름도, 얼굴도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그저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고 집에 돌아와서 잠들었을 뿐인데, 불과 몇 시간 만에 자기도 모르는 사람의 신분으로 바뀌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런 얼굴로는 집으로 갈 수조차 없는데 말이다. 부모님이 분명히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길에 서서 고민에 빠져있는데, 진수 앞에 빨간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다가와서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아까 휴대전화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여자가 차에서 내려 진수 앞으로 다가왔다. 진수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여긴 다시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또 와서 있고 그래?” 진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신데요?” 진수의 말에 약간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던 여자는 이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아, 또 왜 그래? 정말 내가 누군지 몰라? 네 아내지 누구겠어?” “당신이 왜 제 아내인가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저는 결혼한 적도 없는데 말이죠.” 진수는 여전히 의문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말했다. 가뜩이나 얼굴까지 바뀐 채 낯선 곳에서 깨어난 것도 어이없는데, 결혼하지도 않은 진수 앞에 자기가 진수의 아내라는 여자까지 나타났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진수의 말에 여자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다짜고짜 진수의 팔을 잡아 이끌며 말했다. “일단 차에 타자. 가면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자는 조수석 문을 열고 진수를 차에 태웠다. 엉겁결에 여자의 차에 올라탄 진수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운전석에 오른 여자는 어디론가 차를 몰고 가기 시작했다. 차 안에는 잠시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다. 여자는 말이 없었고, 진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진수는 운전하고 있는 여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얼핏 보기에 나이는 진수보다 서너 살 정도 많아 보였다.
“너 지금, 정말 내가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여자가 잠깐 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수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하룻밤 사이에 이주혁이라는 남자로, 그리고 지금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 여자의 남편이 되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여자가 없는 말을 지어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왜 당신과 이렇게 같이 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진수의 말을 들은 여자는 살짝 찡그리는 얼굴로 진수를 돌아보다가는 이내 얼굴을 풀고 말했다.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해. 이제 다 왔으니까.” 차는 시내를 벗어나서 한적한 거리로 접어들었다. 진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동네인 데다가 모르는 여자와 차 안에 함께 앉아 있자니 자꾸만 시트가 불편하게 느껴져서, 여자가 눈치채지 않도록 자세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좌불안석인 진수를 바라보던 여자가 말했다.
“왜? 어디가 불편해? 조금만 참아. 이제 다 왔잖아.” 차는 앞에 보이는 주택가로 들어가다가 커다란 벙커 주차장이 있는 주택 앞에 멈췄다. 여자는 주차장 셔터를 올리고 차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여자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 진수도 함께 차에서 내렸다. 여자는 진수의 손을 잡은 채 주차장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진수는 그저 여자에게 손을 맡긴 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문밖에는 집안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는데, 여자는 머뭇거리는 진수의 손을 꼭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수가 현관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여자가 다시 진수를 이끌었다. 진수는 도대체 자기가 왜 이곳에 와야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제 여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